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대규모 석유 수출국가인 베네수엘라의 시골(캄페시노) 지역엔 기생충에 감염되지 않은 아동은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고, 임신을 해도 의사에게 진료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여성이 허다했다. 아동들의 영양실조는 말할 것도 없고, 설사병도 널리 퍼졌지만 그들을 돌보는 의사는 없었다. 유아사망률, 아동사망률은 거의 후진국 수준을 면치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1970년대부터 2000년까지 거의 30년간 베네수엘라의 공공보건의료는 버려지다시피 하였고, 국민 절반이 빈곤선 아래로 떨어지는 사회 현실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에서 1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 특권층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선진 자본주의국가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수준의 안락한 생활을 누리면서 미국의 소비문화에 깊이 물들어 있었고, 미국 마이애미에 가서 쇼핑을 즐기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반면에 노동계급이나 저소득층의 삶은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삶만큼이나 초라하고 고통스러웠다. 2003년 당시 온두라스나 아이티,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나 앙골라 등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GDP는 2000달러에도 못 미쳤고, 이에 비해 베네수엘라의 1인당 GDP는 8000달러나 되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은 앞의 나라들과 차이가 별로 없을 정도로 양극화가 심했다.
쿠바 의사들과 '바리오 아덴트로'
르포 작가인 스티브 브루워가 2007년부터 2008년까지 베네수엘라 산간 마을인 몬테 카르멜로에 머물면서 쓴 책 <세상을 뒤집는 의사들>은, 1998년 우고 차베스가 베네수엘라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열악한 공공보건의료를 되살리고자 전개했던 의료 혁명과 그 의료 혁명이 마을 주민들 속으로 자리 잡았던 과정 그리고 그 영향과 성과가 파노라마처럼 담겨있는 책이다.
그 의료혁명의 이름은 '바리오 아덴트로'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마을 안으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바리오'는 가난한 사람이나 노동계급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을 의미한다. 2002년 베네수엘라 정부는 그때까지 제대로 된 보건 의료 서비스를 받아본 적이 없는 베네수엘라 시골 지역의 모든 마을에 무상 보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무너진 공공보건의료 만큼이나 심각한 것은 베네수엘라 의사들의 특권의식이었다. 그들은 '바리오'에 가서 일하기를 꺼렸고, 대부분 수도 카라카스의 큰 병원에서 일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바리오 주민들이 꾀죄죄한 차림새에 역겨운 냄새까지 풍기고 다닌다고 비하했으며, 심지어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기피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추진한 것이 쿠바와 맺은 포괄적 협력 협정에 따라 쿠바 자원봉사자와 보건 의료 전문가들을 베네수엘라에 '대규모'로 입국해 활동하게 한 것이다. 2003년 4월, 쿠바 의사 54명이 처음으로 바리오 아덴트로 진료소에 배치된 이후, 5월에는 100명이 추가 배치되었고, 10월에는 2천 명이 베네수엘라 전역의 바리오 아덴트로에 배치되었다.
베네수엘라 의사들과 달리 쿠바 의사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봤다. 그들은 처참한 의료 환경과 낙후된 지역을 접하며, 비록 남의 나라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 활동이지만, 자신들에게 주어진 소임을 되새기면서 깊은 사명감 속에서 일하였다.
쿠바 의사 중에 닐다 코야소라는 의사는 7월에 들어와 외딴 작은 마을에서 근무했는데, 독뱀에 물린 소녀를 담요에 감싸 어깨에 둘러매고 무려 세 시간을 걸어 인근 병원으로 데려간 끝에 소녀의 목숨을 구함으로써 마을에서 영웅 대접을 받기도 할 만큼 헌신적이었다.
이런 쿠바 의사들의 헌신으로, 바리오 아덴트로는 급격히 확대되어, 2004년 가을 무렵에는 쿠바 의사 1만 3천 명이 베네수엘라 24개 주 전역에 퍼져 진료하게 되었다. 아울러 수천 명의 치과의사와 간호사, 의료기술자들이 배치되었고, 안경점도 459곳 개설되어 안경사들이 무상으로 안경을 맞춰주었다. 주민 센터, 학교, 체육관에 상주하면서 협력 활동을 벌인 생활체육 전문가도 5천여 명에 달했다.
게다가 쿠바 의사들은 바리오 아덴트로 진료소에 마련된 숙소에 머물거나 인근 주민의 집에 머물렀기 때문에, 응급 환자가 발생하면 어느 때라도 24시간 안에 환자를 돌볼 수 있게 되어, 베네수엘라의 가난한 마을 사람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건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바리오 아텐트로의 성과는 놀랄 만한 것이었다. 2004년부터 2010년 사이에 치료받은 환자는 매년 6천만 명에 달했고, 진료 건수는 4억8200만 건이며, 신생아 1000명당 19명이던 유아사망률은 13.9명으로, 5세 미만 아동사망률 역시 26.5명에서 16.7명으로, 출생 직후 사망률은 9.0명에서 4.2명으로 절반 이하로 줄었으며, 국민 수명은 1.5배 늘어났다.
의사 양성 과정의 혁명, '지역 통합 의학교'그렇다고 언제까지 쿠바 의사들에게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건강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지역 통합 의학교'이다. 이는 세계 거의 모든 의과대학에서 수행하는 교육과정과 전혀 다른 의사 양성 모델이다.
이미 쿠바에서 파견된 1만3000명의 의사들이 진료하는 지역의 주민들 중에서 의사 지망생을 선발하여 대학교육을 시행하는 제도인데, 따로 대학교를 세워 그들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 대학교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학생들이 가는 곳은 대학 교정과 강의실이 아니라 쿠바 의사들이 진료하는 진료소이며, 진료소에서 오전 동안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과정을 학습하고, 오후엔 이론 학습을 하며 오전 실습 내용을 복습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다. 오전 내내 함께 진료소를 지켰던 의사는 오후에는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보통 4학년이 되면 실습할 수 있던 기존 교육과정과 달리 지역 통합 의학교는 1학년 때부터 실습에 들어가서 이론 수업과 병행하여 6년간 공부를 마치면, 지역 통합 의학교와 연계된 진료소에서 2년간 근무하면서 환자를 돌보고 나면, 바리오 아덴트로 진료소에서 근무할 수 있는 가족 주치의가 되어, 베네수엘라 어디에서나 근무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
연대와 평등의 인술을 펴는 의사들베네수엘라 의료혁명인 '바리오 아덴트로'가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은 쿠바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바리오 아덴트로는 바로 쿠바의 경험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쿠바는 이미 오래전부터 국가가 길러낸 의사들을 통해 국제 연대를 구축하고 보건 의료 혁명을 달성해왔다. 그리고 그 정신의 젖줄은 체 게바라에게서 나왔다.
1960년 8월 19일, 체 게바라는 군인들 앞에서 공공 보건 의료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연설했으며, 오직 '대중에 대한 사명감'을 바탕으로 할 때 의료 혁명은 가능하다고 전제한 뒤, 의사들에게 '연대와 평등'을 실천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의료 활동에 임해줄 것을 당부했다.
쿠바는 이후, 열정적으로 공공보건의료 혁명을 달성하고 국제 연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여 1961년에서 2008년 사이 쿠바는 103개 국가에 의료 전문가 18만 5천 명을 파견했다. 그리고 1990년 말, 쿠바는 아바나에 '라틴아메리카의과대학'을 설립하고 매년 외국인 학생 1500여 명에게 무상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 봉쇄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다지 내세울 것도 없는 사회주의 국가 쿠바에서 자국 국민 뿐 아니라 외구인 학생까지 무상교육을 제공하고, 의사가 된 이후에 특권의식으로 돈벌이에 치중하는 자본주의 의사와는 달리, 연대와 평등의 인술을 실천하고 있음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쿠바 의사들의 헌신과 열정은 재난 지역에서 활동하며 거둔 성과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이티) 지진이 일어나자마자 미국 정부가 아이티에 보낸 의료 지원 규모와 견주어보면 쿠바 의료 인력이 아이티에서 얼마나 특별하고도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는지 이해하기 훨씬 쉬울 것이다. 미국 언론이 극찬한 대로 미 해군은 의료 인력 550명을 태운 병원선을 파견해 환자 871명을 진료하고 843차례의 수술을 진행했다. 그러나 7주 뒤 병원선은 다른 해외 의료진과 마찬가지로 아이티를 떠났다. 같은 기간 쿠바 의료 인력은 미국의 활동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활발한 구호 활동을 벌였다. 환자 22만7443명을 진료하고, 수술 6499건을 진행한 것이다. 게다가 쿠바 의료진은 다른 해외 의료진이 모두 떠난 뒤에도 아이티에 남아 지속적인 구호 활동을 벌였다.(본문 51쪽)새로운 사회 창조의 노력들스티브 브루워의 <세상을 뒤집는 의사들>에는 우리가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라틴아메리카의 의료혁명을 매우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더 나아가 미국의 공작과 독재 정권 속에서 신음하던 라틴아메리카가 어떻게 연대하여 미국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아나가고 있는지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미국 언론과 세계 주류 언론들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던 '새로운 사회 창조'의 노력들을 희망처럼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신자유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제주도에 민영 병원 설립이 허용되고, 103년 전통의 진주의료원이 폐업하는 등, 공공의료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 처해있는 점을 생각할 때, 쿠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의 공공의료정책은 우리 사회에 무척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하겠다.
오늘날 부유한 나라의 의사 협회는 세계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의사의 기술을 통제하고, 자신들만의 기준으로 전문 의술의 영역을 제한해 아무나 의사가 될 수 없도록 규제하지만, 쿠바 의사들은 의사의 수를 제한하는데 관심이 없다. 쿠바 의사들은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있다면, 비용에 관계없이 치료해야 한다는 윤리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쟁이 심해지면 소득이 낮아질 것을 겁내지 않기 때문이다. 혁명을 일으키는 의사는 오히려 의사의 수를 늘려 아직까지 보건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보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한다.(본문 322쪽)그러므로 인구를 다 합해봐야 3900만 명에 불과한 쿠바와 베네수엘라에는 3억 명이 살고 있는 미국보다 더 많은 8만3000명의 학생이 의학을 공부하고 있다. 게다가 쿠바와 베네수엘라 의학도들은 무상 교육을 받거나 생활비를 지원받으며 공부를 하기 때문에 나중에 어떤 분야의 의사가 될 것인지와 관계없이 졸업 후 3년 동안 가족 주치의로 일하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해있다. 반면, 미국은 6만8000명에서 7만 명 정도의 학생들이 의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이 중 2퍼센트만이 가정 의학에 종사하는 형편이다.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라틴아메리카의 의료 혁명이! 이는 곧 사회 혁명, 정치 혁명과 둘이 아닌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세상을 뒤집는 의사들>, 스티브 브루워, 추선영 옮김, 검둥소, 2013년 5월 22일, 1만 5천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