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정겨운 모습으로, '왜 사냐건, 웃지요' 할 것만 같은 할배, 할매들이 몇 년 째 기나긴 싸움을 이어 나가고 계신다. 이 지겹도록 길고 긴 싸움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새 우리 할배, 할매가 원하지 않던 엔딩으로 달려가는 것만 같아 나로서도 답답할 노릇이다. 지치고 힘든 몸을 이끌고 서울 구경도 아닌 투쟁을 위한 서울행을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비장하다. 밀양송전탑 이야기다.
한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렇게 반대하는 거 님비 아니냐고, 보상금 모자라서 그런 거 아니냐고들 하는데 그럼 보상금 협상을 했지, 송전탑 세우지 말라고 지중화 하라고 그러겠냐. 다만 우리는 평생 일궈온 땅, 어렵게 마련한 땅을 지키고 싶었다. 나중에 손주들 커서 시집 장가갈 때 땅 팔아서 보태줄 수도 있지 않겠냐. 그런데 이제 땅을 팔기는커녕 농사도 짓기 힘들어지게 생겼다." 할머니께서는 끝끝내 참았던 눈물을 보이셨다. 자신들을 향한 '이기주의자'라는 눈초리와 비난이 억울할 법도 하다. 한 할아버지는 힘들게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 샀던 산에서 밤나무 농장을 하신다. 1년에 700~800만 원 정도를 벌어서 생계를 이어 나가고 계신데, 그 산에 대한 보상금은 고작 157만 원. 157만 원으로는 월세 보증금도 내기 어려운 세상에 이것이 보상금이라고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765kV 송전탑 건설은 비단 밀양의 문제만은 아니다한전은 주민들을 위해서 다양한 보상 방안을 내놓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보상 방안이라는 것이 참 현실성이 떨어진다. 철저하게 자기들의 입장에서 내놓은 보상 방안이다. 주민을 위한 보상 방안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는 주민이 없다. '설비 주변지역 주민 또는 자녀 인턴채용 우대'와 같은 방안은 한전이 얼마나 안이하게 준비했는가를 보여준다. 송전탑이 '시원하게' 가로질러서 나가는 마을의 주민 대다수는 70세 이상의 어르신이다. 어르신의 자녀는 30~50대의 어엿한 기성세대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한전 인턴을 한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주민들이 힘들어 하는 것들은 반대 과정에서 일어나는 주민간의 충돌, 주민과 한전의 충돌 속에서 받는 충격들이었다. 한전의 기나긴 설득과 회유와 로비 끝에 송전탑 건설에 동의한 주민들도 없지는 않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주민과 반대하는 주민들은 아주 오래 동안 얼굴을 보고 가족처럼 지낸 사이이기도 하고, 실제로 가족이거나 가까운 친척인 경우가 대다수다. 이러다 보니, 어머니와 아들이 인사도 하지 않고 모른 척 지나가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한전에서 내보낸 용역은 어르신에게 인격을 모욕하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그냥 돈 받고 떨어져 나갈 것이지 쓸데없이 반대한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어차피 송전탑이 필요하다는데 딴 데 보다 여기 세우는 게 낫지 않냐고도 했다. 이런 충격 때문에 건설 현장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싸우고 계신 주민들의 약 70%가량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계시다고 한다. 전쟁이나 9.11 등을 겪은 사람들의 10~30% 정도가 이런 증상을 겪는 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수치라고 볼 수 있겠다.
사실 765kV 송전탑 건설은 비단 밀양의 문제만은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은 원전, 핵과 맞닿아 있다. 사실 밀양은 마을 가운데로 가로질러 간다는 엄청난 문제 때문에 이렇게 어르신들이 힘을 합쳐 싸우고 있고,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의 지원 속에서, 그리고 한전의 언론에의 호도 때문에 많이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런데 이 송전선로로 전기를 보내는 시발점은 부산 기장의 신고리 발전소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 같다.
밀양 문제, 단지 밀양의 것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
나는 부산 기장 사람이다. 원전이라는 것에 대해 수없이 많이 들어 왔고, 견학을 가보기도 했고, 원전에서 주는 혜택을 많이 누려 보았다. 적어도 중학생 때까지는 그래도 원전은 안전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한수원은 지역 공동체를 위하여 많은 것을 제공하는 마냥 좋은 회사로 보였다. 그렇지만 그것이 바로 주민들의 눈과 귀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땐 일종의 배신감이 느껴졌다. 기장의 초등학교들은 원전으로 많이들 현장학습을 간다. '원전은 우리에게 전기를 제공하는 아주 고마운 것이고, 심지어 매우 안전하기까지 하지. 없어선 안 될 존재야'라고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말해준다.
그러나 많은 학자의 연구와 주변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게 아님을 알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도 그랬다. 지진에도 끄떡없다고 하던 그 원전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후쿠시마의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그나마' 안전하다고 하는 원전으로부터 30km 떨어진 곳으로 도망치듯 끌려 나갔다. 방사능 수치가 떨어지고, 옥내대피가 가능하다는 지역에서도 사람들은 물밀듯 대피해 나갔다. 남아 있는 몇 사람을 위해 파견된 도쿄전력과 자위대는 잠깐의 외부 활동은 괜찮다는 학자들의 발표를 믿지 못해 방진복으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정해진 시간만 채우고는 도망 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안전하다면서도 일본 정부 고위인사는 후쿠시마에 방문하지 않았고, 원전을 관리하는 도쿄전력의 책임자들도 방문하지 않았다. 그들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기장에서는 송전탑 건설과 신고리 원전 건설 자체를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밀양처럼 작은 마을 단위로 사람들이 정겹게 사는 곳이 아니라 그런지 사실 밀양 어르신처럼 다 같이 바깥으로 나온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고리원자력발전소 근처에는 많은 지역 단체들이 원전을 반대한다는 플래카드를 걸고 나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포기하다시피 한 국회의 중재 역할은 결국 정부에게까지 넘어 왔고 이제 765kV 송전탑을 들어서지 않게 하기 위한 투쟁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 왔다. 파행과 베끼기로 끝난 전문가협의체, '대화'로만 해결하라는 국회, 이제 어쩔 수 없이 공사해야 하지 않겠냐는 정부. 이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밀양의 문제는 단지 밀양의 것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다. 서울시청 부근 대한문 앞에서 시청 쪽을 바라보면 보이는 한밤중에도 달보다 더 달처럼 세상을 환히 밝혀 주는 모 보험회사의 전광판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건물 외벽 전체를 나름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그 무지개 빛깔의 조명을 잠시 꺼두기만 해도 765kV 송전탑은, 그리고 원전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속에서 그 기록을 남긴 사사키 다카시 선생의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라는 책 제목처럼, 우리는 지금 이미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밀양의 어르신들이, 우리 할배 할매들이 그 재앙을 막기 위해서 몸소 싸우고 계신다. 농사는 올해 못 지으면 내년에도 또 지을 수 있지만, 송전탑은 한 번 막지 못하면 지어지고 마는 것이라며 짓고 싶은 농사도 마다하시는 우리 어르신들에게 이 젊은이는 괜스레 죄송한 마음이 밀려온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이현정씨는 현재 인권연대 청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