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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점원 아가씨가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우리는 멋쩍어 점원 아가씨의 곁을 지나 옷을 둘러보았다.

"뭐 봐둔 옷이라도 있으세요?"
"네? 아, 아니오."

어느새 뒤에 나타난 점원 아가씨의 목소리에 아이는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그럼, 손님, 제가 권해드려도 될까요? 요즘은 주로…."
"아니오. 다른 데 좀 돌아보고 올게요."

갑자기 아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 팔을 잡아끌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아니 왜 그래? 저 브랜드 옷 중에서 마음에 드는 옷이 있다면서."
"아유, 나는 정말 저런 친절이 부담스러워. 그냥 손님이 마음대로 옷을 좀 볼 수 있게 놔두면 좋잖아요? 졸졸 따라다니면서 말을 붙이니 마음대로 볼 수가 없잖아요. 게다가 저렇게 웃고 있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다른 매장으로 가 봐요."

아이는 괜히 퉁퉁거렸다.

친절한 백화점 직원에게서 내 모습을 보다

주말 오후, 아이와 나는 오랜만에 함께 백화점에 갔다. 그동안 여름옷이 없다고 노래를 부르던 아이의 새옷을 사기 위해서였다. 어렸을 때는 내가 대충 사다주어도 좋아했는데 이제는 자기 마음에 드는 옷만을 고집하니, 티셔츠를 한 장 살 때도 아이와 함께 해야 한다. 더구나 이번에는 원피스를 사고 싶다니….

그러나 마냥 들떠있던 아이는 매장 직원 아가씨의 웃음이 부담스러워 옷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나와 버렸다. 하지만 다른 매장을 가 봐도 직원 아가씨들의 웃음과 관심은 아까 그 매장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고 자기가 바라던 옷을 찾지 못하자 아이는 은근히 짜증을 냈다.

"아, 다리 아프다. 엄마, 우리 여기서 잠깐 쉬어요."

우리는 통로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곳에서 바라보니 즐비하게 늘어선 매장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매장 앞에 서서 손님에게 웃음을 건네는 직원 아가씨들의 모습도. 문득 그 모습 속에서 내 젊은 시절의 한 순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교 때 내 모습을….

그때 나는 가구 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친구의 소개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다른 아르바이트보다는 돈을 많이 줬고 점심, 저녁을 제공해준다는 조건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여름방학 동안 해보고 괜찮으면 개강 후에도 주말이나 가게가 바쁠 때면 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구점 점원이니 특별히 몸을 쓸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손님이 오면 원하는 제품을 보여주고 파는 일이 쉬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이런 예상은 첫날부터 빗나갔다. 그것도 아주 많이.

손님이 없어도 절대 앉을 수 없다니...

그때 나는 실감했다. 돈을 번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그리고 그동안 백화점을 이용하면서 만난 점원들의 상냥한 웃음 뒤에는 그만큼의 노력이 숨어있다는 것도 말이다.
 그때 나는 실감했다. 돈을 번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그리고 그동안 백화점을 이용하면서 만난 점원들의 상냥한 웃음 뒤에는 그만큼의 노력이 숨어있다는 것도 말이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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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은 기본교육을 받았는데 고객에 응대에 대한 것이었다. 옷차림은 단정하게, 인사는 먼저 깍듯하게, 언제나 웃음 짓는 얼굴로, 손님이 만족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육을 받으면서도 별 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다음날,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모든 게 만만치 않았다.

나는 정직원이 아니라 유니폼 대신 일상복을 입었는데 옷은 치마로, 신발을 구두를 신어야 했다. 평소에는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는데… 치마를, 거기에 구두까지 신고 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몸이 불편해졌다. 게다가 손님이 없어도 자리에 앉을 수 가 없으니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쯤엔 다리가 퉁퉁 부어 신발에 발이 들어가지 않아 구두를 슬리퍼처럼 질질 끌고 가야했다.

더구나 원래 성격이 무뚝뚝한 편인 나는 점원 일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손님이 매장 문을 열고 들어와도 눈만 그를 쫓을 뿐, 손님이 불러야만 다가가서 안내를 해주곤 했다. 그런 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가구 매장 총 매니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불러 으름장을 놓았다.

"허허, 그렇게 해서 어디 의자 하나라도 팔겠어요? 손님이 이 층에 들어왔다는 것은 가구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고 그러면 반갑게 맞이해야지. 뚱하니 서서 손님을 바라보는 건 아니지. 그럴 거면 뭐하러 임금 주고 채용했겠어요? 아무리 아르바이트라 해도 그러면 되나? 손님이 점원의 웃는 얼굴을 봐야 안 사려던 물건도 사는 거예요. 교육시간에 뭘 들은 거야…."

그때 나는 실감했다. 돈을 번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그리고 그동안 백화점을 이용하면서 만난 점원들의 상냥한 웃음 뒤에는 그만큼의 노력이 숨어있다는 것도 말이다.

결국 나는 처음의 굳은 결심과는 달리 한 달을 겨우 채우고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었다. 몸도 힘들었지만, 무뚝뚝한 내 성격상 지나가는 고객을 손님으로 만들 자신이 없었다. 또 툭하면 사무실로 불려가 한바탕 연설을 듣는 것도 내 자신을 점점 더 작아지게 만들었다.

그 한 달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곳 직원들과 어느 정도 친분이 생기면서 그들의 웃음 속에 담겨 있는 노력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저녁이면 퉁퉁 부은 다리를 풀기 위해 잠을 잘 때 베개 위에 다리를 올린 채 자야 하고, 하루 종일 서 있다 보니 골반이 뒤틀리기도 한다. 때론 손님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기본이고 가끔은 욕도 듣는다. 뿐만 아니라 제품의 재고 파악이나 운반은 물론 진열상태도 일일이 점검해야 한다. 그러면서 매출이 떨어지면 모든 걸 자신의 탓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렇게 힘든 일들이 즐비하지만, 그들에게 그곳은 일터이자, 생활의 전부였다.

백화점 직원들의 잇단 자살, 이런 일 없었으면

그 후로 나는 백화점을 찾을 때면 직원들의 웃음을 잘 받아준다. 그리고 그들의 조언이나 친절에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가끔은 그들의 조언이 만족스런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최근 백화점 점원들이 자살하는 사건이 잇따랐다. 최근 보도된 기사에 따르면 한 백화점 직원은 과도한 업무와 고객으로 가장해 매장의 서비스나 청결 등을 점검하는 평가방식에 힘들어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타깝지만, 이제 더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으로 백화점 직원들이 마음 속으로도 웃을 수 있도록 근무조건이 많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일에 대한 자부심도 가질 수 있도록….

"얘, 아까 그 매장으로 가자. 그리고 너도 점원 입장에서 생각해 봐. 손님이 왔는데 그냥 뻘쭘하게 서 있는 것 보다는 무언가 도움이 되어주고 싶지 않겠니? 그리고 누가 알아?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예쁜 원피스를 사게 될지."  
"하긴, 그 점원 언니는 잘못이 없지. 그렇게 하는 게 일인데. 알았어요. 웃으면 복이 온다니까 어디 복을 찾으러 가볼까요?

아이의 너스레에 나는 웃음으로 답을 했다.

덧붙이는 글 | '웃다가 병든 사람들' 응모글



태그:#웃다가 병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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