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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는 28.1km. 산길은 평지와 다르다. 더 많이 걸어야한다.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는 28.1km. 산길은 평지와 다르다. 더 많이 걸어야한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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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 그르지 않다.

"비가 와도 가는 거다."

지리산 종주 계획을 잡을 때, 남편이 다짐하듯 한 말이다. 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비 맞고 한두 번 걸었어? 당연하지."

하지만 내심, 비가 오지 않기를 기대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걷는 거, 어지간하면 사양하고 싶다. 비만 맞는 거면 별로 상관없다. 문제는 온통 비에  다 젖는다는 거지.

비옷을 입으면 옷이 젖지 않는 줄 알지만, 여름에는 땀으로 범벅이 돼 다 젖는다. 하긴 여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도 걷다보면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을 수밖에 없다. 비옷을 입어도 땀으로 옷이 젖는 거야 그렇다고 치지만, 신발이 젖는 건 어쩔 수 없다. 고어텍스를 신으면 신발이 젖지 않는다고? 그거 순 뻥이다.

큰 비에 장사 없다고 바지가 젖어서 물이 줄줄 흐르는데 그 물이 어디로 가겠나? 게다가 길에는 물웅덩이가 생긴다. 물속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신발이 안 젖기를 바라는 건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어텍스 신발은 잘 마르지 않는다. 쩝.

배낭에 방수커버를 씌워도 폭우라면 배낭이 젖는 걸 막을 수 없다. 배낭이 젖지 않게 하기 위해 아예 판초우의를 입긴 하지만, 것도 꼭 좋기만 한 건 아니다. 걷다가 쉬려면 배낭을 내려놔야 하는데 판초우의 벗고 배낭 내려놓고, 이런 과정을 거치려면 귀찮다. 내려놓은 배낭은 당연히 비를 맞아 젖을 것이고.

이리 보아도 먹구름, 저리 보아도 먹구름. 이 구름이 죄다 비가 되었고, 걸으면서 흠뻑 젖었다.
 이리 보아도 먹구름, 저리 보아도 먹구름. 이 구름이 죄다 비가 되었고, 걸으면서 흠뻑 젖었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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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종주 일정을 확정하면서 비가 내리기 않기를 기원했건만 하필이면 지리산으로 떠날 즈음, 장맛비 소식이 계속 이어졌다. 이미 숙소는 예약이 완료된 상태. 지리산으로 몰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을 예상, 첫 숙박일을 일요일로 잡았다. 예정은 지리산에서 3박4일을 지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7일 새벽에 성삼재로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5일에 지리산은 호우로 인해 입산금지가 되었다. 이런, 비가 문제가 아니라 아예 산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6일, 입산금지는 해제되었다. 하지만 7일에는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하늘에서 하는 일을 인간이 어떻게 알겠나. 산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허탕을 칠 수도 있다. 그래도 배낭을 꾸렸다.

지리산 종주는 5년만이다. 지난 2008년에 종주했다. 그때도 7월이었다. 그때는 동생도 같이 갔는데 이번에는 남편과 단 둘이다. 그때 일정은 2박3일이었는데, 이번 계획은 3박4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일정은 2박3일로 줄었다.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기 때문에, 일정을 줄이고 그냥 내려왔다.

나는 32리터짜리 배낭을, 남편은 38리터짜리 배낭을 꾸렸다. 배낭 안에 먼저 대형 비닐봉지를 넣고 그 안에 젖어서는 안 되는 옷가지와 수건 등을 넣었다. 배낭에 아무리 방수커버를 씌워도 폭우라면 죄다 젖을 수 있다는 것은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다. 그러니 비닐을 이용, 원천적으로 물이 스며드는 걸 막아야했다. 덕분에 걷는 동안 온몸이 비와 땀에 푹 젖었지만, 밤에 대피소에서 잘 때는 뽀송뽀송한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부피가 나가는 건 내 배낭에, 무게가 나가는 건 죄다 남편의 배낭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남편은 '포터'로 손색이 없었다. 무게는 재지 않았지만 4일간 먹을 양식에 코펠과 버너, 연료 그리고 기타 등등이 죄다 남편의 배낭 안으로 들어갔던 것.

저 정도라면 안나푸르나도 포터 없이 트레킹이 가능할 것 같다. 나중에 스페인 산티아고에 갈 때 꼭 같이 가자고 꼬드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포터에 보디가드에 요리사까지 겸할 수 있으므로 꼭 필요한 존재가 될 것이다. 흐흐.

종주를 끝내고 다시 돌아온 성삼재 대피소. 언제 비가 내렸느냐 싶게 말짱하다.
 종주를 끝내고 다시 돌아온 성삼재 대피소. 언제 비가 내렸느냐 싶게 말짱하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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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계획은 이랬다. 자동차를 타고 성삼재휴게소로 가서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첫날은 연하천대피소에서 자고, 이튿날은 장터목에서 잔다. 그리고 걸었던 길을 되짚어 다시 연하천으로 돌아와 하룻밤을 더 잔다. 그리고 성삼재로 내려온다. 하지만 우리는 장터목에서 백무동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고, 백무동에서 택시를 타고 성삼재로 돌아갔다. 지리산을 걷는 동안 3박4일 일정을 2박3일 일정으로 바꾼 것이다.

하긴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남편은 새벽 2시에 집에서 출발하겠다고 했다. 성삼재까지는 4~5시간 정도 걸린다고 치고, 새벽 7시쯤 성삼재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우리는 새벽 6시가 임박할 때까지 깨지 못했고, 6시 15분에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그뿐인가. 잠이 부족한 남편은 운전하다 졸리자 이인휴게소에서 두어 시간 더 잤다.

출발할 때, 하늘은 말짱했지만 이인휴게소에 도착할 즈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리가 성삼재에 도착했을 때 빗줄기는 굵어져 있었다. 다행히 입산통제는 없었다. 되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비가 내리는데도 성삼재를 찾은 사람들은 예상보다 많았다.

성삼재 주차장에서 비옷을 입고, 묵직한 배낭을 멨다. 이거, 생각보다 무거운데 이걸 지고 제대로 걸을 수 있을까? 짧은 순간, 그런 생각을 했지만 내 배낭보다 갑절 이상은 무거운 남편의 배낭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출발이다. 첫 걸음을 내딛었으니, 이제는 중단 없는 전진만 있을 따름이다. 오늘밤, 우리는 연하천대피소에서 잘 것이다.

오랜만에, 묵직한 배낭을 지고 찾은 지리산에는, 추적추적 배가 내렸다. 빗줄기는 우리가 노고단 대피소에 닿을 때쯤 더 굵어졌다. 노고단 대피소 취사장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비에 푹 젖은 이들의 몸에서는 연기 같은 김이 피어오른다.

성삼재까지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해 식욕이 없어 아침을 걸렀다. 노고단대피소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어야했다. 그래야 배낭 무게가 조금이라도 줄 것이고, 걸을 기운이 날 것이다. 라면 2개를 끓여 새벽에 전자레인지에 데워 가져온 햇반을 꺼내 같이 먹었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뜨거운 국물이 좋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뜨거운 국물이 좋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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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때문에 노고단대피소에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비를 피할 곳이 이곳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식사를 마친 뒤, 배낭을 꾸려 노고단대피소를 나섰다. 빗줄기는 노고단대피소 안으로 들어갈 때보다 더 굵어져 있었다.

비 때문에 노고단은 안개가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몇 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안개. 머리까지 뒤집어쓴 비옷 때문에 빗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에효, 그렇게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랐건만, 아예 쏟아 붓는구나.

성삼재에서 연하천대피소까지 내가 확인한 거리는 12.78km. 소요시간은 7시간. 하지만 걷다보면 최소한 한 시간 이상은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한 시간쯤 걸려서 노고단대피소로 왔으니 앞으로 6~7시간을 걸어야 하리라.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야 걱정할 게 없지만, 문제는 비였다.

비는 좁은 산길 군데군데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바위가 많거나 가파른 곳에서는 물이 줄줄 흘러내리기도 했다. 그런 길을 걷다보니 등산화가 조금씩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양말이 푹 젖었다. 발목이 푹 잠기는 물웅덩이에 그대로 발을 내딛기도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걷고 또 걸었다. 가끔은 걷기 좋은 오솔길이 나오기도 했지만 대부분 바위로 이뤄진 길이었다.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길은 묵묵히 불평 없이 걷기를 원한다. 빗줄기는 굵어졌다 가늘어지기를 반복했다. 가끔은 비가 그친 것 같아 하늘을 올려다보면 검은 구름이 잔뜩 도사리고 있기도 했다.

걷고 또 걸었다. 배낭은 허리받침대를 잔뜩 졸라맸더니 무게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어깨가 아닌 몸이 배낭의 무게를 온전하게 받쳐주고 있었던 것. 다행이다. 배낭이 어깨를 누르면 힘들어서 걸음을 옮기기 어려웠으리라. 배낭을 내려놓고 쉬다가 다시 배낭을 메면 배낭의 무게에 몸이 휘기도 했다.

비가 내리는데다가 바람도 불었다. 가끔은 바위 위를 기어 올라갔다가 부는 바람에 몸이 휘청거리기도 했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아마도 자주 멈춰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비 때문에 카메라를 비닐로 잘 싸서 메고 다녔다. 한데 비닐로 빗물이 잔뜩 스며들었고, 카메라는 그만 기능을 멈추고 말았다. 이런, 우라질리아. 아예 배낭에 넣었어야 하는 건데, 혹시라도 사진을 찍을까 싶어서 메고 다녔다가 낭패를 보고야 말았다.

스마트폰인 핸드폰은 비닐로 단단히 싸서 물이 스며들지 않게 했다. 예전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별 생각 없이 배낭에 매달고 가다가 완전히 맛이 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핸드폰으로 쉬면서 주변 풍경을 찍어 몇 장의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임걸령을 지나고, 노루목을 지났다. 빗물에 푹 젖은 등산화 덕분에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발이 푹 젖은 양말 속에서, 등산화 속에서 팅팅 불어터지고 있었다. 이럴 때 신발의 무게는 얼마나 나가는 것일까? 그뿐인가, 배낭도 푹 젖었다. 물에 푹 젖은 솜을 지고 가는 노새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걸음을 멈출 수야 없지.

성삼재 휴게소에소 본 하늘에는 비를 머금은 구름이 잔뜩 끼었다. 저게 죄다 비가 돼서 쏟아졌다.
 성삼재 휴게소에소 본 하늘에는 비를 머금은 구름이 잔뜩 끼었다. 저게 죄다 비가 돼서 쏟아졌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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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배낭보다 두 배 이상은 족히 무게가 나가는 배낭을 진 남편은 앞서가고 있었고, 아예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내가 없다면 성삼재에서 장터목까지 하루에 다 가고도 남을 만큼 빠르게 잘 걷는다. 체력도 그만큼 빵빵하다. 나 때문에 가다가 멈추고, 또 멈추면서 기다려준다.

노고단대피소는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연하천으로 가는 길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단 한 사람도 나를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 이러다가 연하천대피소에서 남편과 나만 자게 되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을 만난 건 화개재에서였다. 먼저 도착해 배낭을 내려놓고 쉬던 남편이 나를 불렀다. 남편은 한 남자와 같이 있었다. 남자 역시 커다란 배낭을 내려놓은 채 쉬고 있었다. 그는 뱀사골에서 올라왔단다. 새벽에 기차로 서울에서 남원역까지 왔고, 그곳에서 택시를 타고 뱀사골로 온 그는 입산을 통제하는데 막무가내로 우겨서 올라왔다고 했다. 그것도 홀로.

그대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워서. 시간과 돈이 아까웠으리라. 뱀사골은 아마도 계곡이라 물이 불어나면 위험하기 때문에 통제를 했을 것으로 짐작했다. 그는 말했다. 일행이 기다리기 때문에 꼭 올라가야 한다고 우겼다고.

홀로 왔지만, 그는 화개재부터는 우리와 일행이 됐다. 그가 지리산국립공원 직원에게 말한 일행이 바로 우리였던 셈이다. 인연이란 기다리지 않아도, 기대하지 않아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어진다. 그와 우리의 인연이 그랬다.

화개재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우리가 그와 함께 같은 대피소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같이 하면서 산행을 같이 할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먼저 도착한 대피소에서 그가 도착하기를 기다릴 것이라는 짐작은 전혀 하지 못했다.

화개재에서 그가 먼저 출발했다. 배낭이 무거워보였지만, 우리 배낭 무게도 장난이 아니니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임걸령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잦아들었던 비가 화개재를 출발하면서 작정했다는 듯이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니 더위가 느껴지지 않아서 좋았다. 그만큼 걷기가 수월한 측면도 있다. 갈증이 덜 느껴지므로 물을 덜 마시게 된다. 그렇다고 땀을 덜 흘리는 것 같지 않았지만.


태그:#지리산, #화개재, #성삼새, #연하천, #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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