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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잃은 아빠입니다. 3살 아이가 기도삽관을 하고 산소호흡기를 낀 채 중환자실에 들어갔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기 싫다고 인형을 붙잡고 우는 아이를 보낸 부모의 마음,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하실 겁니다. 아픔을 잊고 지내왔습니다. 근데 몇 년 후 가습기살균제가 원인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원인을 모를 땐 분노에 그치지만 지금은 굉장히 힘듭니다. 환경의 날, 일반 시민은 와 닿지 않는 날이죠. 하지만 정부는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국민이잖습니까?"

5일 유엔이 정한 세계 환경의 날. 가습기살균제로 아이를 잃은 백승목(41)씨는 이날 서울시 종로구 환경보건시민센터 사무실에서 열린 '환경의 날 기자회견'에 참석해 하늘로 먼저 보낸 아이의 이야기를 꺼냈다. 기자회견은 환경보건시민센터와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직업환경건강연구실이 환경의 날을 맞아 마련한 자리로 가습기 살균제·석면·시멘트공장 피해자들이 참석했다.

"유야무야 넘어가면 제2, 제3의 피해자 나올 것"

1995년 12월 2일 동아일보에 실린 유공이 개발한 가습기살균제 신문광고. 아기를 위해서 가습기에 가습기살균제를 꼭 넣자는 내용이다.
 1995년 12월 2일 동아일보에 실린 유공이 개발한 가습기살균제 신문광고. 아기를 위해서 가습기에 가습기살균제를 꼭 넣자는 내용이다.
ⓒ 정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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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의 아이는 만 24개월인 2006년 4월 세상을 떠났다. 단순 감기로 병원을 찾았다 '폐 소리가 이상하다'는 진단에 따라 종합병원으로 옮겨졌다. 입원 하루 만에 아이의 폐는 점점 굳어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작은 아이의 코에는 산소호흡기가 꽂혔고 발병 27일 뒤 아이는 세상을 떠났다.

백씨는 "우리 아이의 27일간의 기록을 복사해 둔 것"이라며 아이의 사망진단서와 한 뭉치의 A4 용지를 챙겨 나왔다.

"옥시싹싹 가습기당번 제품을 참 열심히도 넣었다. 자다가도 침대에서 일어나 넣었다. 당시에는 가습기살균제가 붐이었다. 어느 마트에 가도 살 수 있었다. 가습기살균제로 100명이 죽었다. 원인이 가습기살균제라는 것도 분명하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기업이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를 정부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면 책임져야 한다. 우리는 국민이지 않느냐."

이어 백씨는 "가습기 살균제뿐 아니라 석면 문제, 시멘트공장 문제도 전체적으로 개입해서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한다"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정부가 유야무야 넘어가면 제2, 제3의 피해자는 확실히 나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환경의 날인만큼 환경성질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백씨의 아이처럼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입은 피해사례는 모두 401건. 이중 32%인 127명이 사망했으며, 사망자 중 1~3세의 영아는 56명(44%)이나 된다. 현재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폐CT촬영 등 임상검사 및 가습기살균제 사용 확인 및 노출조사가 실시될 예정이지만,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 및 대책은 전무하다. 환경부·보건복지부·산업통상자원부 등 책임져야 할 부처들은 많지만 부처 모두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환경사고 피해자, 가습기살균제까지 합하면 총 2526명

이날 기자회견에는 백씨 이외에도 석면 피해자·시멘트공장 피해자들이 참석해 환경성질환으로 인한 자신들의 처지를 털어놨다.

시멘트공장으로 진폐증 등의 피해를 입고 있는 최재수(75)씨는 "마을 주변에는 시멘트공장이 세 군데나 있다, 먼지가 전부 날아온다"며 "저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도 기침·가래를 토해내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그런데도 이 회사를 지켜주는 정부인지, 국민에게 아량을 베푸는 정부인지 도대체 분간을 못하겠다"고 지적했다. 

김익경(82)·송순열(여·74)씨는 부부 환자로 충남 홍성군의 석면광산 인근에서 거주하며 석면에 노출됐다. 모두 석면폐증 3급 진단을 받았지만 김씨는 지난 2월부터 생활수당 지급이 끊겼으며 송씨도 내년 7월부터 끊길 예정이다. 

김씨는 "석면피해는 갈수록 낫지도 않고 죽을 때까지 가야하는 병이다, 2년만 주고 중단한다는 건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지금도 가래가 떨어지지 않고 밤이면 기침을 하고 잔다, 일본은 석면피해 질환자에 죽을 때까지 수당을 주는데 한국은 왜 못하느냐, 죽을 때까지 급여를 줘야 한다"고 토로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등에 따르면 최근 5년여 사이 환경부의 공식적인 조사결과에서 석면, 시멘트공장에 의한 환경성질환자로 검진된 건강피해자는 2125명으로 이중 26%인 556명이 사망했다. 여기에 화학물질 건강피해인 가습기살균제 피해신고까지 포함하면 환경사고 피해자는 총 2526명, 사망자는 683명에 달한다.

"정부가 선 보상하고 원인 제공자에 책임 물어야"

5일 세계 환경의 날을 맞아 환경보건시민센터와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직업환경건강연구실이 마련한 기자화견에 가습기살균제, 석면, 시멘트공장 피해자들이 참석해 피해사례를 발표하고 있다. 우측에서 세 번째가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3살 아이를 잃은 백승목 씨다.
 5일 세계 환경의 날을 맞아 환경보건시민센터와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직업환경건강연구실이 마련한 기자화견에 가습기살균제, 석면, 시멘트공장 피해자들이 참석해 피해사례를 발표하고 있다. 우측에서 세 번째가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3살 아이를 잃은 백승목 씨다.
ⓒ 정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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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보건시민센터 최예용 소장은 "이들 세 가지 환경오염은 모두 실내 또는 실외 대기오염 형태로 오염돼 폐질환을 일으킨 경우"라며 "우리 인체 구조상 폐는 외부공기와 직접 연결돼, 대기가 오염되면 바로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환경성 폐질환의 경우 치우가 되지 않는 폐섬유화·진폐증이 많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피해자 구제는 굉장히 불공평하며 만들어진 법은 전부 무늬만 법"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문제가 터져도 조사를 하거나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최 소장은 "누가 이런 피해를 받는지 역학조사가 이뤄져야 하며 피해가 확인되면 적절한 보상과 대책을 만드는 법이 필요하다"며 "가습기살균제는 법과 제도가 없다는 이유로 2년 넘게 방치돼 왔다, 정부나 공공기관에 의해 피해가 확인되면 정부가 선 보상하고 그 후 원인자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최 소장은 "원인자가 고의적으로 책임을 회피할 경우 징벌적으로 책임을 묻는 내용이 환경피해보상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이들은 ▲ 산재보상수준과 민사소송결과에 준하는 환경피해 보상제도 마련 ▲ '말뿐인 환경보건정책'에서 '건강의 눈으로 모든 환경문제를 보는' 환경정책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 ▲ 환경기본정책에 '환경오염으로 인해 건강피해를 입을 우려가 큰 위험인구를 줄이기 위한 환경보건정책' 개념 포함 ▲ 지역별로 심각한 환경 불평등 문제 연구조사 등을 제안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육아전문지 베이비뉴스(www.ibaby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가습기살균제, #가습기살균제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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