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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의 남지철교로 폭파직전 원래 모습이다(1950. 8.) 이 다리는 1931년 건설 당시 최신기술로 만든, 한국근대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량 중의 하나다. 한국전쟁 중 가운데 부분 25미터가 폭파된 것을 1953년에 복구하였다.
▲ 남지철교 경남 창녕의 남지철교로 폭파직전 원래 모습이다(1950. 8.) 이 다리는 1931년 건설 당시 최신기술로 만든, 한국근대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량 중의 하나다. 한국전쟁 중 가운데 부분 25미터가 폭파된 것을 1953년에 복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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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손자병법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전쟁의 가장 기본 전략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전쟁 당시 남북 양측은 이 손자병법의 기본을 외면한 채 상대를 오판하여 전쟁기간 내내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먼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남한의 군 수뇌부는 북한 인민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채 시시때때로 걸핏하면 '북진통일론'을 외쳐댔다. 사실 1949년과 이듬해인 1950년에 북한 김일성 군사위원장은 소련을 두 차례나 방문하여 스탈린 수상에게 '해방전쟁'을 일으키겠다며 승인을 간곡히 요청했다. 1차 방문 때 스탈린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그 첫째는 북한 인민군이 남한 국군보다 압도적으로 우월치 못하다는 점이요, 그 둘째는 남한에 미군이 남아 있단 점이요, 그 셋째는 38선에 관한 미소협정이 아직 유효하다는 이유를 들어 때를 기다리라고 충고했다. 이에 김일성은 소련의 원조를 받으며 착실히 군비를 증강하는 가운데 1949년 6월 29일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였다.

마침내 통일의 호기를 맞았다고 판단한 김일성은 1950년 3월에 다시 모스크바로 갔다. 이에 스탈린은 1차 방문 때와는 달리 김일성에게 두 가지 조건을 내걸며 승인하였다.

그 하나는 미국이 개입치 않는다는 확실한 보장과 그 둘은 중공의 승인이었다. 소련에서 돌아온 김일성은 곧이어 중국을 방문하여 마우쩌둥 수상을 만나 스탈린의 의도를 전달하였다. 이에 마우쩌둥이 스탈린의 의도에 대해 직접 확인을 요청하자, 스탈린은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발송하였다. 이를 확인한 마우쩌둥은 김일성의 계획에 동의하였다. 이미 미국은 한국에서 철수한 뒤 애치슨라인을 발표하여 공산 측의 오판을 유도케 했다.

이와 같이 김일성은 모스크바, 베이징을 오가며 그들에게 비밀리에 군사원조를 받으면서 전쟁 준비를 매우 치밀하게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한의 수뇌부는 그런 사실도 제대로 파악치 못한 채, 상대를 아주 깔보며 계속 북진통일론 망언을 외쳐대는 블랙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었다.

북한 수뇌부 역시 남한과 미국에 대한 정세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들은 인민군이 남으로 밀고 내려오면 남한 전역에서 지하남로당 주도로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남한에서는 한국전쟁 전에 이미 그 싹을 무자비하게 싹둑 잘라버렸다. 또 미처 자르지 못한 좌익 혐의자들은 대부분 형무소에 가둬두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국 곳곳에서 이들을 집단으로 처형해 버렸다.

대전형무소 수감 좌익혐의자 처형 현장(1950. 7.)
 대전형무소 수감 좌익혐의자 처형 현장(195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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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치슨라인

그리고 북한 측은 미국의 새로운 극동방위선 곧 '애치슨라인'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이 '애치슨라인'은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발표한 것으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은 알류산열도와 일본열도, 그리고 필리핀열도를 연결하는 선으로 한국과 대만은 이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북한을 비롯한 공산진영에서는 이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발표를 소련 스탈린과 중국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고도의 술책으로 해석치 않고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도 이미 철수한 주한미군이 다시 개입치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이는 큰 오판이었다. 미국이 태평양전쟁에서 숱한 희생을 치르며 얻은 한반도 남쪽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겠는가. 더욱이 한반도는 대륙 진출의 교두보가 아닌가. 태평양을 자기네 내해로 여긴 미국이 소련의 팽창 남진정책을 두 눈을 뜨고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어쩌면 미국은 애치슨라인이라는 미끼를 던져, 그 미끼를 소련과 중국이 덥썩 물면 이를 빌미로 그들의 한반도 재상륙이라는 큰 고기를 낚으려는 고도의 노림수였을지도 모른다.

또 북한 측은 한국전쟁 초기에 미 스미스부대를 격파한 뒤로 미군의 전투력을 우습게 여겼다. 스미스부대의 패전은 그들의 북한군 장비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대전차 공격용 무기를 대비치 않은 게 가장 큰 실책이었다. 북한 역시 미국의 각종 무기 등 거대한 군사력을 과소평가했다. 특히 미 공군력에 대한 대비는 거의 무대책이었다.

그런데도 북한 측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군수품 보급로는 생각지도 않고 속도전으로 물밀 듯이 삽시간에 낙동강까지 남하했다. 이 또한 유엔군 측의 전술전략에 말려든 꼴이 되고 말았다. 곧 유엔군은 인민군의 전선을 길게 늘어뜨려 놓은 뒤 전투기나 전폭기로 전후방의 보급로를 차단시켜 전방의 전투력을 고갈시키는 전술전략을 쓰고 있었다. 이는 제2차대전 당시 독일의 룸멜 전차군단이 아프리카 전장에서 본국의 군수보급지원을 받지 못해 영국군 앞에 자멸하다시피 패전한 작전을 원용한 듯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소련을 방문하여 제5차 최고회의장을 둘러보고 있다(모스크바, 1949. 3. 관람석 우측 김일성, 그 옆 박헌영.).
 김일성과 박헌영이 소련을 방문하여 제5차 최고회의장을 둘러보고 있다(모스크바, 1949. 3. 관람석 우측 김일성, 그 옆 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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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의 속도전

인민군은 한국전쟁 발발 한 달 후인 7월 말에는 부산 대구 일대를 제외한 남한 전 지역을 장악했다. 인민군 군시위원장 겸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은 단시일에 이룬 그들의 전과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두어 차례나 비밀리에 남한 점령지를 내려온 뒤 8월 15일까지 남한을 속전속결 해방하라고 지령을 내렸다.

"8월을 해방의 달로 하여야 한다. 해방 5주년을 기념하는 1950년 8월 15일까지 남조선 모두를 해방시키자. 우리의 승리는 이제 바로 눈앞에 있다. 최후의 승리를 얻기 위하여 전투에 참가한 것은 동무들의 영광이다. 대구, 부산 점령의 열쇠는 낙동강 도하 여부에 달렸다. 3천만 인민의 눈은 여러 동무들의 도하작전에 집중되어 있다."

김일성 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이 지령에 인민군은 전 전선에서 더욱 총공세로 나왔다. 그 무렵 북한 문화선전성은 남한의 전 점령지에 선전벽보를 덕지덕지 붙였다.

"부산으로! 진해로! 최후 승리를 향하여 번개같이 진격하자"

"적들을 일층 무자비하게 소탕하라! 부산과 진해는 지척에 있다. 승리의 깃발 높이 들고 앞으로! 앞으로!"

"조국을 위하여 모두 다 전선에로!"

"전선을 위하여! 여름날 흘리는 땀은 가을에 오곡으로 열매 맺는다."

"공화국 남반부지역에서 실시되는 인민위원회선거 만세!"

인민군 점령지에 붙은 선전용 벽보(장소 미상, 1950. 9. 27.).
 인민군 점령지에 붙은 선전용 벽보(장소 미상, 1950. 9. 27.).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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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라인'

북한 수뇌부는 밤낮으로 인민군에게 남반부 전 지역의 빠른 해방을 독려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인민군의 공세는 속도전으로 사뭇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유엔군은 개전 초기와 달리 속수무책으로 계속 당하지만은 않았다. 유엔군은 작전상 후퇴 중에도 '최후의 보루'인 부산과 대구를 지키고자 적절한 지연작전을 썼다.

그 작전의 하나로 인민군 주력 일부를 호남지방으로 끌어 들였다. 이에 인민군 제4사단과 제6사단이 서남방으로 우회하여 전북과 전남을 휩쓸며 남하한 뒤 진주, 마산 방면으로 동진했다. 이는 인민군이 적을 분산시키기 위한 유엔군 측의 양동작전에 말려든 셈이었다.

낙동강 최후방어선(2011. 10.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촬영).
 낙동강 최후방어선(2011. 10.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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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측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이 지난 1950년 7월 말에는 남한의 대부분을 인민군에게 내주었다. 부산과 대구를 비롯한 낙동강 동쪽 일부만 대한민국 영토로 남아 있었다.

더 이상 밀릴 수 없었던 유엔군은 8월 1일 저녁, 군 수뇌부 합동작전회의에서 부산과 대구를 교두보로 최후의 방어선인 '워커라인'을 만들었다.

이 '워커라인'은 마산 서남쪽 진동을 기점으로 시작하여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창녕군 남지읍을 거쳐,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왜관, 거기서 안동, 영덕을 잇는 선으로 남북 약 135킬로미터, 동서 약 90킬로미터의 네모꼴이었다.

이 방어선이 뚫리면 대구와 부산은 순식간에 점령당할 처지였다. 유엔군은 이 '워커라인'을 대한민국의 명운이 걸린 최후의 보루요 방어선으로 여기에 사활을 걸었다.

불벼락

1950년 8월 초순에 이르자 낙동강을 사이에 둔 낙동강 강북 상주, 선산, 구미 일대의 인민군과 낙동강 강남 왜관, 다부동, 군위 일대는 양측의 전 병력이 총집결하여 공방을 벌였다. 인민군은 이 '워커라인'을 뚫어야 대구 부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반면, 유엔군은 이를 지켜야만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었고, 또한 반격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인민군은 2개 군단의 5개 사단 병력으로 남하작전을 폈고, 유엔군은 미 제8군 4개 사단, 그리고 국군 6개 사단 병력으로 방어 작전을 펼쳤다. 그러자 낙동강을 사이에 둔 낙동, 선산, 구미, 해평, 산동, 왜관, 약목, 다부동 일대에는 병력이 개미떼처럼 집결했다.

낙동강왜관철교 폭파직전에 마지막 트럭이 남으로 건너오고 있다(1950. 8. 3.).
 낙동강왜관철교 폭파직전에 마지막 트럭이 남으로 건너오고 있다(1950. 8. 3.).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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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4일 새벽, 유엔군은 '워커라인' 방어선을 지키고자 낙동강 모든 다리들을 폭파시켰다. 하지만 이튿날 인민군은 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낙동강 도강을 감행하여 유엔군의 '워커라인'을 압박했다.

그러자 유엔군은 낙동강 남쪽 강둑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강을 건너오는 인민군을 향해 무차별 난사했다. 인민군 전사들이 그 빗발치는 총탄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북쪽으로 후퇴하는데 그때 미군 전투기들이 낙동강에다 휘발유를 쏟아 붓고 거기다가 네이팜탄을 쏘아댔다. 그러자 강물은 삽시간에 온통 불바다로, 인민군 전사들은 우왕좌왕 강물 위에서 화마를 입는 생지옥 속에 수장되었다.

수중교

하지만 인민군은 유엔군의 그런 불벼락 작전에도 도강을 포기치 않았다. 인민군은 지난날 소련군이 썼던 수중교 전법으로 낙동강에다 유엔군이 미처 상상치 못했던 수중교를 가설했다.

그들은 유엔군의 공습이 없는 야간에 수심이 얕은 낙동강 마진나루에다 모래를 넣은 가마니와 드럼통 등으로 강물 속에 수중교를 만들었다. 이 수중교는 탱크까지 건널 수 있게 만든 일종의 부교였다. 그들은 이 부교로 도강을 감행했다. 하지만 유엔군은 뒤늦게 이를 알고 전투기 등 온갖 화력을 집중시켜 강남으로 건너온 인민군을 다시 강북으로 물러나게 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둔 인민군과 유엔군의 양측 공방전은 연일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8월 초순까지 지상전의 주도권은 인민군이 쥐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한동안 양측의 전투력이 서로 팽팽히 맞서다가 날이 지날수록 점차 화력이 우세하고 군수보급이 잘된 유엔군 측으로 기울어져갔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일일이 검색하여

수집한 것들과 작품 취재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지인 및 애독자들이 제공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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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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