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는 <구지가>의 고향이다. 나라 안에서 가장 오래된 집단 노동요로 여겨지는 구지가를 '처음 듣는다'고 반응할 국민은 아마 드물 것이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는 단 네 줄의 이 한역 주술 고대가요는 그만큼 유명하다.
구지가가 처음 불려진 곳은 구지봉이다. 구지봉은 수로왕비 허황옥의 묘소 바로 왼쪽에 있는 낮으막한 봉우리로, 삼국시대의 산성 흔적이 남아 있는 분산의 끝자락 지점이다. 하지만 분산 자체가 해발 360m에 지나지 않으므로 구지봉의 높이야 따져볼 일도 없다. 구지봉은, 도시화 탓이겠지만 거의 평지에 있는 듯 느껴지는 수로왕비릉에서 높낮이를 느낄 수 없을 만큼 편편한 오솔길을 200m가량 수평으로 걸으면 금세 닿는 자리에 있다.
김해를 상징하는 노래 <구지가>물론 구지봉이 지금처럼 유명해진 데에는 교과서가 한몫을 했다. 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대통령까지 나서서 대학입학수능시험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면 된다고 하는 대한민국에서, 중앙정부가 발행하는 '국정' 국어교과서에 줄곧 언급되고 본문이 실렸으니 지명도를 얻지 못했다면 오히려 이상할 터이다. 당연히 젊은이들도 구지봉 이름에 아주 익숙하다.
구지가만큼 젊은이들의 기억을 장악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김해가 낳은 유명한 노래 제목을 한 가지 더 들라면 <홍도야 울지 마라>를 내세울 만하다. 비록 국민들이 이 노래와 김해를 맞닿아 떠올리는 못하더라도 분명 <홍도야 울지 마라>는 김해가 낳은 걸출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직히라는 순정의 등불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안해의 나갈 길을 너는 직혀라구름에 싸힌 달을 너는 보았지세상은 구름이오 홍도는 달빛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홍도야 울지 마라 굿세게 살자진흙에 핀 꽃에도 향기는 높다네 마음 네 행실만 놉게 가즈면즐겁게 우슬 날이 찾아오리라1936년 7월 23일, 악극형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대중에게 첫선을 보였다. 1948년 월북함으로써 이름을 잃었지만 당대의 천재로 명성을 날리던 임선규가 극본을 쓰고, 극단 청춘좌가 상연한 이 연극은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한국가요사1>을 집필한 박찬호가 '조선 연극사상 최고의 장기 공연을 기록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면 그 인기는 애써 중언부언하지 않아도 무방할 듯하다.
박찬호에 따르면, 한창 연극이 공연되던 어느 날은 서울 시내의 요정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고 한다. 기생들이 한꺼번에 연극 구경을 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는 증언이다. 이는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의 저자 선성원도 '홍도의 이야기가 자신의 처지와 너무나 닮았다고 공감한 기생이 그만큼 많았던' 까닭에 '공연되는 동안에는 장안의 술집이 모조리 문을 닫았다고 한다'고 유사하게 기술한다. 그만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것이다.
이윽고 연극은 1939년 영화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음반도 발매되었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울고, 노래를 듣고 부르면서 또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김영춘이 부른 <홍도야 울지 마라>는 영화의 주제곡이 아니었다. '부'주제곡이었다. 게다가 연극도 영화도 제목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였다. <홍도야 울지 마라>가 아니었다. 뒷날 연극과 영화의 제목이 <홍도야 울지 마라>였던 것으로 광범위하게 착각 현상이 일어난 데에는 부주제곡이었던 노래가 너무나 인기를 끈 탓이었다.
주제곡도 아니고 영화 제목도 아닌 '홍도야 울지 마라'연극과 영화의 제목도 아니고, 주제곡도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홍도야 울지 마라>는 남일연이 부른 '본'주제곡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보다 훨씬 더 높은 인기를 모았다. 어째서 그런 결과가 나타났을까? 연극과 영화의 줄거리를 보자.
부모 별세 이후 오빠의 출세를 위해 스스로 홍도는 기생이 되고, 고생 끝에 오빠를 졸업시킨 홍도는 화류계를 벗어나 시집을 간다. 남편은 유학을 떠나고, 홍도의 신상을 나쁘게 여기는 시어머니는 홍도를 쫓아낸다. 홍도는 줄곧 남편을 기다리지만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어머니의 말만 듣고 부잣집 딸과 재혼을 한다. 홍도는 칼을 들고 결혼식장으로 달려가고, 경찰관인 오빠가 그녀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다. (그래도 홍도만은 오빠가 자신을 믿어줄 것이라 생각하고, 오빠 또한 홍도의 억울함을 익히 헤아린다.)김영춘이 부른 <홍도야 울지 마라>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스토리텔링'을 노랫말 안에 담았다. 연극과 영화를 본 사람들은 가사를 흥얼거리는 것만으로도 홍도의 슬픈 사연을 구구절절하게 마음에 재현할 수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듣는 것만으로 또 다시 눈물이 났다. 그러나 노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그렇지 못했다.
거리에 핀 꽃이라 푸대접마오마음은 풀은 하늘 힌구름 같소짖구즌 비바람에 고닲이 우다사랑에 속았다오 돈에 우렀소사랑도 믿지 못할 쓰라린 세상무엇을 믿으랐가 아득하구료억울한 하소연도 설은 사정도가슴에 서려 담고 울고 살닛가계집의 높은 뜻이 꺾이는 날에무엇이 앗가우랴 거리끼겠소눈물도 인정조차 식은 세상의때 않인 시달림에 꽃은 집니다.이고범이 작사하고 김준영이 작곡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본주제곡이었는데도 부주제곡 <홍도야 울지 마라>에 밀렸다. 이는 음률은 제외하고 가사만 보아도 짐작이 되는 일이다. <홍도야 울지 마라>와 달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스토리텔링이 없다. 당장 홍도의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홍도야 울지 마라>는 김해 출신 가수 김영춘의 노래이다. 작곡은 서울 출생 이서구가 했고, 작곡은 황해도 출신 김준영이 했지만, 작사가와 작곡가는 몰라도 가수 이름은 기억하는 게 세상 인심이니 서울사람들과 황해도사람들이 억울해 하더라도 그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게다가 김영춘은 김해에서 태어나 곧장 타지로 이주한 사람도 아니다. 고등학교까지 김해에서 졸업했다. 대부분의 국민이 무학이거나 국졸이던 일제 강점기에 고등학교까지 고향에서 다녔다면, 지금으로 견주면 대학원까지 고향에서 마친 것이나 진배가 없다. 어찌 김영춘을 김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것인가.
고등학교까지 김해에서 졸업한 김영춘대구광역시의 예를 들어보자. 대구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인 다섯 살 무렵에 서울로 이주한 김광석을 기려 대구광역시는 '김광석 거리'를 조성하고, 김광석 콘서트, 김광석 사진전 등 다양한 행사를 열어 그를 '대구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에 비하면 김영춘은 완전히 다르다. 그가 고향을 떠나 전국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스무 살이던 1938년 전국 가요콩쿠르에 입상하여 공식 가수 활동을 전개한 이후부터였다. 그가 <홍도야 울지 마라>로 인기절정에 오른 것이 그 이듬해인 1939년의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말이다. 즉, 출생기,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를 모두 김해에서 보냈으니 김영춘은 분명 김해사람이라는 이야기이다.
김해문화의전당은 2012년 11월 10일부터 12월 2일까지 제6차 '김해를 빛낸 예술가 시리즈' 전시회를 가졌다. 이는 2005년 개관 이후 연이어 '김해를 빛낸 예술가' 시리즈를 개최해온 후속 행사로, 김영춘은 국보급 전각가 안광석(1917~2004), 코주부라는 캐릭터로 널리 알려진 한국만화계의 대부 김용환(1912~1998), 호랑이그림으로 유명한 김창환(1935~2002), 근대음악가 금수현(1919~1992), 한국 현대무용의 선구자 박외선(1915~2011), 리얼리즘 문학의 대가 김원일(1942~), 한글학자 허웅(1918~2004), 문학평론가 김윤식(1936~) 등과 더불어 대중들에게 전시 기간 동안 소개되었다.
하지만 김해를 찾은 나그네들이 김영춘의 발자취를 찾기는 쉽지 않다. 동광초등학교와 김해농고를 졸업했지만, 학교 홈페이지를 찾아봐도 별무소식이고, 시청 홈페이지도 백지 상태이다. 김해시 스토리텔링 공식 블로그에 '김영춘'을 입력해도 아무 반응이 없다.
김해에 '김영춘'을 되살렸으면김해에 김영춘을 되살리면 어떨까? 이곳저곳에서 골고루 원거리인 경북 청도에 전유성이 '코메디 극장'을 열어 성황을 이루고 있는 것과 견준다면, 전 국민이 두루 아는 <홍도야 울지 마라>를 김해가 내세운다면 적어도 부산, 울산, 대구, 경남 일원의 방문객은 충분히 유치할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 박찬호는 의미 있는 시사점을 준다. 그는 <홍도야 울지 마라>가 '당시 조선인에게 현실 세계를 상징적으로 응축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진단한다. 선성원은 한걸음 더 나아가 '당시 지조를 팔고 사던 친일파들의 세태를 풍자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고 소개한다.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들도 여전히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현실 세계를 상징하는 화두로 여기며 살고 있다. 인성의 상징인 '사랑'과 현실의 상징인' 돈'이 왜곡된 채 뒤엉클어진 한국 사회 앞에서 국민들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여전히 <홍도야 울지 마라>는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말이다. 그런 뜻에서, 다시 김해를 찾을 때엔 수로왕릉, 수로왕비릉, 김해박물관, 구지봉, 봉황대, 은하사, 모은암 등에 이어 '김영춘 유적'도 답사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오늘 7월 23일은 노래 <홍도야 울지 마라>의 내용을 서사로 하는 악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1936년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진 날입니다. 그런 뜻에서, <홍도야 울지 마라>의 가수 김영춘에 대해 써보았습니다. 이 글은 박찬호 저 <한국가요사1>과 선성원 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를 두루 참조했습니다. 대중가요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이 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