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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에 젖은 연하천대피소.
 안개에 젖은 연하천대피소.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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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묵직했다. 정말이지 빡세게 걸었다. 빗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계곡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는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나무들이 몸이 무겁게 흔들었다. 길의 흙은 푹 불어서 질척거렸고, 바위나 돌은 푹 젖어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미끄러질까봐 바위나 돌 위를 걸을 때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넘어지거나 엎어지거나 해서 다치면 나만 손해니까.

연하천대피소로 가는 길. 남편은 길 위에서 사라졌다. 숲에는 나만 남았다. 탐방로가 아닌 곳에는 줄이 쳐져 있거나 곰을 조심하라는 작은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가끔은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혹시나 반달곰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해서.

지리산에 반달곰이 27마리인가 살고 있다는 얘기는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하룻밤을 묵은 구례둘레길 게스트하우스 쥔장 우두성씨에게 들었다. 지리산이 넓고 깊다지만 27마리씩이나 곰이 산다면 곰과 마주칠 가능성은 상당히 높으리라.

다행인지 혹은 불행인지 지리산을 걷는 동안 반달곰은 발뒤꿈치도 보지 못했다. 절대로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곰과 마주쳐서 슬기롭게(?) 대처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비가 쏟아지는 숲길을 홀로 걷는 기분은 좋았지만, 입을 잔뜩 벌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면서 울부짖는 곰 얼굴이 그려진 펼침막을 보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남편은 이따금 멈춰서 뒤를 따라가는 나를 확인했다.

연하천에 도착한 것은 7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세상이 온통 컴컴해지기 전이었다. 화개재에서 우리보다 먼저 출발했던 한형보다 내가 먼저 도착했다. 한형은 화개재에서 우연히 만난 홀로 산행자다. 화개재에서 배낭을 메고 기운차게 출발하기에 아주 잘 걷는 '프로'인 줄 알았더니, 한형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못했다. 결국 내가 그를 지나치는 순간이 왔고, 그는 뒤로 처지고 말았던 것.

7일 밤, 연하천대피소에서 묵은 사람은 우리와 한형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우리가 연하천을 숙소로 택한 이유는 '물'이었다. 지리산에서 가장 물이 풍족한 대피소가 바로 연하천이다. 숙소에서 멀리 가지 않아도 물이 퀄퀄 쏟아지는 샘이 있다. 물이 많다고 해도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연하천대피소에서도 다른 대피소와 마찬가지로 세제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칫솔질도 치약 없이 해라, 설거지 하지 마라, 쓰레기는 되가져 가라 하는 제약이 뒤따른다.

환경을 보호하고 오염을 막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산 속에서 며칠을 보내야하는 상황에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코펠을 닦지 않으면 계속해서 취사를 어떻게 하라는 얘기인 건지, 원. 우리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밀가루를 세제 대신 사용하지만 말이다.

덕분에 지리산에 있는 사흘 동안 비를 흠뻑 맞고 땀을 잔뜩 흘리고도 씻지 않은 채 게으름(?)을 피웠다. 비에 젖은 옷을 밤새 대피소 안에서 말리고 그 옷을 다시 입기도 했다. 땀냄새가 발꼬랑내와 비슷하더라.

지리산
 지리산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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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천대피소에서는 밤에 라디에이터로 난방을 한다. 거기에 푹 젖은 양말과 팔토시, 모자, 손수건을 걸어서 말렸다. 양말은 다음 날 아침 바짝 말랐다. 중부지역은 폭염에 열대야가 기승이라는데 지리산의 밤은 열기 대신 한기를 푹푹 뿜어내고 있었다. 담요와 깔판을 각각 1장에 2000원씩 주고 빌렸는데, 담요 한 장을 덮고 자려니 밤에 으슬으슬 추워 자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걷기로 고생한 내 발, 이번에 물어 불어서 고생이네

우리는 연하천대피소에서 다시 만난 한형과 같이 저녁을 먹었다. 한형은 가져온 햇반을 데웠고, 남편은 밥을 하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부터 취사를 따로 하지 않고 같이 해서 먹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일행이 되었다.

대피소에서 자리를 배정받았다. 어차피 잘 사람은 우리 셋밖에 없으니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대피소는 이층이었는데, 남자는 1층에, 여자는 2층으로 자리를 정해주었다. 남편과 나는 부부니까 같이 자면 안 되느냐고 직원에게 물었더니 한 마디로 안 된단다.

월요일인 8일, 우리는 장터목대피소까지 갈 예정이었다. 연하천대피소에서 장터목대피소까지 거리는 12.7km, 소요예상시간 역시 7시간이었다. 그 정도라면 느긋하게 갈 수 있다는 게 남편의 생각이었다. 천천히 일어나서 천천히 출발하자는 거였다.

그러나 산길은 평지가 아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으며, 바위가 잔뜩 뭉쳐져 올라가거나 내려가기 어려운 곳도 많았다. 미끄러질까봐 엉금엉금 기어야하는 곳도 있었고.

연하천에서 벽소령으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고, 세석에서 장터목으로 가는 길 역시 걷기 쉬운 길은 아니었다. 비까지 제대로 퍼부어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게다가 숙소를 비워줘야 하는 시간이 오전 8시란다. 하룻밤 잘 잤으면 빨리 빨리 일어나서 나가라는 얘기인가 보다.

비는 밤새도록 그치지 않고 내렸다. 비만 내리나, 바람도 더불어 같이 세차게 불었다. 밤새도록 빗소리에 바람소리가 섞여 들렸다. 그뿐인가, 물이 흐르는 소리도 함께 뒤섞여 아예 합창을 했다. 아침에는 비가 그치겠지, 하는 가냘픈 기대를 했지만 아침식사를 마치고 배낭을 다시 꾸려 길 위로 나설 때까지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나마 빗줄기가 가늘어진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가끔은 이렇게 맑은 듯이 보일 때도 있었다.
 가끔은 이렇게 맑은 듯이 보일 때도 있었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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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하기 전,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연하천대피소 취사장이 시끌벅적해졌다. 건장한 다섯 남자가 출현했던 것이다. 이들은 노고단에서 이른 아침에 출발했단다. 남자가 다섯이라는 것 외에는 그들의 인상착의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럴 만한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고. 이들의 목적지도 우리처럼 장터목대피소였다.

우리는 이틀에 나눠서 가는 길을 이들은 단 하루 만에 간다는 거였다. 대단한 남자들이었다. 이들은 대피소에 잠시 들렀다가 떠나갔고, 우리도 출발했다. 한형 역시 출발했다.

어제 걸으면서 푹 젖은 등산화는 여전히 푹 젖은 상태였다. 라디에이터 밑에다 엎어 놓았지만 물기는 거의 빠지지 않았다. 양말은 바싹 말랐지만. 마른 양말을 신고 등산화를 신었다. 뽀송뽀송한 양말이 물에 젖은 빨래가 되는 데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늘도 내 발은 종일 불어터지겠구나. 주인 잘못 만난 발은 이래저래 고생이다. 걸어서 고생이요, 물에 불어터져서 고생이로다.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걸은 산, 제대로 느꼈다

바람이 어제보다 거세졌다. 연하천대피소 부근의 나무들이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연하천대피소를 감싸 안았던 안개들이 한꺼번에 밀려났다. 바람에 밀려온 안개가 빈자리를 차지하면서 시야를 뿌옇게 흐린다.

연하천대피소를 떠날 때 내일 밤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일정을 바꾸는 바람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지 않는다. 지리산 종주를 하면서 연하천대피소에서 잔 게 이번이 세 번째였던 것이다.

연하천에서 벽소령대피소까지 3.6km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단다. 정말 2시간에 갈 수 있을까? 물에 푹 젖은 등산화는 무거웠고, 밤새 마르지 않은 배낭 역시 무거웠다. 내 짐은 무게가 줄어들 가능성이 별로 없었다. 식량이나 연료는 죄다 남편 배낭 안에 있었으므로. 비에 젖어 쓸모가 사라진 카메라 역시 남편 배낭 안으로 들어갔다.

연하천 주변 풍경. 안개가 바다를 이룬다.
 연하천 주변 풍경. 안개가 바다를 이룬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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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산행에 비닐봉지와 비닐 백을 많이 챙겨왔더니 상당한 쓸모가 있었다. 비에 젖으면 안 되는 것들을 비닐봉지에 넣고 꽁꽁 싸맸던 것이다. 특히 핸드폰은 비닐봉지가 필수였다. 예민한 전자기기들은 습기에 아주 약하기 때문이다. 비닐봉지에 담은 핸드폰을 배낭에 아예 꾹 질러 넣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고 나대다가 그나마 핸드폰까지 사망해버리면 아주 낭패일 것 같아서. 덕분에 이날, 사진은 거의 찍지 못했다.

대신 걷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오로지 걷기에만 온 정신을 쏟았다. 이런 적은 거의 없었다. 길을 걷다가 멈춰 사진을 찍고 다시 걷기를 늘 반복했는데, 이번 지리산 종주에 사진 찍기 항목은 없었다. 그래서 무척이나 자유로웠다.

우리를 앞서 지나쳐간 다섯 남자 외에는 벽소령대피소에 도착할 때까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비는 주룩주룩 내렸고,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남편은 저만치 앞서 가면서 모습을 감췄고, 나는 천천히 내 페이스대로 걸었다. 시속 4km쯤 되려나. 하지만 산길은 평지와 거리를 환산하는 방법이 다르다. 한 시간은 족히 걸은 것 같은데 2km도 채 걷기 못했다고 이정표가 알려주니 말이다.

걷기 좋은 숲길은 짧았고, 바위로 가로막힌 길은 넘어가면 나타나고 넘어가면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돌계단 길도 많았다. 허위허위 숨을 몰아쉬면서 돌계단을 오르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비는 물줄기가 되어 길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지리산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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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덮인 길은 가끔은 몇 미터 앞조차 분간하지 못하게 했고, 가끔은 뒤에서 누군가가 쫓아오는 듯한 기척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야 했다. 언제부터, 어느 지점에서 내가 한형을 앞서 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무거운 배낭의 무게에 눌린 듯 한형은 천천히 걸었다. 자신의 페이스대로 걷는 게 가장 좋다. 누군가를 따라잡으려고 혹은 앞지르려고 속도를 내다가는 지레 지친다.

벽소령대피소 취사장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이른 점심을 먹고 가야했다. 벽소령에서 세석대피소까지의 거리는 6.3km로 3시간30분 이상 걸리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는데 길 위에서 밥을 먹는 건 거의 불가능하고.

취사장 안이 떠들썩해서 보니 우리를 앞질러 갔던 다섯 남자였다. 그들은 벽소령대피소에서 점심을 해먹고 막 떠나려던 참이었다. 장터목에서 만나자, 는 말을 남기고 그들은 떠나갔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서 우리는 라면을 끓였다. 산에서 꼭 필요한 비상식량은 라면이다. 라면을 발명한 자, 복 받을지어다.

라면에 아침에 먹다 남은 찬밥을 같이 먹었다. 자연스럽게 우리와 일행이 된 한형과 함께. 뜨거운 라면국물이 국이나 찌개를 대신한다. 커피까지 끓여 마신 뒤, 우리는 출발했다. 커피는 한형이 끓였다.

세석대피소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아니, 장터목대피소까지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예상소요시간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리고 있었다. 그만큼 걸음이 더뎌졌다. 비 때문이다. 벽소령을 출발할 때 비는 그쳐 있었다. 그렇다고 젖은 길이 마르는 건 아니다. 길 위에 만들어진 물웅덩이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흙길은 질척거리는 진흙탕이 되었다. 바위나 돌은 여전히 물기를 잔뜩 머금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에 힘을 주어야한다. 주저앉는 건 괜찮지만 바위에 올랐다가 미끄러져 떨어지거나 넘어지면 다칠 수 있다. 산속에서 다치는 건 민폐다.

길 위에 다시 혼자 남았다. 남편은 앞서 갔고, 한형은 뒤로 처졌다. 나는 묵묵히 걷고 또 걸었다. 안개가 자욱한 풀숲에서 반달곰이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탐방로 곳곳에 매달아둔 곰이 그려진 펼침막 때문이었다. 유난히 송곳니가 두드러져 보이는 입 벌린 곰 얼굴은 흉악스러워 보였다. 저런 얼굴을 한 반달곰을 만나는 건 그야말로 엄청난 횡액이리라.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오른손에 든 스틱으로 바위를 힘껏 내리치면서 소리를 만들어냈다.

라면을 개발한 자, 복받을 지어다

지리산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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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여전히 거셌다. 바위 위로 올라갔다가 거센 바람을 만나 온몸이 휘청거렸다. 그대로 바위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허리를 숙여 균형을 잡았다.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탁한 비명을 쏟아냈다. 바람에 흔들린 나뭇잎들이 일시에 물기를 털어냈다. 비가 그쳤어도 나뭇잎들이 털어내는 물기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비가 그치자 비옷을 벗어 배낭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서늘한 기운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서늘하게 식혀준다. 하지만 오르막길을 걷다보면 다시 땀이 흐른다. 고개를 숙이고 걷다보면 이마에서 물방울이 뚝뚝 길 위로 떨어진다. 땀이다. 지리산 길 곳곳에 내 땀방울이 바느질 땀처럼 스며들어 있으리라.

벽소령대피소를 출발하면서 세석대피소에 도착하면 음료수를 하나 사서 마시리라 작정했다. 하지만 마시지 못했다. 나보다 앞서 간 남편이 세석에서 기다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없었던 것이다. 세석대피소의 직원이 창문 앞에 붙어 서서 장터목대피소를 예약했느냐고 묻더니 "남자 분이 먼저 간다고 전해 달랬다"고 알려주었다.

세석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4시 반경이었으니, 부지런히 걸어야 장터목대피소에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때문에 남편은 먼저 도착해서 저녁을 준비할 생각으로 걸음을 서둘렀을 게다.

세석에서 느긋하게 쉬려던 생각을 접었다. 그냥 가자. 음료수는? 장터목에서 사먹으면 되지. 그래서 걸음을 재촉했다. 세석대피소를 떠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에서 오고 있는 한형은 언제쯤에나 세석에 도착하려나? 너무 늦으면 장터목으로 못 오는 거나 아닐까?

세석대피소를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세석에서 장터목까지는 3.4km, 예상 소요시간 2시간. 하지만 내가 걷는 속도로 2시간 안에 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지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걸음을 옮기는데 다리가 무거웠다. 세석에서 쉬고 더 가지 않으면 딱 좋으련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오늘밤 내가 지친 몸을 뉘일 곳은 장터목대피소였다. 거기까지 가야 한다.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태그:#지리산, #도보여행, #연하천대피소, #벽소령, #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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