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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더니만, 이러다 결국 흐지부지되는 것 아냐?"

일선 고등학교의 역사 교사들의 한결같은 반응이다. 여태껏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문제가 터질 때마다 정부와 언론이 국민감정을 부추겨 여론이 냄비 끓듯 했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진 것을 수도 없이 경험한 탓이다.

역사교육 강화 방안을 두고 바야흐로 백가쟁명에 접어들었다. 역사교육 '강화'에는 전혀 이견이 없는데, '방안'을 두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거기에 인접 교과목끼리의 '밥그릇 싸움'이 보태지면서 자칫 감정싸움으로 번질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그러던 차에, 역사교육 관련자는 물론 국민들 모두에게 '교통정리'로 비칠 수 있는 주장이 나왔다.

"한국사 과목이 수능 필수과목으로 들어가면 끝나는 일이다."

지난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언론인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제시한 '명쾌한' 대안이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와 일부 역사학자들이 줄곧 주장해온 내용이기도 하다. 그렇게 되면 한국사는 명실공히 국어, 영어, 수학과 함께 대학입시를 위한 '핵심' 교과목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에 대한 반론도 거세다. 두 가지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수능 필수과목이 늘어나면 아이들의 학습 부담을 가중시키게 된다는 게 하나고, 단순히 수험과목이 되었을 때 역사교육의 본질이 훼손될 수 있다는 게 다른 하나다. 물론, 지리와 경제, 도덕 등 사회탐구영역으로 한데 묶인 인접 교과목에 큰 타격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대학입시 틀 바꾸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

수능 필수과목이 늘어나면 아이들의 학습 부담이 커진다는 일각의 주장은 언뜻 그럴 듯해 보이지만, 기실 설득력이 약하다.
 수능 필수과목이 늘어나면 아이들의 학습 부담이 커진다는 일각의 주장은 언뜻 그럴 듯해 보이지만, 기실 설득력이 약하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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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역사교육 강화 방안으로 확정된 것은 이렇다. 내년부터 교육과정을 조정해 한국사 교과목의 단위 수를 현행 5단위에서 6단위로 한 시간 늘리는 것이다. 주당 수업시수가 한 시간 늘어나는 셈이다. 거기에다 한 학기에 몰아서 배우는 '집중이수제' 과목에서 풀려, 두 학기 이상 나누어 배울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추가되었다.

어쨌든 다양한 반론에서 보듯 구체적인 정책을 내놓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다. 대통령의 한마디 말처럼 그렇듯 단순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마련한 대책마다 만만치 않은 부작용이 따르는, 이른바 '풍선 효과'가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가 바로 우리나라 교육정책 아닌가.

"수업 시간 늘어난다고 한국사 공부 열심히 하게 될까요? 어차피 수능에 응시하지 않을 과목인데, 자습 시간이나 취침 시간이 느는 효과 밖에 없을 거예요. 그거 모르세요? 음악 시간에 영어 공부하고, 미술 시간에 수학 공부하며, 제2외국어 시간은 아예 잠자는 시간이라는 것. 해당 과목 선생님들도 못 본 척 눈감아 버리거든요. 수능 공부 배려한다는 차원이죠, 뭐."

단위 수 늘리는 것이 별반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어느 아이의 말이다. 그나마 집중이수제가 풀리는 것 정도가 수긍할 만하다고 말했다. 여전히 대학입시가 모든 교육과정을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하는 현실에서 수능 필수과목 지정만이, 아이들에게 역사 공부를 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거다.

현직 교사들의 반응은 더 차가운 편이다. 학벌 구조를 온존시키는 대학입시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백약이 무효'라는 것이다. 대학입시에 맞춰, 이른바 '보고용' 교육과정과 실제 '운영용' 교육과정을 별도로 운영하는 고등학교가 부지기수인 현실에서, 단위 수 한 시간 늘린다는 건 생색내기 대책일 뿐이라고 말한다.

한국사를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하자는 대통령의 제안에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꼼꼼하고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자칫 집단 이기주의에 휘둘려 정치적인 판단을 내리게 되면 '게도 잃고, 구럭도 잃는' 꼴이 될 것이다. 실효성을 감안하되, 무엇보다도 역사교육의 취지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이어야 한다.

수능 '도토리' 과목들이 시샘하는 건 볼썽사나운 일

수능 필수과목이 늘어나면 아이들의 학습 부담이 커진다는 일각의 주장은 언뜻 그럴 듯해 보이지만, 기실 설득력이 약하다. 현재 고3 수험생이 치러야 하는 수능 필수과목 수는, 서울대 응시자를 제외하면, '고작' 다섯 과목에 불과하다. 수능이 막 도입된 시기에 견줘 점차 줄어들었고, 필자가 치렀던 학력고사 시절에 견주면 과목 수가 절반도 안 된다.

과연 수험 과목 수가 축소된 만큼 요즘 아이들의 학습 부담이 줄어들었을까. 교사로 십수 년간 아이들과 만나고 있지만, 선뜻 그렇다고 답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아이들의 학습 부담은 수능 필수과목 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학벌 구조 속 '간판 경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한국사 공부할 시간에 영어나 수학을 보충, 심화 학습하느라 잠잘 시간 없기는 마찬가지다.

일부에서는 한국사가 수능 필수과목이 되면 사회탐구영역에서 분리되어 통합적 사고력을 평가한다는 수능의 취지를 훼손하게 될 것이라는, 다소 생뚱맞은 진단을 내놓고 있다. 통합적 사고력을 '인접' 교과목의 범주에 한정시키자는 말일까. 배움과 인식 속에서 영어와 한국사가 만나고, 국어와 도덕이 만나며, 수학과 미술이 만나는 것이 바로 통합적 사고력을 키우는 일이 아닐는지.

그런가 하면, 일부 사회탐구영역 관련 교과 교수와 교사들은 정부 차원의 고등학교 역사교육 강화 움직임에 대해 이렇게 반문하기도 한다.

"고등학교 사회탐구영역 교과목 가운데 유일하게 (교육과정 상) 필수과목으로 지정된 특혜를 누리고 있어 교과목 간 형평성에 어긋나며, 학생부의 내신 성적에 반영되기 때문에 (고등학교에서 한국사 교육은) 현재로도 충분하다."

지리와 경제, 도덕 등 사회탐구영역 내 다른 교과목의 반발은 어느 정도 예견된 바다. 다만, 국영수 중심의 교육과정 속에서 유사한 고충을 겪고 있는 '기타 과목'으로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대야 옳지, '특혜'와 '형평성' 운운하며 역사교육 강화 방안에 몽니를 부리는 건 누가 봐도 어리석은 짓이다.

사회탐구영역의 선택 과목 수가 줄어 찬밥 신세가 된 것이 한국사 때문은 아니잖은가. 도구 과목이라는 국영수의 지나친 비대화를 문제 삼기는커녕, 수능에 있어 '도토리' 과목들끼리 시샘하며 다투는 건 볼썽 사나운 일이다.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 앞에서, 자칫 교육현장이 밥그릇을 놓고 싸우는 이전투구의 장으로 비칠까 적잖이 두렵다.

수능 한국사 시험, 자격고사로 치러지는 게 바람직

과연 수험 과목 수가 축소된 만큼 요즘 아이들의 학습 부담이 줄어들었을까.
 과연 수험 과목 수가 축소된 만큼 요즘 아이들의 학습 부담이 줄어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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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 경력 16년차 교사로서 제안한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우선, 한국사 과목의 주당 수업시수가 한 시간 늘게 되면, 전체 수업시수가 늘지 않는 다음에야 어떻든 다른 교과목의 수업시수를 줄여야 한다. 하지만 더 이상 줄이기 어려운 '기타 과목'의 수업시수를 건드리기는 곤란하다. 과목마다 기껏 주당 한두 시간인데 뭘 더 줄일까.

그렇다면 국영수를 줄일 수밖에 없다. 과문한 탓인지, 일선 고등학교마다 정규수업 이외에 방과 후 수업이 별도로 진행되고 있다. 대개 방과 후 수업은 수능 필수과목인 국영수로 편재되어 다소 수업시수에 여유가 있는 편이다. 심지어 방학 때 실시되는 보충수업 역시 국영수 위주이니, 존재감이 없는 '기타 과목' 교사 입장에서는 부러울 지경이다.

아울러, 수능 한국사 시험은 이른바 '합불(合不)' 방식의 자격고사로 치러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가급적이면 역사교육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통합논술방식을 지향해야겠지만, 과도기적으로 문제은행식의 쉬운 선다형 시험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된다. 어떻든 자격고사 방식의 취지에 맞도록, 핵심은 '평이해야한다'는 점이다.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될 경우 예상되는 가장 큰 부작용이 바로 사교육이 들끓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현행 십수 종의 검인정 교과서가 모두 다루고 있는 부분을 출제하도록 명문화하고, 점수와 서열에 연연하지 않도록 자격고사화하면 준비하는 데에 학교 교육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점수에 따라 등급으로 세분화시켜 평가하려는 기존의 관행을 떨쳐내는 것이야말로, 사회에 대한 통찰력과 비판적 사고력을 키운다는 역사교육의 취지를 살리는 데에 크게 기여하리라 믿는다.

모든 이들을 만족시키는 '도깨비 방망이'는 없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학교에서 역사교육을 강화해야한다는 여론이 비등한 마당에, 이번만큼은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지 않도록 국민 모두가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태그:#역사교육 강화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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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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