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발전은 늘 그 빛만큼 그늘도 드리운다.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 동력인 산업혁명이 장애인 복지에 그러했다. 산업혁명으로 공장제 기계공업이 노동 현장을 장악하면서 표준화되고 기계화된 노동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 이른바 장애인들은 무능력자로 낙인찍히며 노동 현장으로부터 밀려나고 사회체제에서까지 근본적으로 배제당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과 '장애인'의 탄생산업혁명 이전 중세 유럽 봉건사회의 공동으로 노동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는 장원 경제에선 가정생활과 노동 현장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기에 이른바 장애인들도 어떤 형태로든 직업을 지니고서 사회 공동체의 경제사회적 시스템에서 배제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비록 육체적 손상은 있을망정 무능력자(장애인)는 아니었다.
그런데 국부 창출을 위해 생산력과 이윤 증대 극대화를 추구하며 노동자를 기계의 '수족'으로 취급하던 중노동과 장시간의 육체적 노동 현장에서 이른바 장애인들은 비생산적 존재로 여겨져 노동 현장 진입 자체를 근본적으로 차단당했다. 벤담(Jeremy Bentham)식 '공장제 유토피아'에 이른바 장애인이 설자리는 없었으며, 마침 진행된 거대 수용 시설의 출현과 맞물려 장애인은 집단 수용의 격리 대상자가 되었다.
특히 영국은 1834년, 개정 '구빈법'을 통하여 산업사회의 새로운 노동 현장에 투입할 수 없는 아동, 병자, 광인, 심신에 결함이 있는 자, 노약자 등 다섯 부류를 가려내, 이 범주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노동할 수 있는 자로 간주한다. 즉 일할 수 있는 신체(the able bodied)를 선별하기 위해 일할 수 없는 신체(the disabled bodied)를 규정하였고 여기에서 '장애(disability)'라는 개념이 형성되고 그것은 그대로 장애인이란 용어로 고착되었다.
이처럼 일할 수 있는 몸과 일할 수 없는 몸으로 분리되면서 일할 수 없는 몸을 지닌 장애인들은 사회 시스템에서 철저히 배제당하기 시작했다.
모리스(Jenny Morris)의 "산업혁명의 노동시장의 작동은 모든 유형의 장애인을 효과적으로 시장의 밑바닥으로 처박아 버렸다."는 표현대로 그로부터 장애인들은 기나긴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더욱이 19세기 말엽 대두된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과 우생학(eugenics)은 장애인과 함께 사는 사회가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해 논의마저 일어나는 지경에 이를 정도였다.
장애인 복지의 이런 암흑기는, 전상 장애인(戰傷障碍人)을 양산한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지구촌 전체로 확산된 산업화의 후유증인 산재 장애인의 대거 출현을 겪으면서 장애인 문제가 더 이상 장애인 그들만의 것이 아닌 사회 전체의 것으로 인식하게 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장애를 가진 퇴역 병사에 대한 사회적 책임 의식이 대두되었고, 미국을 중심으로 재활 프로그램 위주의 장애인 정책이 더욱 확대되었다. 전쟁 중에 장애를 입게 된 사람들에 대해 국가가 빚을 지고 있다는 의식은 역설적으로 장애인 복지 프로그램들을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외형적으로 발전을 거듭한 장애인 복지 역시 어디까지나 장애인 당사자가 아닌 그 정책을 펼치는 정부와 전문가의 입장에서 이루어졌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장애인 복지의 패러다임을 바꾼 독립생활운동이러한 장애인 복지 현실에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 196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독립생활(independent living, IL)운동이다. 독립생활운동은 1960년대 진보적 사회운동의 배경에서 움트기 시작하여, 1970년대 '재활법(Rehabilitation Act)' 개정 투쟁으로 발전하였고, 1990년도 '미국장애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 ADA)' 제정으로 큰 열매를 맺음으로써 미국 장애인운동의 주류로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독립생활운동이 시작된 1960년대는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의 표현대로 "세계적 규모의 식민주의 체계와 싸우는 것과 더불어 미국 사회 전체를 재구조화할 수 있었던" 결정적 시기였다. 멕시코계 주민의 권리회복운동, 흑인들의 공민권운동, 페미니즘에 입각한 급진적 여권신장운동,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전평화운동, 히피 문화로 상징되는 반문화운동, 대학생들의 학원 민주화운동 등 진보적 이념에 바탕을 둔 다양한 사회운동이 캠퍼스 내에서부터 시민사회에 이르기까지 왕성하게 펼쳐졌다.
미국 공교육에서의 인종차별 철폐의 단초가 되었던 "분리된 교육 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것이며 분리는 평등이 아니다(separate not equal)."라는 1954년의 '브라운 판결(Brown v. Board of Education of Topeka)'에 힘입어 흑인들이 대학의 문을 두드리던 1962년, 독립생활운동의 창시자 로버츠(Edward Roberts)가 소아마비로 전신 마비가 된 몸으로 그 당시 미국 진보적 사회운동의 진원지였던 버클리주립대학에 입학했다.
로버츠가 숱한 난관을 이겨내며 정치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있던 1967년, 그 당시 사회적 이슈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12명의 버클리대학 장애학생들이 '휠체어를 타고 굴러서 다니는 장애인들'이란 뜻의 'Rolling Quads'라는 자조 모임을 만들었다.
그들은 차츰 장애인 문제가 시민권적 문제임을 인식하고, 1969년에 장애 학생 독립생활 지원 서비스를 위한 '독립생활을 위한 전략(Strategies of Independent Living)'으로 부르는 모임을, 1972년에는 지역사회 장애인들까지 동참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 지원 체제로 앞으로 미국 장애인 권익 실현의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될 독립생활센터(center for independent living, CIL)를 각각 개설하였다.
버클리 CIL은 "장애인의 생활 영역은 수용 시설이 아니고 지역사회이다. 장애인은 치료받는 환자나 보호받는 어린이도 숭배할 하느님도 아니다. 장애인은 복지 서비스의 관리자이다. 장애인은 사회적인 편견 때문에 차별받고 희생되어왔다"라고 주장하며 연방정부로부터 예산을 받아 당사자가 주체가 된 활동 보조 서비스, 주택 서비스, 이동 서비스 등을 내용으로 하는 사업을 펼쳤다.
"통합이야말로 가장 핵심되는 말이다. 장애인들도 사회 안으로 들어와야만 한다"는 신념으로 로버츠가 시작한 독립생활운동은 단 몇 년 사이에 휴스턴, 보스턴, 뉴욕, 시카고 등 미국 전역에 CIL을 우후죽순처럼 설립시키며 미국 장애인 복지 체계를 근본에서부터 변혁시켰다.
독립생활운동은 다양한 사회운동과 밀접하게 결합하면서 보다 보편화되고 한층 성숙한 기반을 갖추어나가게 되었으며 이것은 결국 시민권적 차별 금지법인 ADA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로버츠가 버클리대학의 장벽을 허문 지 28년 만인 1990년에 제정된 ADA야말로 미국 장애인들의 투쟁의 산물이며 세계 장애인운동사에도 역사적인 이정표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독립생활운동은 장애인도 한 인간으로서 인권을 보장받고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민권 보장의 정신에서 출발한 것으로, 탈의료화·탈시설화·정상화·주류화 등의 다른 장애인 복지 운동들의 이념과 이론은 물론이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며 인간의 존엄성과 자조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공통된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시민권(civil rights), 소비자주의(consumerism), 자조(self-help)의 개념 그리고 자기관리(self-care) 등의 시민사회운동들의 실천적 이념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전개되었다.
이런 이념을 바탕으로 펼쳐졌던 독립생활운동은 장애인 스스로의 자아실현을 위한 자기 결정과 선택, 기회 평등, 그리고 개인의 존엄을 요구하는 가치관 인권운동으로 확고히 자리 잡으며 전 세계 장애인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독립생활운동이 장애인운동의 중심이 되면서 장애인 당사자들이 직접 나서 인간의 기본적 권리인 이동권·교육권·노동권·문화권 등을 획득하려는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자본주의의 거대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장애인 문제가 장애인만의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차원의 것임을 인식하고 우리 사회의 소외 계층 약자들과 연대하도록 이끌었으며, 이러한 추세에 독립생활운동과 그 실천적 이념이 기폭제 역할을 하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독립생활운동은 우리나라 장애인 복지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와 같은 근본적이고 역동적인 변화를 일으키면서 장애인운동의 스펙트럼을 한없이 확대시키고 광활한 전망의 텃밭을 제공해주고 있다.
독립생활운동을 넘어 독립생활운동은 장애인 복지 체계와 장애인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혁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점도 함께 드러냈다. 미국의 장애인 옹호가 러셀(Marta Russell)과 말호트라(Ravi Malhotra)의 "자유 시장 원리를 당연시하면서 독립생활운동은 장애인을 진실로 세력화할 급진적 잠재력을 잃었다"는 비판처럼, 독립생활운동은 장애인의 자율과 자치를 표방하면서도 장애 논쟁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을 소비자로서의 권리라는 맥락으로만 국한시킴으로써 장애라는 개념을 발생시킨 자본주의 자유 시장 원리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수용하고 내재화시켜버린 것이다. 장애인의 사회참여만을 추구하다 자본주의 체제 내 편입만을 궁극 목표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200년 전 노동력과 생산성을 모든 것의 유일한 가치 잣대로 삼고서 출발한 산업혁명 이후의 자본주의 체제가 과연 장애인 모두에게 온전한 자아실현과 삶의 질을 보장해주는 천국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야말로 장애인들에게 근본적인 소외와 차별과 배제를 가져다주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의 침대란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 더욱이 장애인을 무능력자로 낙인찍어 '장애인'이란 용어 자체를 만들게 했던 자본주의 역사를 돌아본다면!
장애인의 무노동권이에 따라 최근 미국에서는 장애인의 무노동권(the right to not work)이 주장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의 노동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공장제 노동을 말한다. 설사 독립생활을 위한 사회적 지원 체계를 온전히 갖추고 보조 공학의 발전으로 공장제 노동 현장에 대한 접근성이 일정 한도 올라갈지라도 표준화된 시스템에 의한 공장제 노동 현장에 전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장애인들이 어쩔 수 없이 발생될 수밖에 없으니, 노동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통하여 장애인의 고유한 노동 형태를 시민권적 차원에서 확보하자는 것이다.
선천성 다발성 관절만곡증 탓에,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 장애인운동가 테일러(Sunny Taylor)는 생산성 가치를 한 개인의 가치와 등치시키며 노동 예찬을 펼치는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인 공장제 기업 노동을 거부하면서, 그러한 노동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누릴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고 또 영위하고 있다.
그녀는 "장애인이 노동 '기회'를 통해서만 이익을 얻고, 그런 기회에 감사해야 할 정도로 노동이 중요한 까닭은 과연 무엇인가?"라고 반문하면서 노동은 무조건 숭고한 것이고, 누구든 직장을 동경해야 하고, 임금노동자가 되는 것은 궁극적인 자유이며,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은 문화적 이상과 열망, 그리고 꿈을 가져야 한다고 주입하면서도 막상 현실에서는 장애인들을 노동 현장에서 배제하는 구조적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장애인의 무노동권은 노동생산성, 고용 가능성, 혹은 임금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그것은 장애인을 열등한 존재로 낙인찍으며 배제시켰던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노동의 역할과 의미를 새로운 관점에서 통찰함으로써 임금노동으로만이 인간의 가치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 체제가 주입시킨 사고를 전복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아직은 대다수 장애인에게 고용 자체가 '그림의 떡'인 현실에서 장애인 고용 장려 정책 덕분에 공장제 노동 현장 진입에 성공한 장애인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고, 또 지속적으로 확대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직업 재활이 장애인 복지의 꽃'이라 할 만큼 대다수의 장애인에게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비장애인이 직업을 갖는 것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직업을 통해 장애인은 사회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은 물론 독립적인 삶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소득을 획득하고 생산적 활동으로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200년 장애인 복지사를 되돌아볼 때, 영국의 장애학자 애벌리(Paul Abberley)가 말한 '노동을 기준으로 하는 정상화(work-normalized)'를 통하여 자본주의 체제 내로 모든 장애인을 단순히 합류시키는 것만이 장애인운동의 궁극 목표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모든 사람이 완벽한 얼굴, 완벽한 일자리, 완벽한 가족, 완벽한 몸을 갈망하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기존 문화 가치 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서 장애인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인 것이다.
영국의 장애학자 올리버(Michael Oliver)의 지적대로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도 장애인들이 완전한 시민권과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받을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 사회 속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판이며, 사회 언저리에서 서투른 솜씨로 하찮은 일이나 하는 것이 아닌 사회의 완전한 구성원으로 역할을 하려면,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하여 장애인의 무노동권은 장애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측면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도록 상상력을 부추기고 있으며, 우리의 눈길을 자본주의 체제의 기존 문화 가치 체계를 훌쩍 뛰어넘어 펼쳐지는 새로운 지평으로 이끌어간다.
장애인과 아나키즘의 조우
장애인과 아나키즘과의 만남은 바로 여기서 이루어진다. 아나키즘 자체가 산업혁명을 통한 자본주의가 서구 사회로 전파되었던 19세기 혁명의 시대에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와 권위주의적 국가의 지배를 거부하는 혁명 사상으로 발생하였다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장애인의 발생은 산업혁명에서부터 시작된 그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성을 상실하고 배제당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보면 장애인은 자본주의의 저항 세력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장애인은 아나키즘의 기본 이념인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고, 자본주의적 착취와 권위주의적 국가를 폐지하기를 바라는 반국가주의, 반권위주의, 반자본주의적 입장에 적극적으로 동조할 수밖에 없는 급진적 위치에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원리가 촘스키(Avram Noam Chomsky)가 말한 "단결, 상호부조, 동정,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 등의 정서" 같은 인간 본성의 핵심 요소들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자본의 이윤 창출에 도움이 되는 생산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은 무조건 차별하고 배제시키는 것이라면,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위계질서와 권위주의적 지배로터의 해방과 억압의 고리를 끊고 자유를 추구하며 인간에 대한 신뢰와 본래적 인간의 자율적 본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는 아나키즘이야말로 자본주의 체제라는 암초에 좌초당해 삶을 박탈당했던 장애인의 진정한 해방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특히 독립생활운동의 이념인 자기 결정권, 선택권, 주도권 등은 대단히 아나키적이 아닐 수 없다. 그 실천적인 측면에서도 아나키즘과의 친화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으니, 앞에서 언급했듯이 독립생활운동 자체가 미국 사회 전반에 지극히 아나키적 분위기가 새로운 조류로 풍미했던 1960년대에 탄생했기 때문이다.
세계를 거대한 자본주의 시장 체제로 재편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따른 병폐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경제 위기 속에서 드러나면서, 그 세계시장의 경쟁에서 소외된 민중들의 범세계적인 반세계화운동이 고조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령(Occupy Wall Street)에서 촉발되어 전 세계적으로 들불처럼 번졌던 점령운동(Occupy Movement)은 1999년 WTO에 반대하는 시애틀 시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반세계화운동을 미국의 여성운동가이자 <미국의 종말: 혼돈의 시대, 민주주의의 복원은 가능한가(The End of America)>의 저자인 울프(Naomi Wolf)는 "과거의 어떤 전쟁과도 다른 새로운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있다.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국적이나 종교로 편을 가르는 대신, 전 세계적인 양심과 평화적인 삶, 지속 가능한 미래, 경제 정의, 기본적 민주주의라는 요구로 한데 뭉치고 있으며, 그들의 적은 '기업 지배 체제'이다"라고 갈파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그동안 개인의 자유와 자율적 공동체의 건설을 강조해온 반권위주의, 반자본주의, 반국가주의 아나키즘운동 이념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와 함께 우리나라 역시 최근 선거에서 드러나듯 트위터를 비롯한 SNS의 활성화로 인하여 유권자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고 다중 지성적 여론 형성을 주도하는 직접민주주의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아나키적 전망이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장애인 노동에도 새로운 전망과 유용한 통찰력을 제공해주고 있다. 현재의 국가 주도적인 장애인 고용정책의 천편일률적인 행태에서 벗어나 장애인의 개별 특성을 고려하여 장애인들이 각자의 고유한 능력을 자아실현 차원에서 온전히 발현할 수 있게 하는 맞춤형 고용정책이 요구되고 있다. 특히 문화 시대를 맞아 장애인 문인과 예술가 등을 키워내는 등 장애인 문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제도적 지원과 투자도 절실한 시점이다.
그와 함께 현재 독립생활운동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CIL(장애인독립생활지원센터) 역시 단순히 장애인 서비스 전달 체계의 네트워크적인 활동을 넘어 아나키즘에서 강조하는 자유로운 발전, 탈집중화, 다양성, 자발성 같은 개념을 지역공동체에서 주도적으로 펼치고 심어나가는 지역사회운동의 메카로서의 선도적 역할을 꾀해야 할 것이다. 생래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고 탈자본주의적인 장애인 노동운동 또한 신자유주의 속에서 위기에 처한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소중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로운 문명은 늘 그 사회 속의 마이너리티로부터 창조적 에너지를 공급받으며 활짝 피어났다. 산업혁명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탈근대의 흐름 속에 맞는 문명사적 대전환기인 이 시대에 나는 다시 우리 사회의 마이너리티들이 지닌 사회변혁의 잠재적 폭발력에 주목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탈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산업혁명의 부산물인 공장들이 갈수록 도시 외곽으로 물러나고 있을 뿐 아니라 공장제 노동 현장에서의 노동의 일탈 현상도 가속화되고 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보화 시대를 맞아 장애인들이 고유한 특성을 살리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다양한 영역도 속속 개척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장애인운동 역시 단순한 사회 통합이나 정상화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장애인을 발생시킨 자본주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무한 경쟁을 통한 착취와 억압의 구조적 모순의 위기를 극복하여 온전한 인간 해방을 이루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아나키즘의 기본 이념인 탈중심적인 공동체연합, 국가주의의 거부, 직접민주주의, 자유주의적 공동체 사회 건설 등을 장애인운동에 실천적 이념으로 내면화시켜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시대 현상을 주목하면서 효율과 성장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노동생산성에 따라 인간의 가치까지 결정짓는 비인간적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새로운 공동체 사회 출현이 멀지 않음을 기대한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장애인이야말로 다가올 새 시대를 여는 사회변혁의 첨병이 아니겠는가. 그 가치에 사회와 장애인들이 눈을 떠야 한다. 장애인 노동의 르네상스 시대는 그렇게 오는 것일까.
덧붙이는 글 | 참고 문헌
김도현, 2011, <장애학 함께 읽기>, 그린비
쉐피로, 2003, <동정은 싫다(NO PITY)>, 서동명 옮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크로포트킨, 2009, <아나키즘>, 백용식 옮김, 개신.
Taylor S, 2008, <노동하지 않을 권리: 권력과 장애>, 윤삼호 옮김, 한국장애인인권포럼.
김성국 이문창 정중규 등 14인, 2013, <지금, 여기의 아나키스트>, 이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