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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박통(박정희 전 대통령)'을 생각해서라도 박근혜 찍어야지!"

지난 대선 때 칠순의 노모께서 하신 말씀이다. 비록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셨지만, 그렇다고 선거 때만 되면 무조건 '1번'을 찍는 그런 분은 아니다. 돋보기를 낀 채 배달된 선거 홍보물을 챙겨보시고, 자식들 앞에서 "요즘 사람들 당최 선거에 무관심하다"며 후보자들의 공약에 대한 당신 나름의 평가를 내리시곤 했다.

그런데 지난 대선 때만큼은 아니었다. 그가 내놓은 공약이 무엇인지, 당선되면 지역에 어떤 도움이 될 것인지, 다른 후보와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도통 관심이 없으셨다. 오로지 '박통'의 따님이시니, 보고 말고 할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당신과 또래의 어르신들에게 '박통'은 불세출의 영웅이셨다.

그런 어르신들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민주주의를 파괴한 독재자라며 비판하고 설득하려는 건 무망한 짓이다. 젊었을 적 단 한 번도 그의 과오에 대해 듣거나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박통'은 우리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열정적인' 정치인이었고, 촌로들과 모내기 후에 막걸리를 함께 나누는 '소탈한' 사람이었으며, 아내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상한' 남편이었다. 그의 이름은 '대통령'과 차라리 동의어였다.

독재 정권에 맞서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죽어갔지만, 모든 잘못과 책임은 외려 그들에게 있다고 믿었다. '열정적이고, 소탈하고, 자상한' 대통령에게 맞서는 건 '불충'이자 '불효'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집권한 18년간, 국민들에게, 그는 어쩌면 대통령이 아닌 '임금님'이었다. 부하의 총에 맞아 죽고, 국장이 치러졌을 때 노모께서는 펑펑 우셨고, '국민학생'이었던 나도 영문도 모른 채 흐느껴야 했다.

"이만큼 먹고 살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보릿고개를 겪어본 사람들이라면 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자라며 욕하진 못할 거다."

노모께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언젠가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따님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출마했으니 아무런 고민 없이 찍은 것이다.

이 땅의 어르신들에게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바타'다. 노모는 '결혼하지 않아 딸린 가족이 없으니 사심 없이 정치를 할 테고, 아빠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우리를 잘 살게 해줄 것'이라며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이미지'는 3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대를 이어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적어도 그분들에게 지난 대선은 해보나마나였는지도 모른다.

어르신들에게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바타'

조갑제닷컴에서 전국 고등학교에 대선이 끝나자마자 '무료 기증'했다.
▲ 서가 한쪽에 꽂힌 <박정희> 조갑제닷컴에서 전국 고등학교에 대선이 끝나자마자 '무료 기증'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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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보릿고개를 겪기는커녕 그 말 자체를 낯설어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언론 등을 통해 각인된 대로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걸 떠올리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그보다는 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미지가 훨씬 더 강력하다.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당선되었다는 건 아이들에게조차도 '상식'이다. 이 점에서만 보면, 어르신들과 아이들의 인식이 일치한다.

다만, 국가의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으로서 어르신들이 '아버지와 닮은 딸'이 되길 바라는 것과는 달리, 젊은이들은 '아버지와 별개인 딸'로 자리매김 되기를 바라는 점이 다르다. 그런데도 '제2의 새마을운동'과 '잘 살아보세' 운운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방식이 젊은이들이 느끼기엔 촌스럽고 생뚱맞다.

느닷없이 서울 한복판에 혈세를 부어 박정희 기념공원을 조성한다며 아우성이고, 일부 대학에서는 정권의 눈치를 살피며 '창조경제학과'를 신설할 계획이라고, 또 어느 곳에서는 박정희정책대학원을 설립하는 문제로 벌집 쑤신 듯 시끄럽다. 그런가 하면 전국 초중고 학생들에게 박정희 특별전시회에 참여를 독려하는 공문을 일선 학교에 뿌리기도 했다.

대선이 끝나고 불과 몇 개월 만에 '박정희'는 완벽하게 부활했다. 이미 교과서에 실려 역사적 평가가 끝난 인물이지만, 최근 다시 좀비처럼 되살아나 '현재'를 호령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실은 '우상화'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88서울올림픽조차 아주 오래 전 '역사'로 여기는 아이들에게, 그의 독재가 우리 현대사에 미친 엄청난 해악을 왜곡하고, 제대로 공부할 기회를 박탈할 우려가 크다.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되자마자 올해 1월 초에 기증된 책이 있다. 조갑제닷컴에서 출간된, 총 13권짜리 <박정희>였다.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주변 세 학교 도서관 사서선생님께도 물어보니, 모두가 기증요청을 하기는커녕 '제목조차 처음 안' 책이라고 했다. 당시 우리 학교 사서선생님은, 누가 기증했는지도 알 수 없이 그저 택배기사가 말 없이 놓고 간 상자 속에 들어 있었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필자는 그 뒤 3월부터 도서관 업무 담당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기증된 책은 기증자의 이름과 취지, 기증 시기를 적은 속지를 덧붙이고, 라벨을 달아 서가에 비치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책은 아직 그렇게 하질 못했다. 당시 사서선생님도, 기증도서이긴 하지만 좀 '찝찝'해서 기증도서분류를 미뤄두었다고 한다.

2007년에 출간된, 5년도 더 지난 책을 무료로 기증하는 것은 너무나 속 보이는 짓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딸이 대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으니, 박정희 전 대통령의 '복권'과 '우상화'를 시간문제로 본 것일까. 책을 받아든 순간, 얼마 안 있어 교과서의 기존 서술조차 뒤집힐 날이 머지 않았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하긴 그것을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치의 계절에는 이른바 '알아서 기는' 부류가 늘 있기 마련이다. 이른바 '측근'들에 의해 방송에서, 신문에서, 인터넷에서, 공문에서 심심치 않게 그 이름이 등장하더니, 급기야 학교 도서관에 뜬금없는 책을 보내 '난세의 영웅' 박정희를 아이들의 뇌리에 심어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에 기증된 '박정희 전기'... "이건 '일베충'의 교과서"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은 박정희의 완벽한 '부활'의 신호탄이었다. 책의 표지에 실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소탈한' 모습.
▲ 박정희의 완벽한 '부활'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은 박정희의 완벽한 '부활'의 신호탄이었다. 책의 표지에 실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소탈한' 모습.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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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찾았는지, 한 아이가 서가 한 구석에 따로 보관 중인 그 책을 빼들었다. 교실보다 도서관을, 문제집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아이다. 대충 훑어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역시 승리한 자에게는 진실에 관해 캐물을 수 없게 된다더니, 이제 곧 네모를 동그라미로 우겨도 믿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이건 '일베충'의 교과서 같군요."

독일의 선전 장관 괴벨스의 궤변을 인용하며, 이런 책도 도서관에 비치돼 있냐고 반문했다. 책에 적힌 용어 하나하나가 너무나 낯설다고 했다. 정변을 혁명으로 부르는 것이야 하도 많이 들어 그렇다 해도, '10월 유신'을 구국의 결단이라고 표현하고, 한일 굴욕외교를 반대하는 학생들에게 철부지라 조롱하며, 베트남 전쟁 참전을 두고 국위를 선양하는 시대가 개막됐다고 표현하는 것이 대체 말이나 되는 얘기냐며 어이없어 했다.

더러 이런 '머리 굵은' 아이도 있지만, 대개는 우리 역사에 대해 아예 '까막눈'이다. 교과서 맨 뒤쪽에 나오는 현대사임에랴. 지금까지 역사학의 연구 성과와 정설을 전면 부정하는 그러한 책은 '백지 상태'의 아이들에게 혼란만 부추긴다. '백년지대계' 학교교육이 정치권력에 입맛에 따라 좌우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범죄행위다.

우리 아이들의 역사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대통령의 주장에는 백 번 천 번 공감하면서도, 그것이 지금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방식과 취지라면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 자칫 이러다 '혁명 공약'과 '국민교육헌장'을 다시 외워야 하는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과연 박근혜 대통령이 꿈꾸고 바라는 역사교육이 앞서 칠순 노모와 같은 인식을 공유하는 사람을 길러내기 위한 것일까. 그것이 진정 '애국'이고 '국민 통합'이라고 여기는 걸까. 고등학생들조차 묻고 있다. 오로지 아버지를 '부활'시키려고 온갖 가시밭길 헤치고 대통령이 되셨느냐고. 그렇다면 현 대통령은 박근혜인가, 박정희인가.


태그:#조갑제닷컴,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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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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