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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11일, 전력 수급의 초비상 상태라고 이후 전력 수급 상황을 진단했다. 국민이 절전에 동참해달라며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다. 블랙아웃까지 언급되는 현 상황에서 곳곳의 불가피한 순환 단전은 사실상 시간 문제다. 이러한 순환 단전 1순위는 주택, 아파트, 일반 상업지구다. 즉 집과 상권부터 전력이 끊긴다.

당장 전력 공급을 크게 늘릴 수도, 수요를 크게 낮출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처한 듯한 곤란한 표정을 보면서 '착한' 국민은 집에서, 직장에서 혹은 손 닿는 다른 곳에서 에어컨의 온도를 높이고 난방기의 온도를 낮췄다. 국민들은 선거철 이후로 매년 한여름, 한겨울에 오랜만에 국가의 주인이 된다. 비록 '절전 운동'의 주인이지만.

언제부터인지 매년 무더위, 강추위가 찾아올 때마다 텔레비전에서, 신문에서, 인터넷에서 절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상하다. 이쯤되면 '수요에 맞춰 새로 전력 공급량을 늘리기보다 공급이 아슬아슬한 때마다 국민에게 가정에서 실천하는 전기 절약 정신을 심어주는 정책이 더 효율적이라 판단한 것인가'하는 의구심이 든다.

1인당 소비량 상위에 속하는 한국.
▲ 1인당 소비 전력량 1인당 소비량 상위에 속하는 한국.
ⓒ 안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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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부터 절전해야 한다"라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동원되던 그래프이다. '1인당 소비 전력량'을 보면 한국은 상위에 속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가 정말 많이 쓰긴 많이 쓰는구나' 싶어서 의구심을 가졌던 마음이 흔들릴 찰나, 아래 표와 마주하게 된다.

한국의 1인당 '주거용' 소비 전력량은 현저히 낮다.
▲ '주거용' 전력 소비량(위)과 소비 구조(아래) 한국의 1인당 '주거용' 소비 전력량은 현저히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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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절대 다수의 전력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국내 전력관련 정보 기관에서는 '1인당 소비 전력량'이 친절히 제공된다. 그러나 '1인당 소비 전력량'이라는 통계 이면에 숨어있는 '1인당 주거용 소비 전력량'을 확인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1인당 주거용 소비 전력량'은 제시된 국가들 중 한국이 가장 낮다. 그렇다. 문제는 집에서 쓰는 전기가 아니다. 그동안 언론 매체에서 '1인당 소비 전력량'과 오버랩되던 '전력 낭비' 문제가 가정에서 아끼지 않은 소비 전력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산업 용도는 주거 용도의 약 3배를 차지한다.
▲ 용도별 전력 판매량 산업 용도는 주거 용도의 약 3배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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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소비 구조에서 절반 이상을 제조업, 즉 '산업용' 전력이 차지한다. 산업용 소비 비중은 가정용 전력 소비 비중의 3배 가량의 규모이다. 단순하게 비교하면, 산업용 전력의 3.3%만 절감하더라도 주거용 전력을 10%로 3배 가량 절감하는 효과를 보는 것이다.

반값 등록금이 아니라 '반값 전기료'

산업용 전력은 OECD평균 가격의 반값. 주거용 가격에도 현저히 낮았다.
▲ 산업용 전력의 가격 산업용 전력은 OECD평균 가격의 반값. 주거용 가격에도 현저히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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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평균 '산업용' 전력 가격에 비해 우리나라의 '산업용' 전력 가격은 '반값' 수준이었다. 더해서 주거용 전기료에 비해서 산업용 전기료는 현격히 낮았다. 절전 사태까지 치닫는 상황에서 산업용 전력은 여전히 우대되고 있었다.

산업용 전력을 우대하는 만큼 얻은 건 무엇일까.
▲ 산업용 소비 전력량 대비 GDP 산업용 전력을 우대하는 만큼 얻은 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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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용 전력이 '반값'이 된 만큼 되돌아온 건 무엇일까. 한국의 산업용 소비 전력량 대비 GDP 수준은 처참할 정도로 낮다. 단순히 말해 전력은 다른 나라보다 싸게 가져다 쓰지만, 가져다 쓴 만큼에 비교했을 때 버는 정도는 다른 국가에 비해 참혹하게 낮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한편 12일 산업통상자원부에서 발표한 전력 소비 의무 감축 위반 기업 명단에는 현대·기아차를 비롯한 20여개 대기업의 이름이 박혀있었다. 발표 대상이 된, 속된 말로 '찍힌' 기업들은 적게는 이틀에서 닷새까지도 의무 감축 규제 사항을 수십 차례 위반해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누군가가 집에서 절전할 때 기업은 본체만체, 들은체만체 의무사항까지 위반해온 것이다.

쌀의 수급량이 부족해지자 '보리 혼식과 밀의 대체 섭취'를 장려하던 박정희 정부 시절
▲ '보리 혼식과 분식(粉食) 장려' 동영상 中 쌀의 수급량이 부족해지자 '보리 혼식과 밀의 대체 섭취'를 장려하던 박정희 정부 시절
ⓒ 동영상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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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예비량이 떨어져 일시적인 수요라도 줄이기 위해 관료까지 나와 호소하는 상황을 보면서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전기를 덜 쓰라고 에어컨 대신에 선풍기, 전기 밥솥 대신에 압력 밥솥, 컴퓨터 사용시간 1시간 줄이기, 플러그 뽑고 다니기, 전등 끄고 다니기 등을 장려하는 상황을 본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쌀의 수급량이 부족해져 집에서 보리와 밀 대신 먹기 운동을 펼친 박정희 정부 시절이 떠오른다. 그 당시에도 설득을 위해 쓰였던 '과학적인' 통계는 있었다. 비타민을 비롯한 필수 영양소의 함량이 보리와 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쌀만 먹으면 온갖 병에 걸려서 죽는다는 것이 그 공포스러운 설득의 내용이었다. 당시 쌀을 아껴서 보리와 섞어 먹은 뒤 행복한 표정을 짓는 화목한 가족의 모습은 영상의 압권이다.

절약 정신은 여전히 미덕이라지만 국민성과 은밀히 연결지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며 찝찝함을 지울 수 없다. 필요할 때 찾는 '국민'에게 전력난 책임의 화살을 돌리는 건 지양돼야 한다. 애꿎은 주거용 전력이 문제라는 인식이 조장되는 일 말이다. 여러 도표가 보여주듯 문제는 가정용 전력이 아니라 산업용 전력이다.

그러나 여전히 전력 소비량 감소 정책은 전체 전력의 수요 증가 추세에서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 매년 전력 수요 피크가 생기는 시기를 예측하면서도 그때마다 절약을 호소하는 것은 전력 수급의 만성적인 문제을 그때 그때 모면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프닝'을 가장한 절약 정신에 대한 호소가 정책 가이드 라인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매년 한여름, 한겨울이면 만나는 전력난은 더 이상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만성적인 문제로 치부되어야 한다. 전력의 중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공급 정책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태그:#전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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