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며칠 전 초등학교 동창친목회 월례 모임에 참석했다. 60대 중반과 후반 세월을 살고 있는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는 언제나 정답고 재미있다. 하지만 대화 범위는 한정되어 있고, 정보 영역은 스산하다. 그 속에서 때로는 이질감과 격의 같은 것도 감내하곤 한다.

지난해 말 대선 전후의 모임 자리에서는 그것이 더욱 심했다. 나는 외롭고 암울했다. 20명 안팎의 모임 자리에도 상존하는 '대중'의 속성을 체감하며 소수자의 비애를 감내해야 했다. 그들 다수는 박근혜에게 표를 주겠다고 했다. 박근혜에게 표를 주어야 할 이유를 열렬히 설파하는 친구도 있었다. 박정희를 끌어들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박근혜를 지지하면서도 '희망'의 실체는 없었던 친구들

쌍용자동차  희생자 분향소 철거 사태가 빚어진 10일(6.10민주항쟁기념일) 오후에 거행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대한문미사'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제, 수도자, 신자들이 참례했다.
▲ 6월 10일 오후의 '대한문미사' 전경. 쌍용자동차 희생자 분향소 철거 사태가 빚어진 10일(6.10민주항쟁기념일) 오후에 거행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대한문미사'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제, 수도자, 신자들이 참례했다.
ⓒ 전재우

관련사진보기


박근혜 지지론은 명확했지만, 대통령 박근혜에게 거는 희망의 실체를 접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싶었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뜻은 분명한데도, 박근혜에게 희망을 거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모순이고 난센스이며, 너무도 모호한 일이었다. 더러는 박근혜에게 거는 희망을 말하기도 했지만 "이명박보다는 낫겠지"하는 식의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기대일 뿐이었다.

나는 다수의 친구들이 박근혜를 지지하는 뜻을 명확히 표시하면서도 대통령 박근혜에게 구체적으로 희망을 거는 사항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 더욱 절망감을 안아야 했다. 친구들은 자신들의 이율배반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중의 그런 속성을 발판 삼아 당선한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지도 100일이 훌쩍 지났다. 그 긴 겨울과 봄 같지도 않던 봄을 보내고 여름 시기에 다시 모인 친구들에게 정치에 대한 관심은 거의 삭제되어 있었다. 아무도 정치와 관련되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중의 태평성대는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는 형국이었다.

다음달 7월 모임을 야외에서 갖기로 결정했다. 유람선을 타고 섬으로 가서 하루를 즐겁게 놀자는 안이 채택되었다. 날짜를 조정하다 보니 '월요일'이었다. 모두 찬성을 하는 가운데 총무 일을 보는 친구가 내게 다가와서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월요일에는 내가 서울 '대한문 미사'에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친구였다. 나는 그 친구에게 고마운 뜻을 표하고, 나 한 사람 때문에 혼선이 생기면 서로 곤란하니 아무 말도 하지 말기를 부탁했다.

지난 수년 동안 월요일에 동창친목회 월례 모임 날짜가 겹치는 경우가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유를 분명하게 얘기했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해주는 친구는 단 한 명이었다. 단 한 명이라도 그것을 기억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나는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모임 후 20리 거리인 농촌에서 살고 있는 그 친구를 내 차로 태워다주면서(건강 문제로 술을 마시지 못하는 덕에 먼 거리 친구들을 내 차로 태워다주곤 한다), 나는 다시 한 번 그 친구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 친구는 걱정을 하며 내게 미안해했다. 나는 요즘 건강 문제 때문에 먼 길 나들이를 쉬고 있는데, 대한문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서 마냥 모른 척할 수가 없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러며 지난 10일(6.10 항쟁 기념일)에 벌어진 대한문 상황을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그 친구는 분노했다. 박근혜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박근혜에 대한 실망을 표시한다는 말도 했다. 나는 그들이 대통령 박근혜에 걸었던 희망이 과연 있었는지, 그 희망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물어볼 시간도 없었다. 뭔가 희망이 있었기에 오늘 실망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희망이 과연 온당한 것이었을까? 이상한 의문으로 가슴이 더욱 무겁고 허황하기만 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성령의 은사가 내리기를

공권력에 의해 임시분향소마저 강제 철거된 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죽기를 각오하며 분향소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공권력에 의해 임시분향소마저 강제 철거된 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죽기를 각오하며 분향소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전재우

관련사진보기


솔직히 말해 나는 대통령 박근혜에게 거는 희망, 기대가 있었다. 박근혜를 명확하게 지지했던 다수의 친구들이 대통령 박근혜에게 거는 확실한 희망은 없는 것과 달리, 박근혜를 명확하게 거부했던 나는 그녀에게 거는 기대가 있었다.

나는 지면이나 인터넷 매체에 발표한 글로 내 희망을 여러 번 표현했다. 지난 3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첫번째 대국민담화, 속칭 '부르르 담화'를 발표했을 때는 충고의 글을 쓰기도 했다.

나는 그녀가 아버지 박정희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아버지가 지워주었거나 스스로 지고 있는 '짐'들을 과감하게 극복하기를 충심으로 기원했다. 대통령 취임식 날 카키색 군복 형태의 옷을 입고 나와서 북한의 김정은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연출할 때도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3월 4일의 대국민담화를 접하고 충고의 글을 발표한 것도 내 희망의 표현이었다.

나는 그녀의 본질과 한계를 명확하게 헤아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유머가 없는 언어, 자신의 과거 언행을 깡그리 잊거나 무시하는 버릇, 가끔씩 노출되는 인지부조화 등을 접할 때마다 철학의 빈곤을 느끼곤 했다. 치열한 자기 연단의 과정을 거치며 눈물과 땀으로 구축한 세계는 없는 셈이었다. 고난과 악조건 속에서 형설의 공으로 이룩한 정치력과는 다른 차원의 예정된 권력을 손쉽게 얻은 것에 불과했다.

민주주의의 표본인 직접 선거를 통해 51%의 지지로 권력을 얻었지만, 보수라는 이름으로 채색되는 기득권 세력과 영남패권주의, 또 아버지의 유산이 그녀 권력의 토대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에게서 저 친일세력으로부터 연유하는 보수 기득권 세력과 영남패권주의와 박정희의 유산을 빼면 남는 게 과연 무엇일까? 흥미로운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자신의 '약점'에 대한 통찰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역설하곤 했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구현하는 멋진 정치력으로 자신의 기본적인 약점들을 잘 극복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것의 제일 조건은 과거로의 퇴행을 스스로 차단하는 일이었다.

유신독재시대의 풍경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혹여 그녀의 관성 안에서 유신시대에 대한 향수와 유혹이 작용한다더라도, 지혜롭게 자신을 극복하는 것만이 이 나라를 살리고 자신도 성공하고 아버지도 명예롭게 하는 것임을 확언하곤 했다.

천주교 신자인 나는 '신앙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지하고 늘 기도하며 사는 사람이다. 나 자신을 위한 기도도 많이 하지만, 내 이웃들과 타인들과 사회 공동선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한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정의와 평화를 위한 뜨거운 기도 속에서 내가 천주교 신자임을 새롭게 자각하고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그러므로 나는 당연히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서도 뜨겁게 기도한다. 그녀가 율리아나라는 세례명을 갖고 있는, 과거에는 천주교 신자였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기에 신앙생활을 회복하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도 하지만, 난폭하고 쪼잔했던 전임(현재 생존하고 있는) 남성 대통령들과는 구별되는 여성 대통령의 통 크고 자상하고 슬기로운 모습을 힘차게 구현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전반전을 잘 뛰었으니 후반전도 계속 잘 뛰어야 한다

쌍용차 분향소가 철거되고 사제를 비롯한 노동자, 시민 16명이 연행된 지난 10일 저녁 봉헌한 대한문 앞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 곁을 경찰이 지키고 있다.
▲ 대한문 앞의 경찰들 쌍용차 분향소가 철거되고 사제를 비롯한 노동자, 시민 16명이 연행된 지난 10일 저녁 봉헌한 대한문 앞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 곁을 경찰이 지키고 있다.
ⓒ 전재우

관련사진보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님들과 수도자들과 신자들이 매일같이 대한문 미사를 지내며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가 궁극적으로는 박근혜 대통령을 위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국가폭력과 천민자본주의의 야만적 횡포로 삶이 망가져 버렸거나 벼랑으로 내몰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미사지만, 그 미사의 기도 안에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성령의 은사가 작용하기를 기원하는 지향도 있다.

아직은 그 눈물겨운 기도들이 통하지 않고 있지만, 대한문 미사는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끼리 치르는 사람들만의 행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고, 하느님과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이 화합하고 소통하고 일치를 이루는 일이기에 대한문 미사는 신비로운 생명력으로 지속될 것이다.

'6․10 민주항쟁 기념일'이었던 지난 10일 대한문 앞에서 벌어졌던 사태는 박근혜 대통령을 위한 기도가 더 많이 필요함을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절감시켰다. 국가 공권력을 동원하여 쌍용자동차 희생자 분향소를 철거하면서 해고 노동자들과 천주교 사제와 시민들을 연행한 것은 어쩌면 공안정국의 신호탄일지도 모른다.

경찰 병력이 대한문 앞을 점령해 버린 지난 10일 이후의 풍경은 일단 40년 전의 유신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이 왜 필요한지는 알 길이 없다. 또한 그것으로 '상황 끝'이 될 리는 만무하지만, 저들이 진정 '상황 끝'을 염두에 두고 그런 야만적인 일을 저질렀다면 그 어둡고 무모한 분별력이 안쓰러울 뿐이다.

어쨌거나 지난 10일의 공권력 폭거는 일단 유신 시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서 이명박 정권의 명확한 지속이자 유산임을 절감케 한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며 '국격'을 추락시키는 일에 있어서 이명박 정권이 전반을 담당했다면 박근혜 정권은 오늘 후반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민주세력은 이명박 정권과 전반전을 싸웠다면 이제 박근혜 정권과 후반전을 싸우는 셈이다. 그렇다. 후반적인 뿐이다. 전반전을 싸우면서 잃은 것이 많지만 얻은 것도 많다. 51%보다는 조금 적지만 49%라는 놀라운 힘을 얻었다. 그 힘은 저력이다. 소수가 중심일 수도 있는 법이다. 전반전을 잘 뛴 힘으로, 민주주의의 원동력으로 후반전을 이 악물고 뛰면 된다.

후반전일 뿐이다. 후반전을 끝까지 잘 뛰어야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 정의와 평화를 갈구하는 민주세력은 새로운 각오로 후반전을 뛰면서 박근혜 대통령을 위한 기도, 율리아나 자매에게 성령의 은사가 잘 작용하시기를 더욱 뜨겁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쌍용자동차 분향소 철거, #대한문미사, #박근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