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패가 있는 경기에서는 이겨야 한다. 물론 정정당당하게. 지고 나서 상대방에게 관대했다거나 시쳇말로 봐 줬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아무리 작은 승부라도 패하고 기분 좋은 게임은 없다. 있다면 재미가 없는 게임이다.
내가 사는 지역에는 12개 팀이 모임을 만들어 정규리그전을 치른 뒤 연말에 우승 팀을 가리는, 동네 축구보다는 한 수 위인 클럽 대항전이 있다. 어제(9일)는 전반기 리그전 마지막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우리 팀은 리그전에서 여러 번 우승하면서 한때 18년 전통의 명문(?)팀이었지만 추락은 끝이 없어, 작년엔 해체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다른 팀이 우리 팀과 경기를 치르는 것을 껄끄럽게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종이호랑이가 되어 1승을 챙길 수 있는 기회의 팀이 되었다.
매주 일요일 아침에 나오는 인원이 11명이 안 되어 상대팀 선수를 빌려 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20여명이 운동장에 나온다. 축구를 잘하는 사람보다 운동장에 먼저 나오는 순서대로 공을 찬다. 다른 팀과 치르는 리그전도 마찬가지다. 운동장에 나온 회원이 다 엔트리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패할 수밖에 없다. 12개 팀 중에 꼴지다. 1등이 꼴등이 된 것이다.
잘 사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궁핍해지면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을 즈음 정말 반가운 전화 한 통이 왔다. 예전에 우승을 이끌었던, 축구를 잘하는 회원이 전반기 마지막 세 게임 중에 두 게임을 뛰겠다는 것이다. 토요일에 문자를 두 번했다. 그런데 답장이 없어 직접 전화를 했다.
"회장님, 축구화가 없어요. 축구화 가게가 문 열면 축구화 사가지고 나갈게요.""축구화가 없다니 무슨 소리야?"축구를 좀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축구화 두 켤레는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운동화가 낡으면 미리 준비하는데 축구화가 없다는 것이다.
"회장님, 사실은 집사람이 축구화를 다 버렸어요."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황당한 대답이다. 세상에 아내가 남편의 축구화를 모두 버렸다니,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다. 지난 겨울에 다리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병문안을 갔었는데, 또 몇 달 전에 쇠골을 다쳐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다는 것이다. 맞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그런 그가 아내 몰래 축구화를 사가지고 운동장에 나온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1승이라도 하고 싶은 욕심에 운동장에 오는 것을 말리진 못했다.
"회장님, 신발가게가 이제야 문을 열어 신발 사느라 늦었습니다."두 게임 전반전이 끝날 무렵 새 축구화를 들고 운동장에 나타났다. 눈물이 날 뻔 했다. 아직 몸이 온전하진 못했지만 후반 25분 동안 실력을 맘껏 보여주었다.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지만 멋진 경기였다. 게임이 끝나고 모두들 운동장에 쳐 놓은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데 그 회원은 회원들에게 간단히 인사하고는 주차장 쪽으로 갔다.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금방 다녀오겠다는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온 회원의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아내와 부모님이 주차장에 계신다며 잘 설득하고 와서, 마지막 한 경기를 뛰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회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통화를 하고 싶었지만 뭐라 할 말이 없어 전화를 걸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7시49분에 문자가 왔다.
'죄송합니다. 도움도 못되고...''정말 고마웠다. 집사람이 임신 중이라며? 몸 풀 때까지 신경 덜 쓰게 해드려. 다음에 보세.''죄송합니다.'
직업이 프로축구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축구에 목숨 걸 일은 없다. 그러나 좋아하는 운동을 안 할 수도 없지 않는가. 물론 다치지 않고 축구를 할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말이다.
우리 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선수지만 당분간은 부르고 싶어도 부르지 않아야겠다. 나와 우리 팀에 큰 감동을 준 회원이지만 최소한 그 회원의 아내가 몸 풀 때까지는.
그런데 축구화 짊어지고 또 운동장에 나타나면 어떻게 할까.
덧붙이는 글 | 월간 첨단정보라인 7월호에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