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루 왕자 찾아가기
복건성 문화유산 찾기 첫 번째 일정은 용암시 영정현에 있는 토루(공동체 생활을 가능케 하고 방어용 건물로 활용할 수 있는 흙집) 답사다. 기온이 높아 덥기는 하지만 날씨가 좋은 편이다. 버스는 하문 시내의 호텔을 떠나 서쪽 방향으로 가더니 하문항을 지난다. 그리고는 금방 해창대교를 건넌다.
해창대교를 건너면 하문시 해창구가 된다. 사명구와 호리구로 이루어진 하문섬과 달리 해창구는 육지다. 해창구는 현재 공업단지가 조성되는 등 하문시의 개발지구로 부상하고 있다. 1시간쯤 달렸을까, 버스는 G15 고속도로 해창 나들목으로 들어간다. G15 심해 고속도로는 심양(沈阳)에서 해구(海口)까지 바닷가를 잇는 대표적인 고속도로다.
고속도로에서는 버스가 속도를 낸다. 곧 이어 장주(漳州)가 나오고 버스는 G76 장룡(漳龍) 고속도로로 들어선다. 우리는 용암시 영정현 호갱진 홍갱촌(洪坑村 : Fujingcun)으로 갈 예정이다. 그곳에 토루의 왕자 진성루가 있기 때문이다. 11시 30분이 되어 우리는 홍갱촌 투어리스트 서비스 센터에 도착한다. 투어리스트 서비스 센터가 중국어로는 '유객복무중심(游客服務中心)'이 된다. 이곳에서 표를 끊은 다음 홍천(洪川)을 따라 다시 20분을 들어간다. 개울 옆으로 토루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토루가 그렇게 크거나 근사하지 않다.
중간에 토루낙번천극장(土樓樂翻天劇場)이 보인다. 공부하는 아이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뮤지컬 극장 겸 교육기관인 것 같다. 우리는 경운루(慶雲樓)를 지나 옥성루(玉成樓)에서 점심을 먹는다. 토루는 모두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옥성루는 술과 음식을 파는 반점(飯店)이 되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나는 바로 옆에 있는 천후궁(天后宮)으로 간다. 천후궁은 마조(媽祖)를 모시는 사당이다. 마조는 중국 남부지방에서 믿는 바다의 여신이다. 복건성은 해외무역의 거점으로 선원과 화교를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그래서 마조신앙이 다른 어떤 곳보다 돈독하다.
우리는 이곳에서 토루의 왕자 진성루(振成樓)로 간다. 진성루가 토루의 왕자가 된 것은 홍갱 객가토루 민속문화촌에 있는 46개 원형과 방형 토루 중 가장 완벽한 모습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청산과 계류라는 자연환경을 이용, 그곳에 최고의 주거환경을 만들었다. 중국식으로 표현하면 청산녹수지간의 보배로운 구슬(靑山綠水之間寶珠)이 된다. 홍갱 토루의 건설은 임씨 삼형제가 청조 말인 1880년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처음 복유루(福裕樓)를 지어 함께 거주했다.
토루 왕자 들여다보기
그리고 1909년 막내인 임인산(林仁山)이 새로이 토루를 짓기 시작했고, 1912년 진성루를 완성했다 진성루는 원형 토루로, 4층에 높이가 16m이며, 방이 184칸이다. 토루가 차지하고 있는 부지 면적이 5000㎡이니 토루의 외부 지름이 70m나 된다. 4각형의 문을 들어서면 현관이 나오고, 그 안에 토루 내부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문이 나온다. 그 문 위에는 이당관형(里黨觀型)이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다. '이 동네의 집 중 모범을 본다'라는 뜻이다.
중화민국 12년(1923년) 6월 북양정부(北洋政府) 총통이었던 여원홍(黎元洪)이 내린 글씨다. 당시 이 토루의 주인이었던 임홍초(林鴻超)가 1913년까지 북양정부 참의원을 지낸 인연 때문이다. 이 문을 지나면 원형의 중정(中庭)이 나온다. 이곳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토루는 외부의 빛을 최대한 받아들이면서도 외부와는 차단된 일종의 방어형 연립주택이다. 그리고 내부에 사는 사람들은 같은 성씨의 친척이었다. 그러므로 토루는 일종의 집성촌이다. 그래서 건물 내부에는 시조를 모시는 사당이나 부처님을 모시는 불단이 있다.
진성루에는 사당 대신 불단이 마련되어 있다. 불단의 위에 관자재(觀自在)라고 쓴 편액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관세음보살을 모신 게 틀림없다. 그리고 보살 옆에 두 개의 주련을 달았는데, 그 문장을 통해 당호가 진성(振成)이 된 연유를 알 수 있다. 오른쪽에는 진쇄정신공참묘체(振刷精神功參妙諦)라고 쓰고, 왼쪽에는 성취복덕과증보리(成就福德果證菩提)라고 썼다. 정신을 진작시키고 쇄신하며 묘체를 공부하고 참구한다면, 복덕을 이루고 결과적으로 보리를 증득할 것이다.
여기서 묘체와 보리가 핵심인데, 모두 불교적인 용어다. 묘체는 오묘한 진리를 말하고, 보리는 최고의 깨달음을 말한다. 이 두 문장의 첫 자를 따 진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진성은 오묘한 진리와 최고의 깨달음에 이른다는 뜻이다. 진성루는 4층으로 이루어졌다. 1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현대식 토루여서 벽의 일부를 흙벽돌이 아닌 구운 벽돌을 사용했다. 3층과 4층은 생활과 거주공간이어서 올라가지 못하도록 통제를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1층에 있는 연도방(煙刀坊)과 서당을 둘러본다.
연도방은 담배를 써는 칼이 있는 방이라는 뜻으로, 일종의 담배 제조공장이다. 그곳에서 칼로 담배잎를 썬 다음 종이에 말아 담배를 생산했다. 여기서 생산된 담배는 진성루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 서당은 말 그대로 어린 애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주련의 글씨로 보아 의(義)와 도(道)를 강조한 것 같다. 이들을 보고 나는 마당 가운데 있는 우물을 들여다본다. 일종의 두레박 샘이다. 옛날에는 모두 이 물을 이용해 취사를 했다고 한다. 진성루를 한 바퀴 돌고 나오니 30분이 지났다.
홍천을 따라 펼쳐진 토루군우리는 다시 홍천을 따라 상류로 올라간다. 길가로 상인들이 물건을 파느라 바쁘다. 중간에 영성루(永成樓)도 있고, 돌무더기를 쌓아올린 서낭당도 있다. 이곳을 지나자 집원루(集源樓)와 경양루(景陽樓)가 나온다. 경양루는 사각형으로 된 4층짜리 토루다. 그리고 다리 건너에는 4층 짜리 원형 토루인 조양루(朝陽樓)도 보인다.
이들을 지나면 또 다시 경복루(慶福樓)와 광유루(光裕樓)가 나온다. 모두 홍갱 토루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지나 임덕산(林德山), 임중산(林仲山), 임인산(林仁山) 삼형제가 함께 살았던 복유루(福裕樓)로 간다.
복유루라는 이름은 '복전심지(福田心地) 유후광전(裕後光前)'의 첫 자를 따서 만들었다. 복된 마음과 여유로운 빛이 이 땅에 영원하기를 기원한다는 뜻이다. 그래선지 그 후손들이 현재 그 후손들이 홍갱촌을 이끌어가고 있다. 출입구의 좌우에는 돌로 된 사자와 기린 부조가 있다. 그리고 집안의 사당에는 조상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4층까지 올라가 내부를 살펴본다. 사각형의 토루로 내부가 좁고 복잡한 편이다.
복유루에는 현재 임근승(林勤勝)이 살면서 숙식을 제공하는 여관을 경영하고 있다. 그래서 토루를 제대로 체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머무는 편이다. 이곳에서는 하루 숙박비가 20~30위안 선이다. 복유루를 나오면서 보니 바깥 마당에 빨래가 널려 있다. 여관을 하다 보니 침구류의 시트를 빨아 말리는 것이다. 최근에 토루를 연구하는 한국 학자들이 와서 하루 묵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방의 방음이 안 되고 화장실이 바깥에 있어 불편을 겪었다고 한다. 토루는 이처럼 불편한 점이 많아 젊은이들이 점점 이곳을 떠나고 있다.
나와 아내는 다시 다리를 건너 여승루(如升樓)로 간다. 여승루는 3층의 원형 토루다. 이것을 보고 나서 우리는 홍천을 따라 반대편 길로 내려간다. 시내 건너편에서 토루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복유루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아래 광유루도 편안한 느낌이 든다. 광유루는 1775년에 건축된 3층의 방형 토루다. 그러고 보니 홍갱촌의 젖줄 역할을 하는 것이 홍천이다. 나는 홍천을 따라 처음 출발한 매표소 쪽으로 내려간다.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우리를 괴롭힌다.
토루의 왕도 있다는 군우리는 버스를 타고 인근의 고북(高北: Gaobei) 토루군으로 향한다. 30분 정도 가자 관광안내소 겸 매표소가 나온다. 나는 이곳에서 익숙한 고사성어를 본다. '먼 곳의 친척이 가까운 이웃만 못 하고, 신을 공경하는 것이 친구를 존경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遠親不如近親 敬神不如敬親)' 고북 토루는 다행히 입구에서 멀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고북토루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먼저 관망대로 올라간다. 올라가는 계단이 만만치 않다. 아내가 짜증을 낸다. 그러나 자연이나 문화유산은 높은 곳에서 봐야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다.
위로 올라가면서 승계루(承啓樓), 세택루(世澤樓), 교복루(橋福樓), 오운루(五雲樓), 오각루(五角樓) 등 토루군을 볼 수 있다. 고북 토루군은 길 건너편 현대적인 건물과 공존하고 있어 고북촌의 미래는 밝아 보인다. 자료에 따르면 고북 토루군의 특징은 고박(古朴)한 건축, 응중(凝重)한 조형, 심원(深遠)한 문화에 있다. 이를 해석하면 오래되고 소박하며, 장중하고 깊이가 있다는 뜻이 된다. 고북 토루군은 16세기에 지어지기 시작해 20세기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다.
나는 관망대에서 산길을 따라 승계루로 내려간다. 승계루는 복건 토루 중 그 규모가 가장 커서 토루의 왕(福建土樓王)으로 불린다. 4층이며 토루의 지름이 73m, 둘레가 229m, 부지면적이 5376㎡에 이른다. 토루 내부의 둥근 건축이 4개의 고리(環)를 이루고 있어 더 복잡하고 웅장하다.
청나라 강희 48년(1709년)에 완성되었으니 그 역사가 300년이 넘는다. 승계라는 이름은 '승전조덕근화검(承前祖德勤和儉) 계후손모독여경(啓後孫謀讀與耕)'의 첫 글자에서 따 왔다. 선조의 덕과 근검정신을 이어 받아, 후손들은 주경야독을 실천한다는 뜻이다.
승계루는 외곽을 이루는 제1환이 4층으로 되어 있고, 각 층에는 72칸 방이 있다. 제2환과 제3환은 단층으로 40칸, 32칸의 방이 있다. 제4환은 담이 있고 그 안에 맞배지붕의 조당(祖堂)을 만들었다. 조당을 살펴보니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그것은 신광보조(神光普照)와 자운광시(慈雲廣市)라는 글씨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조당을 나와 외곽을 이루는 제1환을 올라가본다. 한 층 한 층 올라가면서 보이는 모습이 달라진다.
4층에 올라가니 안쪽에 있는 제2환에서 제4환까지 둥그런 건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모습은 정말 보기 어려운 장관이다. 왜냐하면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4층까지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15분간 그곳에 머물며 승계루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아래로 내려오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연밥을 정리하고 있다. 노인이 아이들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중장년층 사람들은 낮 동안 토루 밖에 있는 농토에 나가 일을 하기 때문이다.
승계루에는 400칸의 방이 있으나 현재 사는 사람은 300명이 못 되고 있다. 이곳에 사람이 가장 많이 살 때는 80가구에 600명의 주민이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승계루도 역시 쇠퇴의 길을 걷는다는 뜻이 된다. 토루에서 사람들이 떠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젊은이들이 돈벌이가 낫고 생활환경이 좋은 도시로 떠나기 때문이다.
나는 승계루를 나와 이웃하고 있는 세택루로 들어간다. 방형의 4층 건물로 내부 구조가 승계루와 전혀 다르다. 나는 이곳도 4층까지 올라가면서 내부를 자세히 살펴본다. 이곳 역시 숙식이 가능한 여관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또한 토산품과 공예품 등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 토루는 점점 관광인프라의 길을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