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늘 전국적으로 비가 내리겠습니다. 예상되는 강우량은 20~50㎜, 많은 곳은 100㎜ 이상의 비가 내릴 전망입니다."

날씨 정보를 전할 때 자주 등장하는 멘트다.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부터 얼마만큼의 비가 내릴 것인지가 예보된다. 우산을 들고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 야외활동을 즐길 수 없는 안타까움이 생기는 등 사람들에게 강우 유무는 매우 중요하며 민감하다. 더 나아가 비가 얼마나 오는지도 큰 관심사다. 얼마 이상의 비가 내리면 스포츠 경기를 취소시키는 경우, 어떤 기업이 비가 몇 ㎜이상 내리면 음식 메뉴를 할인해 준다고 했을 경우 등 의사결정의 기초자료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언제, 얼마나 오는지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비가 한꺼번에 너무 많이 내리면 홍수, 너무 비가 내리지 않으면 가뭄이 발생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6월은 본격적인 우기로 접어드는 시기여서 '비'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높아지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강우량 관측한 '측우기'

금영 측우기(진품). 이는 현재 남아있는 하나 뿐인 측우기로 과거 공주감영(公州監營, 금영)에서 사용됐다. 측우기에 대한 설명이 측우기 겉면에 적혀 있다. <금영측우기 고일척오촌 경칠촌 도광정유제 중십일근> 이는 높이 1척 5촌, 지름 7촌, 무게 11근(=6.2kg)을 의미한다.
 금영 측우기(진품). 이는 현재 남아있는 하나 뿐인 측우기로 과거 공주감영(公州監營, 금영)에서 사용됐다. 측우기에 대한 설명이 측우기 겉면에 적혀 있다. <금영측우기 고일척오촌 경칠촌 도광정유제 중십일근> 이는 높이 1척 5촌, 지름 7촌, 무게 11근(=6.2kg)을 의미한다.
ⓒ 정연화기자

관련사진보기


요즘처럼 하루 동안 내린 비의 양을 알 수 있는 것은 이를 측정하는 기계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우량(降雨量)은 언제부터 측정해 왔을까.

조선 세종 이후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 쓰인 기구가 바로 '측우기'다. 측우기를 발명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은 '장영실'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사실은 장영실이 아닌 세종의 세자인 '문종'이 발명자다.

조선시대 정사를 기록한 자료에 따르면 문종이 왕세자 시절이었던 1441년(세종 23년) 측우기를 발명했다. 이듬해인 1442년(세종 24년) 측우에 관한 제도를 새로 제정하고 깊이 1.5척(약 30cm), 지름 7촌(약 14cm)의 측우기를 만들었다. 서울과 각 도 군현 등 전국 각지에 이를 설치해 강우량 관측을 실시했다.

측우기에 모인 빗물의 양은 주척(周尺)이라는 자를 사용해 측정했다. 때문에 각 지역의 강우량을 과학적으로 비교할 수 있었다. 측우기를 이용한 각 지역의 강우량 관측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한동안 중단됐다가 1770년(영조 46년)에 재건돼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세종 때의 측우기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1639년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처음으로 측우기로 강우량을 알 수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1658년부터, 영국에서는 1677년부터 관측했다. 한국에서는 1442년 5월부터 측우기로 우량을 측정했으니 이는 서양보다도 약 200년이나 빠른 것이다.

현존하는 진품 측우기는 '금영 측우기'가 유일

측우기가 발명되기 전 강우량은 호미나 쟁기로 땅에 스며든 빗물의 깊이를 재어 측정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1441년 당시 조선에는 극심한 폭우, 혹한, 가뭄이 반복됐다. 그 당시 알맞은 시기에 적당한 비가 내리는지가 풍작과 흉작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 하지만 비가 온 후 젖은 흙의 깊이를 재는 것은 토양의 종류, 성질, 건조도에 따라 달라져 각 지역의 강우량을 비교하기엔 불가능했다. 세종의 세자인 문종이 측우기를 발명하면서 과학적인 우량 관측을 통한 농업기상학 발전에 큰 도움을 줬다.

현재 측우기 진품은 '금영 측우기'가 유일하다. 1837년(헌종 3년, 보물 제561호)에 제작된 이 측우기는 공주 감영(금영, 지금의 충남 공주)에서 사용됐던 것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와다 유우지에 의해 일본 기상청으로 반출됐다. 이후 1971년 한국문화재 반환운동의 일환으로 중앙관상대(=현재 기상청)가 돌려받아 현재 기상청이 소장하고 있다. 측우기에 대한 설명이 측우기 겉면에 적혀 있다. <금영측우기 고일척오촌 경칠촌 도광정유제 중십일근> 이는 높이 1척 5촌, 지름 7촌, 무게 11근(=6.2kg)을 의미한다.

측우기만 달랑(?)... '측우대'까지가 한 묶음

측우기만 세워 놓고 통에 들어간 빗물을 측정하면 되는 걸까. 아니다. 측우기를 올려놓기 위한 받침대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측우대(測雨臺)'. '화분-화분받침대'처럼 '측우기-측우대'도 한 세트다. 측우대는 주로 화강석 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윗면은 지름 약 16cm, 깊이 4cm 또는 2.5cm의 원형으로 오목하게 파서 측우기를 세울 수 있도록 했다. 조선시대 측우대는 1910년대 10대가 확인됐다. 하지만 현재는 ▶관상감 측우대 ▶대구 선화당 측우대 ▶창덕궁 측우대 ▶통영 측우대 ▶연경당 측우대 등 총 5개가 남아 있다.

① 관상감 측우대 [1441년(세종 23년) / 보물 제843호]

관상감 측우대
 관상감 측우대
ⓒ 국립기상연구소

관련사진보기


이 측우대는 천문·날씨·지리·달력·시간에 관한 사무를 맡았던 관상감(觀象藍)에 있던 것이다. 그 당시 측우기는 조선 세종 때 세계 최초로 발명돼 이듬해인 1442년 전국 8도에 보급됐다. 하지만 당시에 제작된 측우기는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고 측우기를 올렸던 측우대만 남아 있다. 측우대 윗면에는 지름 16.5cm, 깊이 4.7cm의 구멍이 파여 있어 이곳에 측우기를 올려놨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측우대는 고종이 경복궁을 재건할 무렵 지금의 매동초등학교 자리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기상청에 전시돼 있다.

한편 옛 문헌인 세종실록에 따르면 서운관(=관상감)에 대(臺)를 만들어 그 위에 측우기를 놓고 비가 그칠 때마다 본관 관원이 강우 상황을 직접 관찰해 주척으로 수심을 측정했다고 전한다. 관상감 측우대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측우대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측우대다.

② 대구 선화당 측우대 [1770년(영조 46년) / 보물 제842호]

대구 선화당 측우대
 대구 선화당 측우대
ⓒ 국립기상연구소

관련사진보기


1441년부터 시작했던 강우량 측정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대부분 측우기가 파손되거나 유실돼 약 200년 가까이 중단됐다. 하지만 1770년 5월부터 전국적으로 측우기를 제작, 설치하고 다시 보급하게 되면서 이때 대구 선화당 측우대가 만들어졌다. 이 측우대는 본래 대구감영(大邱監營) 선화당(宣化堂)에서 사용했지만 1910년 무렵 인천측후소로, 이후 1950년 초 다시 국립중앙관상대(=현 기상청)로 옮겨졌다.

③ 창덕궁 측우대 [1782년(정조 6년) / 보물 제844호]

창덕궁 측우대
 창덕궁 측우대
ⓒ 전상운 박사 제공

관련사진보기


이 측우대는 다른 측우대와 달리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대리석은 화강암에 비해 입자가 미세해 세밀한 조각이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4면에 걸쳐 명문이 있는 것이 특징. 명문에는 측우기의 제작 의미, 홍수와 가뭄을 다스리고자 했던 정조의 소망과 뜻이 담겨져 있다. 1910년까지 창덕궁 이문원 마당에 있다가 1920년 이후 이왕가박물관 앞으로 옮겨졌는데 한국전쟁 당시 측우기는 사라지고 측우대만 남았다. ▲창경궁 명정전 뒤 ▲세종대왕기념관 ▲영릉전시관 ▲덕수궁 궁중유물 전시관을 거쳐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④ 통영 측우대 [1811년(순조 11년) / 보물 제1652호]

통영 측우대
 통영 측우대
ⓒ 국립기상연구소

관련사진보기


사암 재질의 이 측우대는 경남 통영에서 발견됐으며 제작년도와 측우대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제작년도를 나타내는 '신미이월일(辛未二月日)'은 순조 11년(1811년)을 의미한다. 1800년대부터 지방의 측우기 관측망 확대로 인해 통제영(지금의 통영)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1800년대 후반에는 각사등록을 통해 경남 고성의 우량관측이 보고된 기록도 알 수 있다. 각사등록은 유수부(留守府), 전국 8도의 감영, 통제영에서 측우기로 측정한 우량 조사 기록이 담겨있어 조선시대의 기상 조건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둥근 모양의 대석 받침이 남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국립중앙과학관에 전시돼 있다.

⑤ 연경당 측우대 [1828년(순조 28년)경 추정]

연경당 측우대
 연경당 측우대
ⓒ 국립기상연구소

관련사진보기


창덕궁 연경당 앞뜰에 있는 팔각 기둥의 측우대다.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측우대의 윗면에는 지름 16cm, 깊이 2.5cm의 구멍이 있어 측우기를 올려놓을 수 있게 했다. 제작 시기에 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나 명문이 존재하지 않지만 연경당이 건축된 1828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측우대 윗 부분이 파손돼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상태다.

한편 우리나라는 세종대왕이 1442년 세계 최초의 측우기를 국민에게 공포한 날인 5월 19일을 '발명의 날'로 제정했다. 당시 금속활자·거북선 등도 선조의 자랑스러운 발명 유산으로 검토대상이 됐지만 측우기가 세종의 세자인 '문종'이 발명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져 '발명의 날'로 낙점됐다.

덧붙이는 글 | 정연화(lotusflower@onkweather.com) 기자는 온케이웨더 기자입니다. 기상기사 자격증과 기상예보사 면허증을 취득하는 등 기상학을 전공한 기상전문기자입니다. 이 뉴스는 날씨 전문 뉴스매체 <온케이웨더(www.onkweather.com)>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측우기, #측우대, #관상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국내최초 날씨전문 매체 <온케이웨더>: 기상뉴스,기후변화,녹색성장,환경·에너지,재난·재해,날씨경영 관련 뉴스·정보를 제공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