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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 겉표지
 <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 겉표지
ⓒ 김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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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운동장의 화단에는 이승복 동상이 서있었다. 옆으로는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유관순 누나 등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사실 자세히 알지 못했다. 우리 또래밖에 되지 않았지만 목숨을 걸고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고 했다. 난 공산당이 뭔지도 몰랐다. 으레 나쁜 사람들이라고만 알았다. 똘이장군을 보면 그 사람들은 늑대의 형상이었다. 꼬리도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 금수였다. 그냥 그랬었다.

그런데 이 '이승복 일화'에 대해 재판이 벌어졌다. 지금 <오마이뉴스> 팟캐스트 방송 <이슈 털어주는 남자>를 진행하는 김종배 기자는 당시 <조선일보> 기자가 사건 현장에 가지도 않고 기사를 썼다는 취지의 글을 썼다. 사건이 있은 후 30년이 지난 1998년이었다. 이듬해 <조선일보>는 신문사 명예를 훼손했다며 고소를 했다. 그렇게 7년의 재판이 시작됐다. 그리고 김종배 기자는 2006년 겨울에야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임을 선고받았다. 

참 웃지 못 할 발자취다. '반공'이 시대의 전부였던 시기이기에 가능했다. <조선일보> 기자는 왜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남기며 보도를 했고, 아홉 살 어린아이가 대체 무슨 의미인 줄 알고 공산당이 싫다며 목숨까지 내놓았으며, 아직도 기념관에 시신 사진이 걸려 편히 안식하지도 못하고 있는가.

이렇듯 우리 현대사를 관통하는 사건들을 주제로, 김형태 변호사가 일간지에 연재하던 글을 모아 펴냈다. 개별 사건만으로도 굵직굵직하다. 사형제 위헌심판, 용산참사, JSA 김훈 중위 의문사, 송두율 사건, 인혁당 재심, 황우석 교수 사건 등. 이 사건들을 맡았던 김 변호사의 문제의식은 명료하다. 만물은 하나라는 것이다.

"어제 빨갱이의 아들이 오늘 보수반동이요, 오늘 사형수의 아들이 내일 성철 스님이다. 우리 스승들이 그러셨듯이, 그저 이 한 세상 살면서 나와 이웃들이 이런 이치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서로서로 도와줄 일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다."(들어가며, 11쪽)

1분의 만남 그리고 사라진 남편

책의 제목 <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에는 묘한 이질감이 숨어있다. 짧지만 영원하다니? 이 제목이 붙은 연유도 알고 보면 무척 슬프다. 서로 같이 쓰이지 못할 것 같은 수사지만, 둘 다 맞는 얘기다. 만남은 '짧았지만' 기억은 '영원'하다. 그리고 그 기억은 슬프다. 기억의 당사자들과 우리 모두 영원히 슬프다.

인혁당 사건에 휘말린 이수병 선생과 선생의 처에 관한 이야기다. 구치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던 선생에게는 단 한 차례의 면회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애달았던 선생의 처는 매일 아이를 둘러업고 구치소를 향했다. 철문 너머로라도 남편을 보고 싶어서였다.

판결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한 교도관의 호의로 구치소에 들어섰다. 그리고 변호사를 접견하러 가는 남편을 만났다. 눈이 좋지 않았던 남편은 가까이에 와서야 처와 아이를 알아봤다. 안부를 묻거나 반가움을 표현할 새도 없이 스쳐갔다. 딱 두 마디를 남기고.

"많이 컸네, 많이 컸네."

그렇게 그들은 '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을 했다. 선생은 일주일 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판결이 확정된 지 18시간밖에 지나지 않았고, 선고통지서가 구치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형은 집행됐다. 희생자들 중 유일하게 화장을 면한 선생의 시신에는 끔찍한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다.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해서 법원은 2007년(사형이 집행된 8명)과 2008년 재심(징역형을 받았던 나머지 사람들)을 통해 무죄를 확정 판결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이 어떻게 사건을 악랄하게 조작했는지가 낱낱이 드러났다.

수사지침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조서를 정리할 때 지난번 부장님 발표문을 참조하여 거기에 맞고록 체제를 갖추어 정비하고…… 7500원을 유인태에게 준 것을 취재에 대한 사례비조로 받았다고 한 것은 진실에 반하는 것이니 폭력혁명에 애쓰고 있는데 자금이 없어 라면으로 연명하는 실정이고 교통비도 없다는 사정을 말하였더니…… 적은 돈이지만 폭력혁명을 수행하는 자금에 보태어 쓰라고 하기 마지못해 받은 것으로 표현'하라.(312쪽)

사건을 수사한 공안검사마저 이들이 무죄가 되면 도리어 자신이 빨갱이로 몰릴까 두려웠다고 하니 말 다했지 않은가.

국가의 폭력, 우리 모두 유죄

<오마이뉴스>가 개최한 '저자와의 대화'에서 김 변호사는 '법에 의해 실상이 어떻게 뒤틀어지는 것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희생자와 그 가족들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 국민 또한 진실을 알 권리와 동시에 진실을 제대로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과연 우리는 이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가.

이분법적 구분에 따라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사회에서는 진실이 완벽하게 규명되더라도 그것을 진실로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이해타산, 정치, 인간관계 등과 같은 온갖 검질긴 핑곗거리에 구속당한 채 말이다.

따라서 진실 규명 작업은 총체적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총체적인 진실은 간단히 발견될 수 없다. 수많은 증거들의 정밀한 조합, 배후에 작동한 정치적 동기에 대한 통찰, 반성적인 인권 감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우리는, 저자의 말처럼 인간을 사랑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다.

용산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이 오늘(27일) 재판을 받는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절친했던 이웃들을 잃어버린 한 사람과 그런 그를 돕기 위해 달려왔던 또 다른 철거민.

저자가 책에 적은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대자본, 그 심부름꾼 정권, 조합, 용역, 경찰, 검찰, 법원 아니 돈이 최고인 나와 우리 모두,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 제도도 법도 바뀌지 않았다. 우리의 욕심도. 모두가 공범인 우리는 용산참사의 책임을 면제받고, 용산은 그저 책임질 사람이 없는 '참사'로 남았다. 아니, 망루 밖으로 화염병을 던진 철거민 '테러범들'만이 그 책임을 몽땅 도맡아졌다. 무간지옥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감옥으로, 까맣게 타 죽은 자들은 무덤으로. 푸르스름한 새벽하늘 아래 주홍빛으로 활활 타오르던 용산 남일당 망루는 정말로 우리에게 무엇인가.(162쪽)

어쩌면 우리는 또 다른 '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을 목격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 김형태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2013.05, 1만8천원



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 - 김형태 변호사 비망록

김형태 지음, 한겨레출판(2013)


태그:#김형태, #인혁당, #용산참사, #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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