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목회자 모임을 위해 경기도 광주 곤지암 교회로 달려간 적이 있다. 그때 어느 신학교 교수의 역사 강론을 마친 뒤 차를 마셨다. 물론 그때의 차란 커피나 음료에 관한 게 아니었다. 적어도 다도(茶道)에 버금가는 차였다.
우리 일행에게 차를 나눠 준 분은 그 교회 집사였다. 물론 그분이 차에 대해 특별하게 알려 주거나 깨우쳐 준 건 없었다. 그저 한 시간 가량 순서에 따라 차를 마시도록 이끌어 주었을 뿐이다. 그분은 처음엔 녹차, 그 다음엔 보이차, 그 뒤엔 홍차 그리고 맨 마지막엔 중국 계림성에서만 난다는 계수차를 나눠줬다.
왜 그런 순으로 차를 마시도록 했을까? 무척이나 궁금해하던 그 분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곁들였다.
"차는 처음엔 옅은 빛깔에서 진한 빛깔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차는 처음엔 약한 맛에서 점차 강한 맛으로 나아갑니다. 만약 처음부터 진하거나 강한 맛을 본다면 나중엔 약한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제가 따라 주는 차 중에서 이 계수차가 가장 여운에 남을 것입니다."그런데 그 집사님이 한 말은 진짜였다. 녹차보다는 보이차가 빛깔이 더 진했고, 보이차 보다는 홍차가, 홍차보다는 계수차가 더욱 진했다. 맛도 그랬다. 순서대로 차들을 마셨지만 가장 여운에 남는 차는 역시 계수차였다. 그 여운은 다음날 새벽 기도회가 끝나고 아침 운동을 하던 그때까지도 입 안에서 맴돈 것 같았다.
최석환의 <천년의 차향>은 차의 유래와 명맥을 이어나가는 비결, 그리고 차의 종류와 역사에 관한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차의 향기를 좇아 동아시아의 품다인, 차인, 지식인을 두루 만나 그들의 생각을 복원한 결실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저자가 동아시아를 약 13년간 누비며 미학적 관점에서 차의 현장을 따라 한국차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서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자연의 현상을 기록하였으며 차가 문화의 축을 이루고 차가 인류에게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과정을 그려냈다."(서문)이 책을 보니 적어도 고려시대까지는 우리나라에도 차 문화가 활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때는 차를 마시되 요즘처럼 나뭇잎을 우려서 마신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나뭇잎들을 갈아서 '녹말'처럼 마시는 차 문화였다.
그런데 그게 언제부터 사라졌을까? 이 책에서는 이씨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정권 초기라고 이야기한다. 그때부터 '말차' 문화가 사라지고 '전차(煎茶)' 문화가 성행했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일으킨 남원 운봉에서 고려의 유차까지 혁명을 위해 과감하게 버렸고, 한양으로 천도한 뒤에는 고려 때 유행한 단차(團茶)까지도 버렸다고 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와 관련된 차만 밝혀주는 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 유행하는 차 문화도 소개한다. 특별히 중국 대륙의 해발 3000m에 차가 자생한다는 사실은 모든 이를 놀라게 하는 사실이라고 한다. 10년 전 저우치민(周啓民)씨는 그곳의 옥산 정상에 차 씨를 뿌려 10km에 이르는 차 밭을 일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진공 속에서 차맛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다시 그 차를 산 아래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우려내 맛보자 정말 차맛이 확연이 구분되었다. 맑고 경쾌하고 시원함, 관차의 그 맛은 어떤 차도 뒤쫓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경쾌하여 맑고 시원한 향과 맛은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움이었다. 이 맛에 반해 차의 고수들이 고산차를 동경해 온 것 같다. 장원티엔씨 정상권 사장은 고산차의 차맛을 7월 이후 한국에서도 불 수 있을 것이라고 감격스러워 했다."(55쪽)이 책은 또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창의 명인도 소개한다. 한국 차의 명인은 궁중다례 의식의 보유자인 명원문화재단의 김의정 이사장을, 중국의 대표적 차인은 '커우단' 노사를, 그리고 일본 다도의 명인은 '이에모토'로 꼽고 있다.
그런데 김의정 이사장의 말에 의하면 본래 우리나라는 '다도'(茶道)란 말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다례'라는 말을 즐겨 썼다고 한다. 그것이 일본의 다도와 비슷한 점이 있지만 예식과 향식에 있어서 일본의 형식보다는 내면적인 면을 더 요구했다는 것이다. 차를 마실 때 오른쪽 무릎을 세우는 것도 실은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갈 때 변형한 '다도' 중 한 예라고 한다.
보통 차밭하면 보성의 녹차밭이 생각날 것이다. 보성에서 가까운 목포에서 살고 있으니 조만간 그 밭을 구경하러 가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차 나무가 남쪽에 잘 자라는 것과 달리 이 책에서는 강원도 정선의 노추산에서 자라고 있는 차나무도 소개한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사건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또 하나 보급해야 할 차가 있다고 한다. 전북 정읍의 '천원차'(川原茶)가 그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정읍의 천원리에서 생산된 그 차가 일본으로 그 당시 수출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차 생산지를 말할 때 광주 무등산 줄기에서 시작해 보성, 강진, 장흥 등지를 대표적으로 꼽지만 정읍에도 야생차밭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 책에는 '덖음차', '증제차', '돈차', '금릉월산차' 등 다양한 차와 함께, '헌다의식' 등 다양한 차의 세계를 엿보게 해 준다. 그 모든 이야기들은 최석환씨가 13년 동안 온 누리를 헤집고 취재한 결과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고진감래의 열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