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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를 환영하는 서울시민들(1953. 6.).
 반공포로를 환영하는 서울시민들(1953. 6.).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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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분리심사

마침내 1952년 4월 8일부터 공산 측의 요구에 따라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의 송환여부를 묻는 분리심사가 실시되었다. 그때부터 수용소의 포로들은 저마다 '남이냐, 북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섰다.

김준기는 그 갈림길에서 깊은 고뇌에 빠졌다. 어머니와 순희 누이의 얼굴이 번갈아 어른거렸다. 준기는 고향에 돌아가고픈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는 낙동강전선에서 도망쳤다는, 군인으로서 가장 치명적인 죄를 이미 저질렀다. 그는 북으로 돌아가면 언젠가는 그에 따른 벌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김준기는 남쪽에 일가친척이 한 사람도 없었다. 만일 최순희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는 남쪽에서 마냥 외톨이 신세가 될 처지였다.

김준기는 선뜻 북쪽으로 갈 수도, 그렇다고 남쪽에 남을 수도 없는 처지였기에 여러 날 밤잠도 설쳤다. 준기는 어머니를 따르자니 순희 누이가 보고 싶고, 순희 누이를 따르자니 어머니가 마냥 그리웠다.

거제포로수용소 전경(1951. 12. 27.).
 거제포로수용소 전경(1951. 12. 27.).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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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깊이 헤아려 보았다. 자본주의 사회가 '자유'를 우선한다면, 공산주의 사회는 '평등'을 더 우선했다. 이 두 개의 이데올로기는 사람에 따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도 있다. 준기 자신은 어느 것이 더 좋은가를 냉정히 생각해 보았다. 준기는 포로수용소 생활에서 자유가 더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자유와 평등을 함께 누릴 수 있는 나라, 자유도 평등도 다함께 중시하는 그런 나라를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그것은 현실이 아닌 어디까지나 꿈이었다.

'남이냐 북이냐'

하지만 준기는 단시간 내에 '남이냐 북이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놓였다. 준기는 송환 분리심사 직전까지도 갈팡질팡했다. 마침내 준기는 결정의 순간, 기표소 현장에서 어머니와 순희의 얼굴 가운데 먼저 떠오르는 대로 송환여부 의사 표시용지에다가 'N' 자 아니면 'S' 자를 쓰기로 작정했다. 자기만 그런 게 아니고 수용소 내 많은 포로들도 선택의 기로에서 그들 나름대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북송을 거부하는 포로에게 설득하는 북측 대표(판문점, 1954. 2. 16.). 최인훈 소설 <광장>의 한 장면이다.
 북송을 거부하는 포로에게 설득하는 북측 대표(판문점, 1954. 2. 16.). 최인훈 소설 <광장>의 한 장면이다.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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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의 날

1952년 4월 8일로부터 사흘 뒤인 4월 11일, 드디어 준기에게 결정의 날이 왔다. 유엔 포로심사관은 포로들이 기표소에 들어가기 전에 종이를 나눠주었다. 거기에 포로 번호를 쓴 뒤 'N(North, 북)' 자나 'S(South, 남)' 자 한 자만 쓰게 했다.

준기는 포로수용소 연병장 대기 열에 섰다가 유엔 포로 심사관에게 종이를 받아들고 기표소에 들어갔다. 그 순간 묘하게도 순희의 얼굴이 크게 떠오르고. 한밤중에 낙동강을 건너 도망치던 장면과 구미 형곡동 김정묵 씨 집 행랑채에서 순희가 한 말이 환청처럼 들렸다. 그리고 순희의 상큼한 체취와 부드럽고 봉곳한 젖무덤의 감촉도.

"나는 이 전쟁이 끝난 다음 해마다 8월 15일 낮 12시,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준기 동생을 기다리겠어요."

마침내 준기는 종이에 'S' 자를 썼다. 그런 뒤 남쪽을 선택한 다른 포로들과 함께 별도 분리 수용소로 갔다.

'그래 순희 누이를 만나 결혼한 뒤 통일이 되면 둘이서 고향의 오마니를 찾아갈 거야'

준기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며 자기의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준기는 선택의 결정을 내리자 그 순간부터 마음이 편했다. 준기가 남쪽을 선택하자 그 순간부터 그는 반공 포로로 분리 수용되었다. 반공 포로들은 부산, 마산, 영천, 광주, 논산 등 5개의 별도 포로수용소로 분산 수용되었다. 준기가 간 곳은 영천 제14포로수용소였다. 북쪽을 선택한 친공 포로들은 거제도에 남거나 거제도 남쪽 용초동으로 갔고, 본국 송환을 거부한 중국군 포로들은 제주 모슬포로 갔다.

중국군 포로 가운데 자유중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 포로들이 자유중국기 태극기 성조기와 장개석 총통 사진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1954. 1. 20.).
 중국군 포로 가운데 자유중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 포로들이 자유중국기 태극기 성조기와 장개석 총통 사진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1954. 1. 20.).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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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회담 조인

1953년 6월 18일 밤 이승만 대통령이 일방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 대통령의 명령으로 전국의 포로수용소에서 약 2만7천여 명에 이르는 반공포로가 일방으로 석방되었다. 이 조치에 전 세계는 경악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8년 재임 중 유일하게 자다가 일어난 사건으로 "미국은 우방을 잃은 대신 적을 하나 더 얻었다"고 개탄했다. 처질 영국 수상은 이승만 대통령을 '배반자'로 비난하며, 비밀리에 이승만 대통령을 즉각 구속하거나 대통령 직에서 쫓아내라고 미국 정부에 요청하기까지 했다. 아무튼 이승만 대통령의 이 조치는 막 닻을 내리려던 정전협정회담에 새로운 암초로 떠올랐다.

하지만 정전협정회담장에 앉은 쌍방은 이미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돌발사태에 유엔군 측은 한국군이 정전협정을 준수하도록 보장하겠다고 확약함으로써 정전협정의 마지막 암초는 곧 제거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각, 마침내 동쪽 입구로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 장군 외 실무자가 판문점 정전회담장으로 입장하였고, 그와 동시에 서쪽 입구에서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 외 실무자가 들어와 판문점 정전회담장에 착석했다. 양측 대표는 서로 목례도, 악수도 없었다. 정전회담장은 시종 냉랭한 분위기였다.

정전회담장에는 북쪽으로 세 개의 탁자를 나란히 배치해 두었다. 세 개의 탁자 중 가운데 탁자를 완충 경계지역으로 양쪽에 앉은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대표들은 곧 무표정한 얼굴로 정본 9통, 부본 9통의 정전협정문에 부지런히 서명을 했다. 양측 대표가 서명을 마치자 양측 선임 참모 장교가 그것을 상대편에 건넸다. 이날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과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은 각기 서른여섯 번씩 서명을 했다. 정전협정 조인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도 유엔군 전폭기가 하늘에서 무력시위라도 하는 듯, 정전회담장 바로 근처 공산군 진지에 폭탄을 쏟았다.

더러운 전쟁

10여 분간 양측 대표의 서명이 끝나자 정전협정서를 교환한 뒤 양측 대표는 아무런 인사도 없이 곧장 정전회담장을 빠져나갔다. 그때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12분이었다. 이날 정전협정 조인식 분위기조차 글자 그대로 '정전'이었지 '평화'가 아니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은 소련이 정전협정을 제의한지 25개월 만에, 모두 765차례의 회담 끝에 이루어졌다. 이날 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식장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기자단도 유엔군 측 기자는 1백 명 정도였고, 일본인 기자도 10 명이었는데, 한국인 기자석은 단 두 명뿐이었다. 한국의 운명은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비극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정전협정 서명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정전협정문에는 서명 시점에서 12시간이 지난 뒤부터 전투행위를 중지하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유엔군 전폭기들은 북한의 비행장과 철로들을 폭격했고, 유엔군 해군 전함들은 원산항 쪽으로 함포사격을 실시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서로가 한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었다. 전쟁에서 교전국간 페어플레이나 자비를 바랄 순 없지만, 한국전쟁은 시작인 북한의 기습 남침에서 유엔군의 마지막 북폭까지 이 나라 백성들의 생명이나 인권은 안중에도 없었다. 한국전쟁은 그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참으로 더티(Dirty, 더러운)한 전쟁으로 세계전사에 남을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22시, 그제야 새로이 만들어진 155마일 휴전선에 비로소 총성이 멎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잠시 쉬는 것일 뿐, 이후에도 총성이 울렸고, 아직도 종결된 것은 아니다.

정전회담 조인식에 미군 측 해리슨 제독(왼쪽)과 북측의 남일 대장(오른쪽)이 쌍방 합의서에 각각 서명하고 있다(1953. 7. 27.).
 정전회담 조인식에 미군 측 해리슨 제독(왼쪽)과 북측의 남일 대장(오른쪽)이 쌍방 합의서에 각각 서명하고 있다(1953.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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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1개월 남짓 지루하게 계속된 한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양측이 서로 승자라고 우기는)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일단 그 막을 내렸다. 이 기간 동안 양측 사상자는 민간인 포함 약 500만 명, 그리고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을 양산했다. 그리고 한국인에게는 전쟁 전 일직선 38선 대신에 전쟁 후 구불구불한 곡선의 휴전선으로, 또 다른 단장의, 원한과 통곡의 선을 남겼다.

이와 반면 미국은 한국전쟁으로 2차 세계대전 후 침체기의 경제를 부흥시킴과 아울러 서방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하였고, 일본은 한국전쟁을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할 만큼 태평양전쟁 패전국의 잿더미를 재건시키는데 그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북한은 김일성 체제를 공고히 굳혔고, 남한 역시 흔들리던 이승만 정권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데 큰 몫을 했다. 결과적으로 남과 북의 힘없는 백성들만 소련제, 미국제 무기를 들고 내 핏줄, 내 형제들을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서로 무참히 죽이는 강대국의 노름에 놀아난 어릿광대 꼴이 되었다.

반공포로 석방

1953년 6월 18일 새벽 2시, 영천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김준기는 천만 뜻밖에도 헌병들의 안내를 받으며 수용소 철조망을 통해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그런데 준기는 그렇게 그리던 바깥세상에 나왔건만 아이러니하게도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그때 석방된 대부분 포로들은 대부분 갈 곳이 없어 우왕좌왕하다가 다시 인근 포항보충대에 수용되었다.

그들은 일주일 뒤 국군에 입대하고자 국군 제주도훈련소로 떠났다. 그때 준기의 실망감과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하지만 준기는 자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기로 혀를 깨물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에게는 언젠가 최순희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북한으로 돌아가는 인민군(여) 포로들이 열차 밖으로 인공기와 플래카드를 내걸고 구호를 부르짖고 있다(1953. 8. 6.).
 북한으로 돌아가는 인민군(여) 포로들이 열차 밖으로 인공기와 플래카드를 내걸고 구호를 부르짖고 있다(1953.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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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약속> [제1부] 끝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의 연재는 지난 6월 25일 제1회가 나간 이후 오늘까지 모두 49회가 <오마이뉴스> 문화면에 실렸다. 앞으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100회 안팎으로 올 12월 하순에 끝날 예정이다. 이번 49회가 제1부 마지막 회이기에 마라톤으로 치면 그 반환점이 된다. 장편소설 연재는 처음이라 약간 설레면서도 두려웠다.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독자들의 뜨거운 성원 탓이었다. 제1부가 무사히 끝난데 대해 독자 여러분에게 깊이 감사드리며, 곧 이어 연재될 제2부에서도 끊임없는 성원을 부탁드린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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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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