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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녀는 괴로워> 주인공 한나는 성형수술 전, 무대에 오르는 가수 대신 노래를 부르는 '얼굴 없는 가수'를 직업으로 삼았다. 병원에도 그런 의사들이 있다. 특히 큰 병원일수록, 유명한 의사는 진료만 보고, 수술에는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다. 아무래도 큰 병원에서 직위가 높은 의사들은 진료뿐 아니라, 경영 및 대외활동으로 바쁘기 때문에 모든 업무를 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환자와 직접 얼굴을 마주 하지 않아도 되는 수술에는 진료를 봤던 의사 대신 다른 의사가 참여해서 수술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일명, 그림자 의사(섀도우 서전 Shadow surgeon)이라 한다.

그림자 의사가 대두된 것은 기업형 성형외과가 등장하고, 양악수술과 안면윤곽수술이 유행하기 시작한 때와 거의 비슷하다. 양악수술과 안면윤곽수술은 기존의 성형수술에 비해서 시술 비용이 높기 때문에, 많은 성형외과에서 앞다투어 이런 수술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 수술에 대해 트레이닝을 받고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는 의사들이 그만큼 있으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그림자 의사들이 다수 존재했다.

병원에서는 자본력과 마케팅으로 양악수술이나 안면윤곽수술을 하고자 하는 환자를 모집하고, 환자들은 그 병원의 브랜드를 보고 찾아간다. 진료실에서는 매체에 많이 나오고, 유명한 의사가 상담을 한다. 하지만, 그 의사가 해당 수술을 하기 위한 트레이닝을 받거나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수술을 권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병원은 그 병원 원장이 양악수술을 할 줄조차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십년 이상의 경력이 있는 것처럼 광고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환자만 온다면 그림자 의사에게 맡기면 되기 때문이다.

그림자 의사들은 나름대로 편한 점이 있다. 진료 일선에 나서지 않으니 환자와의 관계에서 자유롭다. 감정노동을 하지 않고 그저 자기 할 일만 하면 된다. 사람대하는 것이 불편한 사람에게는 적격이다. 그리고 수술 이후에 발생하는 문제는 병원에서 감당을 해주니 그 역시 편하다고 느낄 수 있다.

대부분의 산업에서 규모가 커지다보면 업무가 나뉘어지게 된다. 프로세스를 쪼개어서 각각의 업무를 전문적으로 전담하는 분업화가 이루어진다. 이는 산업화에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가 대표적인 분업화의 예이다.

그림자 의사의 등장은 산업화하는 의료현장을 나타낸다. 진료과정도 분업화하면서 진료보는 의사와 수술하는 의사가 달라지는 것이다. 각자 자기가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되니, 누이좋고 매부좋은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가 빠져있다. 바로 환자와의 관계이다. 의료가 다른 산업과 가장 다른 점이 의료진과 환자와의 관계이다. 물건을 파는 것과는 달리 지속적인 관계 형성과 의사소통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진료현장에서는 '라뽀'를 중요하게 여긴다. 프랑스어로 <마음의 유대>라는 뜻인데, 사람 대 사람 사이의 언어적 그리고 비언어적 관계를 뜻한다. 라뽀가 형성되면서 환자와 의사는 공감대를 가지고, 동반자적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림자 의사와 환자는 이런 라뽀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저 업무를 수행하는 대상으로 여겨질 뿐이다. 이는 인간을 도구 내지는 수단으로 바라보는 산업화의 시각과 맞닿아 있다. 산업화의 기저에는 기계론적 자연관이 깔려 있다. 기계론적 자연관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여러 부품들로 구성된 기계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이를 분해하고 재구성하는 대상으로 인체를 바라본다.

과연 어떤 게 이상적인 의료진과 환자와의 관계일까? 한 번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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