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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민군 전사의 수첩에서 나온 사진(이 사진은 미군이 북한에 진주하여 노획한 것으로 촬영 날짜 미상이다). 아마도 이 사진을 소지한 인민군은 전사했거나 포로가 되었을 듯하다. 그래서 거의 소지품이 노획되었으리라.
 어느 인민군 전사의 수첩에서 나온 사진(이 사진은 미군이 북한에 진주하여 노획한 것으로 촬영 날짜 미상이다). 아마도 이 사진을 소지한 인민군은 전사했거나 포로가 되었을 듯하다. 그래서 거의 소지품이 노획되었으리라.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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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병원

인민군 제3사단 임시야전병원은 구미면 임은동에 있었다. 구미 '임은동(林隱洞)'은 동네이름처럼 낙동강 옆 숲에 폭 파묻힌 마을이었다. 야전병원 입지로 아주 알맞은 천연 지형이었다. 마을 가운데 대나무 숲에 싸인 큰 기와집은 수백 년 된 고택으로 구한말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선생 생가였다. 그 집은 야전병원 본부 겸 외과 수술실이었고, 이웃 초가집들은 환자 회복실 겸 야전병동으로 쓰고 있었다. 

장 상사는 흰 가운을 입은 인민군 중좌(영관급 계급) 문병철 병원장에게 귀대 보고를 한 뒤 김준기와 손만호 전사에게 전입을 신고케 했다.

"전사 김준기는… "
"전사 손만호는… "

"고만 됐수다."

두 전사가 잔뜩 겁먹은 채로 신고를 하는데 문명철 중좌가 미소를 띠며 만류했다.

"동무들, 먼 길 오느라구 수구(수고) 햇수다. 이곳은 최전선인 낙동강이야. 강 건너 산 너머에는 국방군 아새끼들과 미제 놈들이 개미떼처럼 우글거리고 있디. 요기는 미제 대포 포탄이나 쌕쌕이 폭탄에 죽느냐, 사느냐 목숨이 한 순간에 왔다리 갔다리 하는 최전선이야."
"네, 알갓습네다."

두 전사는 합창하듯 대답했다.

이곳은 원래 왕산 허위 선생의 생가 터였다. 일제강점기 때 왕산 후손들은 만주로 망명했으나 생가 한옥은 그대로 보존돼 오다가 한국전쟁 중 인민군 임시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다. 그런 가운데 1950년 8월 16일 이 일대가 융단폭격으로 완전 소실된 뒤 폐허로 방치되었다. 그 뒤 2009년에 이 기념공원으로 단장되었다. 이 공원에는 아직도 그때의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 왕산허위선생기념공원 이곳은 원래 왕산 허위 선생의 생가 터였다. 일제강점기 때 왕산 후손들은 만주로 망명했으나 생가 한옥은 그대로 보존돼 오다가 한국전쟁 중 인민군 임시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다. 그런 가운데 1950년 8월 16일 이 일대가 융단폭격으로 완전 소실된 뒤 폐허로 방치되었다. 그 뒤 2009년에 이 기념공원으로 단장되었다. 이 공원에는 아직도 그때의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 손현희 오마이뉴스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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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직 명령

"내레 살아 돌아갈디, 동무들이 살아 돌아갈디 전쟁터에는 거(그) 누구두 알 수 없디. 우리는 영광스럽게두 조국해방전쟁 전사로 요기에 와서. 내레 두 동무의 무운장구를 빌가서. 미제 침략자들을 처부수구 꼭 살아 영웅 훈당(훈장)을 받아 고향에 돌아가라우. 우리 야전병원에 복무하는 동안 아무토록 부상당한 많은 동무들의 생명을 살레내구."
"네! 알갓습네다! 병원장 동무의 명넝(명령) 받들갓습네다."

두 전사는 부동자세로 동시에 크게 대답했다.

"아직 병원 일에 서툴 테니까 김준기 동무는 최순희 동무 조수로, 그리고 손만호 동무는 장 동무를 보좌하면서 행정반 일을 보라요."

문명철 병원장은 즉석에서 두 신병에게 보직을 주었다.

"이봐, 최 동무!"

문병철 중좌가 야전병원 수술실을 향해 소리쳤다.

"네, 병원장 동무!"

새빨간 적십자 완장을 두른 한 여전사가 수술실에서 재빨리 사뿐사뿐 다가왔다.

"김준기 동무를 최순희 동무 조수로 발령을 냈으니께 동무가 잘 알쾌(가르쳐) 주라요."
"네! 알겠습니다. 병원장 동무!"

"내레 최 동무 일이 벅탄 것 같아 조수로 발령냇디."
"넷! 감사합니다."

최순희가 문명철 병원장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대답하는 말씨가 서울 말이었다. 준기가 그 얼마나 동경했던 서울 말씨였던가. 최순희는 곱상한 얼굴에 몸매가 날렵하고 아주 당차 보였다. 순간 준기의 숨이 막힌 듯하고, 그의 심장은 마구 뛰었다.

첫 인사

"두 사람이 멀건히 처다보디만 말구 김 동무가 최 동무에게 먼저 인사하라우. 최 동무는 김 동무보다 일주일 먼저 입대한 선임이디."
"기건(그건) 기래. 오뉴월 하루 볕이 어딘데. 최 동무는 우리가 대전에 있을 때 전입해 왔디."

장 상사의 말에 문명철 병원장이 훈수하듯 말했다.

"…김준기 전사,  … 전입 … 인사드립네다."

어느 인민군 여전사의 미소(개성 정전회담장, 1951. 7. 31.).
 어느 인민군 여전사의 미소(개성 정전회담장, 1951. 7. 31.).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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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는 얼굴이 붉게 물든 채 거수경례를 하며  떠듬거렸다.

"반갑습니다. 최순희 전사예요."

최순희는 싱긋 미소지으며 거수경례로 답례하며 대꾸했다.

"평안도 영벤 촌놈이 서울 아가씨 앞에서 아주 단단히 얼어버렷구만."

장 상사의 말에 김준기의 얼굴은 더욱 새빨갛게 물들었다.

"잘 … 부탁드립네다." 
"네, 수고해 주세요. 오히려 제가 잘 부탁드려요."

두 사람의 눈길이 다시 마주쳤다. 순간 서로 멈칫 놀라는 눈치였다.

'저 쪼그만 어린 동무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숨이 막힐 듯 깜찍하게 예쁜 데(저) 서울깍쟁이 아가씨를 최전선 낙동강 야전병원에서 만나다니….'

서로 간 연민과 놀람의 눈빛이었다. 장 상사와 문 병원장은 두 전사가 첫 인사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작품 배경 취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지인 및 애독자들이 제공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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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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