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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길에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참외를 깎아주고 있다(서울, 영등포. 1951. 8. 20.).
 피난길에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참외를 깎아주고 있다(서울, 영등포. 1951. 8. 20.).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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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짓다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자 쌀뒤주 밑바닥에서 한 됫박 남짓 쌀이 나왔다. 순희가 그 쌀을 모두 씻어 솥에다 안치자 준기가 밖에서 마른 나무를 주워 왔다. 다시 준기는 텃밭에서 고추와 파 등 남새를 뜯어왔다. 순희가 뒤꼍 장독대로 가서 보니 간장 된장이 독마다 가득 담겨 있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이 집 주인은 먼 곳으로 피난 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들은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게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쌀과 찬거리를 두고서 쫄쫄 굶기가 더 괴로웠다.

"예로부터 '먹은 죄는 없다'고 하였다지요."
"우리 오마니도 기러시우. '먹는 게 하늘이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요."

"남이나 북이나 말이 다 비슷하구먼요." 
"기럼요, 우리 민족은 반만 년이 넘는 역사로 5년 전만 해도 한 나라였디요."

"참 그랬지요. 그런데 아주 오래 전에 분단된 나라 같아요."
"두 편 지도자가 인민들을 서로 한 하늘에서 살 수 없는 원쑤처럼 내몬 까닭일 거야요. 학교에서두 기러케 가르쳇디요."

"참, 교육이 무섭구먼요. 우리는 학교에서 조회 때는 물론이고, 무슨 행사 때마다 '우리의 맹세'를 외면서 지냈지요. '일,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이,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쳐부수자. 삼,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휘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라는 그 맹세의 말은 모든 책 뒤에 빠뜨리지 않았지요."
"북에서도 마찬가디였습네다. '야수 미데'니 '남조선 괴뢰를 쳐부수자' '남조선을 해방하자'는 따위 말을 입에 닉도록 배웠디요."

"말은 사람의 영혼을 지배한댔어요. 양측의 말에는 서로 상대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대화로써 모든 문제를 풀겠다는 호혜 및 평화정신이 없어요. 오로지 서로 철저히 미워하는 증오심뿐이에요. 하지만 우린 서로 미워하지 맙시다."
"기럼요, 와, 우리 인민끼리 까닭도 모른 테 호상간 미워합네까?"

순희는 새색시처럼 부엌일을 했다. 둘이서 밥짓는 일이 여간 즐겁지 않았다. 순희가 반찬을 마련하는 동안 준기는 아궁이에 불을 땠다.

"까지껏 나중에 밥 먹은 죄로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오랜만에 아침 한 끼 제대로 거하게 먹어봅시다."
"돟습네다. 네로부터 먹고죽은 귀신은 때깔도 돟다디오."  

흰 쌀밥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굴뚝에 연기를 피우며 밥을 지었다.

"아궁이 불은 내가 마저 땔 테니 그새 바깥을 한번 돌아보세요."
"알가시오."

준기는 순희가 밥을 다 짓는 동안 집밖에서 망을 보았다. 다행히 마을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순희는 밥을 다 지은 뒤 바깥에서 망을 보고 있는 준기를 불러들였다. 그새 순희는 안방에다 밥상을 차려 두었다.

"앞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쌀이 있는 대로 밥을 다 지었어요."
"잘했수다. 딘수성탄(진수성찬)이구만요. 아무래두 우린 쫓기는 처디(처지)라 밥을 자주 지을 수 없을 끼니."

순희는 그새 된장도 끓이고 준기가 텃밭에서 뜯어온 남새로 여러 가지 반찬도 만들었다.

"얼마만에 맛보는 민간 밥이야요?"
"그새 두 달이 지났군요."

"그런데도 한 십년은 지난 듯해요."
"기간 우리가 벨일을 다 겪엇기 때문일 거야요."

그들은 참으로 오랜만에 흰 쌀밥을 보자 곁도 돌아보지 않고 아귀처럼 먹었다.

"오늘 아침 우린 횡재한 거예요. 이제는 살 것만 같아요. 그만 이 집을 떠나요. 우리 어머니는 늘 복이 화가 되고, 화가 복이 된다고 했어요."
"기러디요(그러지요). 오마니가 참 유식하우."

"우리 외할머니가 참 유식했지요."
"와, 거(그) 오마니에 거 딸이란 말이 잇잖수(있잖소)? 기래 우리 누이도 유식한가 보우."
"고마워요. 좋게 봐줘서."

순희가 밥상을 치우는 동안 준기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쉰 채 남짓한 형곡동 마을 집들은 대부분 초가집으로 지난 번 융단폭격에 모두 불 타버려 지붕이 폭싹 주저 앉았다. 그들이 하루 낮 몸을 피할 마땅한 집이 없었다. 준기가 돌아오자 순희 손에는 밥과 반찬을 싼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전선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물바가지를 건네며 무운장구를 호소하는 어머니(경북 대구, 1950. 12. 18.).
 전선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물바가지를 건네며 무운장구를 호소하는 어머니(경북 대구, 1950.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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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랑채

"남은 밥도 반찬도 모두 쌌어요."
"잘 했수다. 기런데(그런데), 동네에서 이 집 밖에는 쉬어갈 집이 없구만요."

"아마 지난 번 융단폭격 때 이 마을도 폭탄에 된통 박살이 난 모양이지요."
"기렇구만요(그렇구먼요)."

"그런데 이 집은 왜 멀쩡할까요?"
"다행히 폭탄을 맞지 않았을 수두, 가까운 곳으루 피난 갔던 주인이 달려와 불을 껐을 수도…. 와, 명이 긴 사람은 융단폭격에두 살아남디 않았소. 아마 집도 기러켓디요."

"참, 우리가 그랬지요."
"기럼요. 빗발티는(빗발치는) 총탄 속에서두 살아남는 사람이 있구, 넷말에 덥시 물에두 닉사한 사람이 있다구 했디요. 행랑채가 좀 부서디기는 했디만 그래두 잠시 쉬어갈 만합네다."

순희와 준기는 밥을 싼 보자기를 들고서 그 집 행랑채로 옮겼다. 날이 저물 때까지 몸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행랑채는 오래도록 비운 탓인지 안방보다는 더 썰렁했다. 준기는 행랑채의 떨어진 방문을 주워 달았다. 하지만 창호지가 빠끔빠끔 뚫려 있었다. 마을에는 강아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불안하여 준기는 방바닥 돗자리를 걷어 방문을 막았다. 그러자 방안이 마치 동굴처럼 어둑했다.

준기는 본채 다락을 뒤져 피난 때 미처 가져가지 못한 이부자리를 가져다가 방바닥에 깔았다. 그들은 간밤에 낙동강을 건넜고, 거기다가 밤새워 걸어왔기에 몹시 지쳐 있었다. 그새 준기와 순희는 옷도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고, 밥도 배불리 먹은 터라 식곤증으로 잠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들은 금세 이부자리에 누워 산송장처럼 잠이 들었다.

전방에 지원사격하는 유엔군들(1951. 6. 9.).
 전방에 지원사격하는 유엔군들(1951. 6. 9.).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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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소리

"윙 윙 …, 휙 휙 …, 펑 펑, …."

미군 폭격기가 유학산 일대에다 폭탄을 떨어뜨리는 모양이었다. 준기와 순희는 그 폭탄소리에 놀라 잠이 깼다. 여전히 방안은 어두웠다. 바깥은 방문을 가린 돗자리 틈새로 들어온 햇살로 보아 아직도 한낮이었다.

"펑 펑, … 꽝 꽝 ."

미군 폭격기들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아예 씨를 말리려는 듯, 하늘에서 폭탄을 마구 떨어뜨렸다. 순희는 그 폭음이 무서웠던지 준기의 품을 파고들었다. 준기는 순희를 꼭 껴안았다. 한 10여 분 동안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비행소리와 폭탄소리가 요란하더니 슬그머니 멎었다.

"동생, 고마워요."

순희가 준기 품을 벗어나며 겸연쩍게 말했다. 그 순간 풋나물과 같은 싱그러운 여인의 몸 냄새가 확 풍겼다. 그 냄새는 준기의 영혼을 마구 뒤흔들었다. 이 세상에 이런 여인의 몸내음이 있다니…. 준기는 순희의 그 몸내음에 미칠 것만 같았다. 그 내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그의 영혼을 질식시키는 체취로 준기를 황홀경에 빠뜨렸다.

"고맙기는요. 누이, 우린 같은 처디야요."

준기는 품에서 벗어나는 순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동생, 이젠 무서움도 피로도 한결 가신 듯해요."
"기러쿠만요."

준기는 순희의 싱그러운 살내음에 취해 그만 정신을 꼴깍 잃었다.

백두산 야생 곰취꽃(2005. 7. 22.)
 백두산 야생 곰취꽃(2005. 7. 22.)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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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일일이 검색하여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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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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