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국제정치경제 질서에서 화두로 떠올랐던 '지역 통합'이 허위의식인 이데올로기에 불과하지 않았나하는 반성이 존재한다. 주되게는 지역 통합의 모범으로 인식되어 오던 유럽연합의 연이은 위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동아시아, 동북아시아 등 여러 차원에서 지역 통합 내지 공동체 구성을 주창해오던 우리에게도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유럽연합 위기의 원인에는 여러 측면이 있지만 구성국 간의 이질성을 간과한 경제적 통합을 우선시한 성과주의적 통합 방식도 주요한 원인으로 들 수 있다. 한편 이와 같은 발상은 전세계적으로 FTA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한국은 이 유행을 가장 빨리 그리고 철저히 따라왔다. 이것이 적절했는가와 관련한 성찰이 저 멀리 있는 유럽의 사례를 보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이미 진행 중인 FTA 협상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 중단하자는 주장은 관련 담당자들이 들었을 때 너무 쉽지만 무책임한 말이다. 진지한 성찰은 진행하되, 현실에서는 일정한 임기응변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 기본틀을 만드는 1단계 협상 중지난 6월 한중 정상회담 이후 한중FTA 협상이 속도를 내는 듯하다. 우리 정부가 당초에 밝힌 바에 따르면, 한중FTA 협상은 2단계로 진행된다. 제1단계에서 협상의 기본틀(이를 두고 정부와 언론에서는 '모댈리티'라고 지칭한다)을 합의한다. 이는 FTA의 폭을 결정하는 것이다. 즉 어떤 품목을 제외할 것인지, 또 추가할 것인지를 협의하는 것이다. 제2단계에서는 구체적인 품목의 자율화율을 확정한다. 이 단계에서 한중FTA의 심도가 결정된다. 즉 구체적인 품목에서 얼마나 급속하게 관세 철폐를 진행할 것인지를 확정하는 것이다.
이미 6차례 열린 협상에서 아직 1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는 일견 긍정적이다. 왜냐하면 협상의 기본적인 틀 즉, 민감, 초민감 그리고 일반 품목의 비중과 각각의 개방 수준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수혜와 피해 산업 영역이 확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전문가들 역시 제1단계가 한중FTA 협상에서 더욱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사실상 이 단계의 협상이 마무리 되면 한중FTA의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양국 간의 줄다리기는 팽팽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또 우리 통상관료들이 열심히 국익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렇게 세간의 관심에서 한중FTA가 멀어져 가고 있는 즈음에 예상했지만 악재(?)가 발생했다. 지난 6월 열린 한중 정상회담 직후 발표된 결과물 즉 '한중 미래비전 공동성명'에서 "양국 최고 지도자가 양측은 실질적인 자유화와 폭넓은 범위를 포괄하는, 높은 수준의 포괄적인 한중FTA 체결을 목표로 한다는 점을 재확인하였다"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높은 수준으로 포괄적으로 밀어붙여?물론 이 부분이 경제 및 사회분야 협력 확대를 다루고 있는데, 여러 의제들 중 FTA가 왜 양국 간의 경제 및 사회분야 협력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양국 정부의 현실적인 수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위의 문장에서 '높은 수준의 포괄적인'이다. 그동안 필자를 비롯한 일부 전문가들은 한중 관계의 특수성, 양국간 산업 구조 및 발전 상황 등을 고려했을 때 한중FTA는 최소한의 좁은 범위에서 낮은 수준으로 체결할 것을 주장해왔다. 즉 양국간 민감 품목을 제외하고, 낮은 자율화율을 설정하는 것이다. 이를 일부에서는 '아시아식'으로 부르고 있다. 경제 관계의 긴밀화의 상징적 의미를 높게 평가하고, 중장기적으로 협력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반대편에는 미국식이 있다. 이번에 양국 정상이 합의한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인지 통상 협상 비밀주의 원칙에 따라 도대체 무슨 일이 협상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고, 잠자코 지켜보던 우리 농어민들이 분노했던 것이다. 지난 7월초 제6차 협상이 벌어진 해운대에는 피서객이 아니라 한중FTA를 반대하는 우리 농어민들로 가득 찼었다. 위에서 언급한 공동성명에 따르면 한중FTA는 미국식으로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언론들은 다음 7차 협상 때에는 1단계가 끝날 것으로 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동아시아 FTA 추진 기획단에서 배포한 보도자료에서도 상품 분야 협상 기본틀은 대부분 의견 접근을 이루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스스로도 이번 한중 정상회담이 양국간 FTA 협상에 추동력으로 작용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통상 협상의 특성상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요인이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그만큼 최고위층의 의중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는 우리 통상 협상 관료들에게는 '높은 수준으로 포괄적으로 밀어붙여!'라는 지시로 해석될 수 있다.
1차산업과 기술수준 낮은 제조업에 타격 결론적으로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이런 발상의 핵심은 수혜 산업을 위해 피해 산업의 손실을 감내한다는 것이다. 우선 백번 양보해서 한중FTA의 성과로, 국가 경제가 향상된다고 치자. 그러나 그 효과가 국가 전반에 걸쳐 확산되지 않는 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른바 '적하 효과'는 논리적으로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없다는 것이다. 또 이대로 나간다면 한국 농어축산업의 궤멸적 타격은 불가피하다. 경제적 손익을 넘어서서 생산 기반이 붕괴되는 수준이 될 것이다. 보조금 지급 등 단기적인 보완 대책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1차 산업이 붕괴된다는 것은 한국의 미래 발전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또 1차 산업을 제외한 제조업 중에서도 중소기업 중 기술 수준이 비교적 낮은 업종의 타격 역시 명백해 보인다. 물론 산업 구조의 고도화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외부 개방 등 충격을 통한 인위적인 산업 구조의 조정은 그 사회적 충격이 대단해 구성원들의 반발을 초래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당장의 현실을 희생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미 미국 등 선진국들의 사례는 제조업의 생산 기반이 없는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 차원에서도 그리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 방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높은 수준의 포괄적인 한중FTA 체결만이 한중 경제 관계를 발전 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지난 이명박 정권 때문에 협상 체결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주장은 일리가 전혀 없지 않다. 명백한 전 정권의 전략적 실책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속도를 늦춰 낮은 수준부터현재 상황에서 중국에게 일정한 입장을 보여줄 때이기는 하다. 그러나 양국이 왜 FTA를 체결하려 하는가를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결국 양국관계를 우호적으로 한층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이다. 이는 전략적 가치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중간재가 다수를 차지하는 한중 교역구조의 특성, 한중간의 기술격차의 감소 그리고 협상 개시가 지연됨으로써 발생한 중국의 경쟁력 강화 등으로 인해 경제적 측면에서의 그 효과는 대단히 낮아진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좁은 범위에서 낮은 수준으로 체결 자체에 의의를 두고, 향후 협력의 의제를 정식화하고 그 논의를 제도화하는 것이 현명하다. 물론 경제적 효과로만 보면, 더욱 포괄적이고, 높은 수준으로 협상을 추진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고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고려하지 않는 우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중국은 아세안, 타이완 등과의 FTA에서 이런 방식을 추진한 바가 있기 때문에 설득이 가능할 것이다. 중국에게 만약 높은 수준의 포괄적 FTA가 체결된다면 한국민의 대 중국 이미지는 악화되고, 따라서 결코 한중 관계가 강화될 수 없다고 협상과정에서 설득하는 것이다. 중국이 바라는 것은 제조업 선진국이자 대표적인 미국의 동맹국가인 한국과 FTA를 체결하는 데에 있다. 협상 과정에서 줄다리기는 예상할 수 있지만 결국 협상 체결 자체에 더 많은 비중을 둘 것이다. 한국 상황을 설명하고, 최대한 상호호혜적인 경제 관계의 수립이 양국관계 발전의 초석이 될 것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다음으로, 2013년의 한국의 현실을 잘 이해해야 한다. 세계경제의 장기적인 침체는 그동안 발전 방식에 대한 많은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지난 대선에서 어느 진영을 막론하고, 양극화 해소를 위한 복지와 외형적 성장이 아닌 다른 방식의 성장을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 이를 방증한다. 박근혜 정부만 하더라도 사회 통합과 복지 그리고 창조경제를 내세우지 않았는가. 이는 개방 정책에도 일정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내수를 중시하고, 자국 산업의 안정적 성장 동력을 보호하려는 국면에서, 이제까지 해왔던 것이기에 혹은 기존의 방침이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포괄적 FTA만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당초 통상 교섭 업무가 외교부서에서 산업부서로 이관되었을 때, 일부 전문가들은 '국내 산업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는 부서로 통상 업무가 이관되었음은 이제 무차별적인 개방을 의미하는 FTA보다는 자국 산업 보호에 통상 정책이 방점을 두겠구나'라고 찬성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자국 산업의 안정적 성장을 보호하는 것이 추세그 정신을 제대로 구현하는 개방 정책 구체적으로 FTA 정책의 변화가 필요하다. 한중FTA는 바로 이를 적용할 아주 중요한 사례이다. 특히 오랫동안 준비했기 때문에 뭔가 큰 성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통상 관료들이 있다면, 다시 한번 국익이 뭔지를 신중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이다. 또 어차피 정치적 책임은 최고위층이 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조차 어리석은 일이다. 요즘과 같은 정보화시대에 누가 핵심적 역할을 했는지는 금방 알려지게 된다.
바로 이런 방향의 발상의 전환을 통해, 한중FTA 협상에 임해야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한중 정상회담 이후 기자회견에서 말한 바대로 한중FTA가 "양국민 모두의 실질적 삶에 도움이 돼, 축복 속에 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것이야말로 당장에는 쓸지는 몰라도 양국 관계의 발전에는 도움이 되는 약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주장환님은 한신대 중국학과 교수이면서 코리아연구원 기획위원입니다. 이 글은 코리아연구원 홈페이지(knsi.org)에도 함께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