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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처럼 더운 한낮의 열기도 장산국 답사반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순 없었다. 7월의 마지막 토요일(27일) 오후, 장산국 답사반원들은 동백섬에 모였다. 마침 하늘이 도왔는지 구름이 태양을 가려 섭씨 30도의 더위가 그나마 한풀 꺾였다.

동백섬 목재 데크를 밟는 것으로 이날 마을 여행을 시작했다. 동백섬은 춘천이 실어다준 모래에 의해 육지와 연결된 '육계도'다. 다리미를 닮았다고 하여 '다리미섬'으로 불리기도 했다. 목재 계단을 지나 조금 걸으니 출렁다리가 나타난다. 출렁출렁~ 다리를 밟으니 몸이 휘청휘청. 멀리 해수욕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하다.

동백섬 입구에서
 동백섬 입구에서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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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다리를 지나니 아름다운 몸매의 인어공주가 초록빛으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1974년 조각가 김정숙씨의 인어공주상이 처음 설치되었으나, 1987년 태풍 셀마에 의해 유실되고 말았다. 현재 설치된 작품은 동아대 임동락 교수가 1989년에 만든 작품이다.

예전 해운대 일대에는 무궁나라 은혜왕이 있었고, 멀리 나란다국에서 황옥공주가 은혜왕에게 시집왔다고 전해진다. 황옥공주는 고국이 그리울 때마다 외할머니가 주신 황옥을 꺼내 나란다국을 비춰보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1930년대에 어떤 어부가 동백섬 일대에서 인어를 그물로 잡았는데, 이 인어가 하도 슬피 울어 바다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렇게 하니 그 해에 멸치 풍년이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황옥공주상
 황옥공주상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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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반원의 발걸음은 어느새 해운대 각자가 새겨진 곳으로 이동했다. 해안가 바위 위에 선명하게 '海雲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최치원 선생이 썼다고 되어 있으나 사실 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고증이나 문헌은 없다. 해운대와 최치원 선생과의 관련성은 <동국여지승람> '동래현 고적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이다.

"신라 최치원이 일찍이 해운대에 대를 쌓아 유상하였다는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최치원의 자는 해운이다."

해운대를 지나 이제 최치원 선생의 동상이 있는 동백섬 정상으로 향했다. 약간의 땀을 흘리며 돌계단을 오르니 널찍한 광장이 나타나고 정면에는 엄숙한 표정의 최치원 동상이 보였다.

해운대 석각
 해운대 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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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18세에 진사 빈공과에 장원급제한 최치원. 22세에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을 지어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데 많은 공헌을 한 최치원은 유, 불, 선의 대가였다. 28세에 귀국한 이 불우한 천재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를 올려 신라의 육두품 체제를 개혁하자고 주장하지만 관료들에 의해 그의 꿈은 무참히 깨어지고 만다.

이후 최치원은 천하를 주유하며 수많은 시와 산문, 책을 남겼다. 그가 천하를 유람하다가 들른 곳이 해운대였고, 해운대의 절경에 반해 대를 쌓아놓고 그를 즐겼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일 것이다.

운촌마을 당산
 운촌마을 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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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선생의 흔적을 뒤로 하고 찾아 간 곳은 해운대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운촌마을'. 지금은 아파트 숲에 가려 초라한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지만 한때는 해운대에서 제법 큰 규모를 자랑한 유서 깊은 마을이다. 동해남부선이 생기기 전만 해도 간비오산 자락에서 바닷가까지 넓은 터를 가진 마을이었다.

운촌마을 당산에서 잠시 땀을 식히며 물을 마신 답사반원들은 길잡이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절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운촌 마을 당산에서 오른쪽으로 좁고 긴 등산로가 나 있다. 여기서 장산 정상까지는 4.8km, 간비오산 정상까지는 겨우 0.6km.

이제 답사반원들은 향긋한 숲 향기를 맡으며 유적한 숲길로 접어든다. 어디선가 쉴 새 없이 날아드는 피톤치드향. 그 향을 코로 양껏 들이키니 폐 한쪽이 뻥 뚫리는 느낌! 도심 한 가운데에 이리도 깊고 상큼한 숲이 있다는 것이 어찌 그리 기쁜지. 밤이면 고라니가 돌아다니는 간비오 숲은 앞으로도 해운대의 허파 노릇을 톡톡히 할 것이다.

간비오산 봉수대
 간비오산 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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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분 정도 걸어 드디어 도착한 간비오산 봉수대. 야호~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탁 트인 전망이 일품인 곳이다. 멀리 광안대교의 위용이 유유히 보이고, 수영강과 바다가 만나는 장면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10월 달에 열리는 불꽃 축제를 보면 대박일 듯. 동백섬 일대의 전경과 해운대 일대 바다가 들어오는 걸로 봐서 예전 조선시대 때는 그야 말로 천하절경이었을 것이다.

간비오산은 해운대 유일의 봉수대로써 멀리 황령산 봉수대와 기장 남산 봉수대와 연결되어 영덕을 거쳐 한양까지 연결되었다. 해운포 일대의 왜적 침입을 감시하던 중요한 곳이었던 셈이다. 간비오에서 간은 크다는 뜻이며 비오는 '날 비'에서 말을 따와서 '날 오'가 되었다. 이 말이 나중에 "나루"라는 말로 변하였는데, 결국 간비오라는 말은 '큰나루'라는 뜻인 것이다. 예전 해운대와 수영강 일대에 커다란 나루터가 있었기에 이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답사반원들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멀리 광안대교의 총 길이가 약 7.4km인데, 당시 광안대교 공사비가 7800억 원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1m에 1억 원이 들어간 다리인 셈이다. 우리는 광안대교를 지날 때마다 1m에 1억 원을 밟고 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하. 

해운정사 가는 길
 해운정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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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비오산 답사를 마치고 편안한 산길을 지나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한국 선종의 법맥을 안고 있다는 해운정사. 현재 조계종 종정이자 대구 동화사 주실인 진제 선사가 1971년 창건한 절이다. 그런데 그날 운 좋게도 진세 선사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노승 한 분이 젊은 스님과 함께 가시면서 어디서 온 분들이냐고 물으시곤 그냥 가셨는데, 나중 어떤 분이 바로 진제선사라고 하셨다. 하이고, 그냥 단순히 인사만 올린 것이 무척 아쉬웠다. 같이 사진이라도 한 장 찍었어야 했는데...

마지막 해운정사까지, 그날의 답사도 참 의미 있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한낮의 무더위도 감히 막아내지 못한 장산국 답사반의 즐거운 여행이었다. 짧은 답사 여행을 마치고 찾아간 곳은 해운대 바보주막. 답사반원들은 봉하 쌀막걸리를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다음을 기약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국제신문에도 게재됐습니다. 장산국 답사반 카페 http://cafe.daum.net/wwt2010



태그:#해운대 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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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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