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숙씨는 1991년 6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 7년 동안 근무한 뒤 퇴사했다. 이후 2012년 2월 유방암 진단을 받고, 지난달 23일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과 함께 근로복지공단에 해당 병명으로 산업재해를 신청했다(관련기사:
"동료들이 백혈병에 뇌종양... 임신도 못한답니다").
반올림 자료에 따르면 박씨가 일했던 기흥공장 라인에서 근무할 당시 함께 일하던 19명 중 난임이 4명, 유방암이 2명, 백혈병 1명과 갑상선 질환이 1명 등 다양한 질병피해가 발생했다. 특히나 백혈병으로 2006년 사망, 2011년 서울행정법원에서 산재 인정 판결을 받은 고 이숙영씨도 해당 라인에서 일한 바 있다.
박씨는 이번에 불임(난임)으로 산재를 신청한 김선희씨(
관련기사)와 비슷한 사례들을 많이 봤다고 했다. 그는 "바로 옆에서 일했던 동료도 7년 동안 임신을 못 했고, 옆 베이(작업실)에서는 10년 동안 난임인 경우를 봤다"며 "저도 4년 만에 임신이 됐는데 18번 염색체가 하나 더 많다고 해서 자연유산을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반올림 활동가인 이종란 노무사 또한 "미국의 IBM 반도체 사례 등 생식독성은 반도체 노동자들에게는 흔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를 그려낸 책 <먼지 없는 방>을 읽고 박민숙씨가 쓴 서평이다. <먼지 없는 방>은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백혈병으로 남편(고 황민웅)을 잃은 정애정씨와 딸(고 황유미)을 먼저 보낸 아버지 황상기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서평을 쓴 박민숙씨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최대한 살려 싣기로 했다.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다면, 삼성에서의 7년을 지우고 싶다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다면, 모든 것을 지우고 하얀 도화지 위에 내 가장 찬란해야 할 시기를 다시 그려 넣고 싶다. 삼성전자에서 보낸 한때는 과거 나의 자부심이자 긍지였던 꿈 많던 최고의 날들이었는데, 지금은 내 몸에 깊은 상처하나 남겨 놓은 헛되고 덧없는 7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시간들을 송두리째 뽑아 없애고 싶다. 다시 가장 고귀한 그날로 돌아가 가득 채우고 싶다. 내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순수한 지난날을 말이다.오랜 항암치료와 투병 생활로 지쳐 몸이 예전만 못함을 느낄 때, 지난 일들이 떠올라 다시 마음을 착잡하게 한다. 그 당시 대기업인 삼성은 내겐 희망이었다. 지긋지긋한 농촌에서 태어나 자랐고, 용돈도 궁한 시기였으니 비록 고된 사회생활이지만 능히 견뎌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경제적으로도 독립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마냥 좋았다. 역시 대기업이라 다르다는 걸,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교대근무는 지치고 힘들었지만, 나만 참고 열심히 일하면 앞으로의 미래는 훨씬 더 찬란하리라 기대와 희망에 부풀었던 시절이었다. 돌아보니 그때의 나는 너무 순진하고 너무 무지했었어. 점차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하면서 삼성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만큼 잘 길들여졌었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 가끔은 창밖의 세상을 동경하면서도 내 앞에 놓인 꿈같은 현실에 고마워하면서….김성희씨가 그린 <먼지없는 방> 책을 읽으면서 거기 실린 그림과 내용들은 삼성전자에서 일했던 기억을 다시금 되새기게 했다. 그 시절 함께 일했던 같은 동료 작업자가, 자신의 그림 실력을 뽐내는 것은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거의 완벽하게 작업 환경을 재현해 낸 것이 감탄스럽기도 했다.
책에 나온 정애정씨의 가족사 또한 나와 다를 바 없이, 삼성에 입사해 무려 11년이란 세월 몸 바쳐 일한 대가치고는 너무 혹독하고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연이은 남편(고 황민웅)의 부재. 한 여성이 감내하기에는 너무 힘든 과정이다. 아직도 진실과 싸우느라 정애정 씨 자신은 없고, 두 아이 엄마와 남편의 한을 풀기 위한 아내로서의 몫만 남은 것 같다. 어쨌든 견뎌내야 했겠지만 폭풍우 치곤 허리케인 급이 아닌가?삼성과의 길고 긴 싸움, 몸과 마음이 다치고 쓰러질 때마다 다시금 일으키게 하는 힘의 원동력은 물질적 보상과 진실어린 사과만은 아닐 거다. 더 이상 이 땅위에 누군가가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 그 이유일거다. 책을 읽으며 정애정 씨의 아이들이, 돌아가신 아빠가 아직 해외에 가 있는 줄 알고 지낸다는 대목이 뭉클했다. 나라면 어땠을까? 아빠 없이 두 아이를 키우면서 겪어야했던 일들, 남편의 영원한 부재와 양육과 직장, 사회활동…. 그런 힘의 원천은 앞서 말한 대로 삼성에 한이 맺혀서일까? 한때는 나와 같은, 희망의 징검다리자 보금자리였던 삼성을 지금은 맞서 싸워야하는 이 현실이 안타깝고 속상하다.
20년 전 이건희는 '신경영'을 선언했었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 20년 후 이제 와서는 자만하는 것이 위기라고 다시금 강조한다. 이제는 위기의식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강조한다.신경영이든 뭐든 다 상관없다. 하지만 현실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명을 담보로 이익을 취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하지 않는가? 지금이라도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법적 책임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간 영혼들이 편히 쉬지 못할 것 같다. 정애정씨처럼 가족의 죽음이 너무나 억울한 사람들. 그들의 평생 한이 하루 속히 풀리길 기도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입기자로 구성된 ‘독립편집국'에서 생산한 기사입니다. 오마이뉴스는 '행복하게 일하는 회사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독립편집국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독립편집국에서는 오마이뉴스 기자들이 기존 편집국에서 독립해 자율적으로 콘텐츠를 기획-취재-생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