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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소에 입소하는 청년들(대구 근교, 1951. 4. 20.).
 훈련소에 입소하는 청년들(대구 근교, 1951. 4. 20.).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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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산

준기와 순희가 철길을 건너자 한 마을이 나왔다. 그 마을은 대부분 초가로 집집마다 돌담이 둘러져 있었다. 그 마을은 구미면 원평6동으로 별칭 '각산'이었다. 금오산으로 가는 각산마을 갓집 한 곳에서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 집은 대문이 없는 돌담집이었다.

"이제부터 당분간 동생은 벙어리가 되어야 해요. 억센 평안도 사투리는 일단 이곳 사람들에게는 경계 대상이 될 테니 말이에요."
"알가시오. 우리 오마니도 기러더구만요. 아무튼 전쟁터에서는 입이 바우터럼 무거워야 산다고요."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순희가 인기척을 내면서 방문으로 다가갔다.

"계십니까?"
"…."
"계십니까?"
"…."
"계십니까?"

그제야 방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한 할머니가 방문을 반쯤 열고는 말했다.

"이 밤중에 누고?"
"피난민인데 잠깐 쉬어갈 수 있겠습니까?"
"방이 없다."
"그럼, 길 좀 물어보겠습니다."

할머니는 방문을 반쯤 열고 두 사람의 몰골을 훑은 뒤 다소 안심도 되고 연민의 정이 가는지 그제야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라믄 잠깐 들어 온나."
"고맙습니다."

인명재천

미 군함이 동해 청진 앞바다에서 인민군 진지에다 함포사격을 하고 있다(1951. 7. 22.).
 미 군함이 동해 청진 앞바다에서 인민군 진지에다 함포사격을 하고 있다(1951. 7. 22.).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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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기와 순희는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곧 어둑하던 방안이 눈에 차츰 들어왔다. 아랫목에는 할아버지가 누워 있었는데 이따금 신음소리를 냈다.

"우리 영감은 오늘내일해서 아이들만 피난 보내고, 마, 우리는 피난도 안 갔다. 우린 이제 살만큼 살았고, 저 영감을 데리고 우예(어찌) 피난갈 끼고. 마, 그래, 내 집에 이대로 주저앉아 지낸다. 그래 어데서 왔노?"
"서울서 왔습니다."
"서울? 아이고 멀리서도 왔네. 그래 둘이 우째 되노?"
"남매간입니다. 남동생인데 말을 못합니다."

준기가 할머니에게 넙쭉 절을 했다.

"그래? 인사성도 밝고, 참 인물 아깝데이."
"…."
"저녁은 묵었나?"
"아직…. 할머니, 밥값 드릴 테니 염치 없지만 밥 좀…."
"알았다. 두 사람 다 마이(많이) 시장해 보인다. 찬은 없지만 내 금방 따신 밥 지어줄게."

할머니는 윗목 쌀자루에서 쌀과 보리를 두어 홉 남짓 담아 부엌으로 나갔다. 순희도 할머니를 따라 부엌으로 나갔다.

"난리라 카지만 마, 내사 평시와 똑같이 산다. 옛날 말에도 '인명은 재천'이라 안 카나. 아랫구미 송정동에 사는 장천 댁 할마이는 늘 발발 떨며 조심해도 지난번 폭격 때 머이(먼저) 가더라."

할머니와 순희는 아궁이의 불을 지피며 계속 소곤거렸다.

"그래 지금 어데로(어디로) 가는 길이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거기 가야 안전할 것 같기에."
"그 말은 맞다. 요새 본께로 젊은 사람들은 군인이나 경찰들 눈에 띠기만 하면 이쪽저쪽에서 마구 잡아간다 카더라. 내 손자도 얼매 전에 그래 잽히갔다 아이가."
"어느 쪽으로 갔습니까?"
"큰 손자는 일찍 국군으로, 둘째는 얼매 전에 인민군한테 붙잽히 갔다."

곧은 나무

곧 솥뚜껑 틈으로 김이 세차게 나왔다. 그와 함께 밥 끓는 물도 함께 그 틈새로 쏟아져 나왔다.

"이제 밥 다 돼 간다. 넌 불 그만 때고 방에 들어가라. 내 상 채리 갖고 따라 들어갈게."
"네."

순희가 방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할머니가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마이 시장켔다. 퍼뜩 먹어라."

준기와 순희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후딱 밥을 아귀처럼 먹었다.

"찬이라고는 김치하고 무시(무) 장아찌밖에 없다."

할머니는 그 모습을 흐뭇이 바라보며 손자 얘기를 했다.

"우리 손자들도 군대에서 배곯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전쟁 중에는 어느 나라 군대나 배고플 겁니다."
"시상이 왜 이런지 몰라. 해방 후로 쪼만한(조그마한) 이 구미바닥에도 조용한 날이 벨로 없었다. 밋(몇) 해 전부터 십일사건(1946년 10월 1일)이다 뭐다 해서 똑똑한 사람 마이(많이) 죽었다."
"저희 어머니가 그러시데요. 나무도 곧은 게 먼저 꺾인다고."

"하마. 그 말 참말로 맞데이. 우리 동네에 살았던 머서기도 10. 1 사건 때 경찰서를 점거하여 며칠 대장 노릇하다가 충청도에서 내려온 경찰들한테 총을 맞고 경찰서 밑 논에서 죽었데이. 참 유식하고 인물이 좋아 나중에 크게 한 자리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마, 거적대기에 둘둘 말려 건너 공동묘지에 갔다아이가."

그 얘기소리에 아랫목에서 신음하던 할아버지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마, 타관 애들하고 씰데없는 이야기 고만해라."
"알았소. 우린 이제 살만 얼매나 살갓소. 우리가 평상 죽어살았는데 이제는 하고싶은 말을 하고 살아야제 뱃속에서 천불이 안 일어나지. 내사 지금 죽어도 마 한나도 억울치 않소."

할머니가 크게 대꾸하자 할아버지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골로 가다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 및 부역혐의자를 산골짜기로 데려가 제 무덤을 파게 한 뒤 학살하고 그 자리에 매장하는 일들이 많았다(대구 근교, 1951. 4.).
▲ '골로 가다'의 현장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 및 부역혐의자를 산골짜기로 데려가 제 무덤을 파게 한 뒤 학살하고 그 자리에 매장하는 일들이 많았다(대구 근교, 1951. 4.).
ⓒ NARA, 이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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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평상(평생) 할 말도 지대로 몬하고 높은 사람들 시킨대로 살다 보니 늘 뙤놈, 왜놈들 종살이만 안 했나. 해방 후 이 구미바닥에도 알짜배기 똑똑한 사람들은 거진 다 골로 가고, 쭉정이들만 남아서 활개치다가 이 난리를 만났데이. 아랫구미에 사는 조동팔이라 카는 사람은 왜놈 밑에 빌어먹다가 해방되고 미군이 들어오자 갑자기 예수쟁이가 되더라. 그 사람은 늘 왜놈 말만 하디 금시(금세) 혀가 꼬부라져 꼬부랑말 씨부리쌌더라. 그러다가 왜놈 적산 능금(사과)밭을 지가 딱 차지하고 떵떵거리며 살더라. 그래 사람들이 그 사람을 '똥파리'라고 수군댄다. 해방이 되도 그런 놈들이 왜정 때보다 더 활개치며 잘 사니까 정신 바로 박힌 사람들이 바른 시상(세상) 만들겠다고 설치다가 골로 마이 갔다."
"할머니, 골로 가는 게 뭐예요?"
"경찰이나 군인들이 높은 사람 말 잘 안 듣는 사람들을 골라 한밤중에 몰래 산골째기로 델꼬가 지 무덤 파게 한 뒤, 그 자리에서 총 쏴 죽이고, 거기다 바로 묻는 기다."
"네?"

"니들 참말로 몰라서 묻나?
"네, 어째 그런 일이?"

"그러니까 허파 터질 일 아이가. 그러니까 요새처럼 소내기가 디기(몹시) 짜들(퍼부을) 때는 잠깐 피하는 게 똑똑타. 하마, 시상이 시끄러울 때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 숨어사는 게 목숨을 부지하는 상책이다. 그래 니들은 우째(어떻게) 여기까지 피난 왔노?"
"세상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니…."

"그 분위기라 카는 바람에 쏠리지 않는 게 젤 힘들다. 사람이 지 줏대를 야물게 갖거나 맴(마음)을 비워야 그 바람에 쏠리지 않을 건데 젊을 때는 그게 그리 쉽지 않지. 하마, 그렇고말고."
"할머니한테 인생공부 많이 합니다."

"내 같은 무지렁이한테 멀 다 배우노?"
"아니에요, 할머니 예로부터 세 살 먹은 아이들에게도 배울 게 있댔어요."
"아이고 누 집 처잔지 참 똑똑다. 나중에 우리 손자 며느리 됐으면 좋겠다. 근데 그 손자가 언제 지 집을 찾아올지 몰라. 시절이 왜 이런지…. 왜놈들 물러가 조선 사람들 이제 해방된다고 좋다고 했더니, 나란 두 쪽이 나고…, 이게 무신 난리지 모르겠다."

(*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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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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