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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시 인근으로 흐르는 '통구하' 변에 남아있는 국내성 모습
 집안시 인근으로 흐르는 '통구하' 변에 남아있는 국내성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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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성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성이 많았다. 고구려라는 이름도 성을 의미하는 '구루'에서 유래했다. 고구려인들은 험악한 산세와 지형을 이용해 난공불락의 산성을 쌓았다.

현재 중국의 랴오닝성과 지린성은 고구려의 주 활동무대였고 요동반도는 고구려가 수, 당 등 중원세력의 침공을 막아내는 관문이었다. 이곳에는 주몽이 세운 고구려의 첫 수도인 오녀산성을 비롯해 수, 당군을 막았던 고구려 산성들이 여러 개 있다.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 이유... 천의식과 국방, 경제적 이유 때문에

국내성 동쪽에는 용산, 북쪽은 우산, 서쪽은 칠성산이 있어 뒷면과 좌우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압록강이 흘러 배산임수의 천연요새다. 또한 국내성이 있는 '집안'은 인삼, 돈피, 녹용의 산지이며 야채, 과일, 약초가 풍부하다.  

'집안'의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는 국내성 성벽이 남아있다
 '집안'의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는 국내성 성벽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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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유리왕 즉위 22년(서기3년)째 되던 해 10월에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인들은 천제(天帝)의 후손답게 하늘을 공경하고 제천의식이 뚜렷했다. 그들의 눈에는 하늘이 가뭄과 홍수를 주관할 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이나 전쟁의 승패, 한 해의 흉작과 풍작을 조종했다. 고구려가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일이다. 유리왕이 하늘을 향해 막 제사를 지내려는 찰나에 제사상에 올린 살아 있는 돼지가 달아나버렸다. 대노한 유리왕은 두 명의 담당 제관을 땅에 파묻어 버렸다. 두 번째 돼지 소동은 유리왕 21년에 일어났다.

이번에도 제사에 올랐던 돼지가 줄을 끊고 도망가 버린 것. 도망간 돼지를 '위나암'에서 간신히 찾아낸 제관은 그곳의 산세와 물산의 풍부함을 왕께 설명했다. 돼지가 점지해준 땅이라며 솔깃해진 유리왕은 다음해 위나암성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곳이 바로 국내성이다.

고구려 수도였던 집안시 모습. 바로 옆에는 압록강이 흐른다
 고구려 수도였던 집안시 모습. 바로 옆에는 압록강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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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시에 있는 국내성 건축물들은 거의 사라져 버렸지만 성벽은 남아 있다. 국내성은 네모꼴이지만 각 변의 길이는 서로 다르다. 1980년에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동벽은 554.7m, 서벽 664.6m, 남벽 751.5m, 북벽 715.2m 로 총 둘레가 2686m미터나 되는 큰 평지성이다.

성벽은 거의 훼손되고 시내 중심가로 편입되어 버렸기 때문에 완전히 파악하기 어렵다. 성벽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치(雉)가 설치되는데 북쪽 성벽에 8개, 동·서·남쪽 성벽에 각각 2개씩 모두 14개의 흔적이 있다.  고구려 성벽 축조양식은 조선시대까지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집안시와 북한사이에는 압록강이 흐른다. 일행이 기념촬영을 했다
 집안시와 북한사이에는 압록강이 흐른다. 일행이 기념촬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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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시에서 본 압록강. 건너편은 북한이다.
 집안시에서 본 압록강. 건너편은 북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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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이 있는 집안 시 중심지를 버스를 타고 돌아보는 일행의 앞에는 아파트 사이사이에 남겨진 성벽만 쓸쓸히 남아있다. 이곳에 사는 중국인들은 이곳이 고구려의 수도였고 자신들은 고구려의 후손들이라는 걸 알까? 일행은 시골 담처럼 낮게 남아있는 성벽을 보고 씁쓸한 마음을 안고 환도성으로 방향을 틀었다.

방어용 산성 환도산성

국내성 북문이나 서문을 나와 '통구하'를 따라 '우산' 뒷켠으로 접어들어 2.5㎞를 가면 해발 676m의 환도산성을 만날 수 있다. 환도산성은 남쪽의 좁게 터진 입구만 빼고는 삼면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 방어요새이다.

환도산성은 고로봉식 산성이다. 고로봉식이란 정상과 절벽, 능선과 골짜기의 선을 그대로 활용하여 허약한 곳은 돌을 다듬어 쌓고, 경사가 급한 곳은 흙을 쌓아올려 토성의 모습을 하게 했다.

환도산성 남문. 중국인들이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
 환도산성 남문. 중국인들이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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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밖의 동정을 살피며 망을 보는 점장대. 환도산성 남문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있다
 성밖의 동정을 살피며 망을 보는 점장대. 환도산성 남문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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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산성은 제일 긴 서벽이 2440m, 동벽 1716m, 남벽은 1786m, 그리고 제일 짧은 북벽은 1009m로 총길이 7㎞에 달하는 거대한 성이다. 남문쪽에 있는 주차장에서 내려 50여쯤 올라가니 성벽을 수리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변방민족국가라는 동북공정차원에서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비가 온 뒤라서인지 개울물이 상당히 많이 흐르고 있었다. 더위에 지친 일행이 물 속에 발을 담그며 던진 말이 찡하다. "아! 이 물이 고구려 물이야!" 좁다란 길을 따라 올라가니 망을 보는 점장대가 있다. 점장대에서는 통구하와 집안 시의 모습이 보인다. 정말 절묘한 곳에 점장대가 있다. 고구려는 수도 근처에 반드시 일종의 대피성겸 장기 농성전을 위한 수비성을 두었고 때로는 수도의 기능까지 하도록 했다.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가이드가 환도산성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를 전했다. 한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고구려의 대무신왕은 환도산성에서 장기 농성전을 벌였다. 쳐들어온 적은 성안에 있는 고구려 군사들이 식수가 모자라 항복할 것이라고 포위를 풀지 않았다. 고구려는 연못 속의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보냈다. 적군은 성 안에 물이 풍부함을 알고 물러갔다.

산성하 무덤군(고분군)

'환도산'과 '통구하' 사이에는 거대한 고분군이 있다. 4~6세기의 귀족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엄청나다. 환도산성 지역내에만 무려 4700여기의 고분이 있다고 하니 고구려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무덤군에 속하는 유명한 고분으로는 1298호 꺽인천장무덤, 635호 형무덤, 636호 아우무덤, 1304호 거북등무덤, 983호 연꽃무덤, 332호 왕자무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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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산 아래에 있는 산성하 고분군. 고구려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환도산 아래에 있는 산성하 고분군. 고구려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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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들은 산성과 고분 축조에 특출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험준한 산악 지형을 이용해 성을 쌓고 무덤 속에는 살아있는 듯한 벽화를 그렸다. 고구려인들의 이런 솜씨는 고구려를 석조 예술의 나라, 산성의 나라, 고분의 나라라는 표현으로 대표할 수 있게 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 전까지 국내성 성벽은 아무렇게나 방치되고 성벽 사이사이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고 한다. 심지어 시내 중심가에 있는 공원이 옛 왕궁터라는 사실을 들은 일행은 씁쓸함을 금할 수 없었다.   

만주일대와 한반도를 호령하며 중국 왕조에 당당히 맞서 싸웠던 고구려 역사가 스러지고 잔재들만 남아있는 모습에 가슴이 아프다. "아! 고구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덧붙이는 글 | 다음 블로그와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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