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이 종식된 지 20년도 더 지났건만, 한국 땅에서의 '냉전'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광복절 기념행사 때 광주시립소년소녀합창단이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옷을 단체로 입은 것을 두고 광주 보훈청장과 보수 언론이 문제삼고 나섰다. 이에 화들짝 놀란 광주시는 이아무개 합창단장을 징계위에 회부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여론이 들끓고 있다.
죄목(?)은 '체 게바라는 광복절의 취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 딱 하나다. 말하자면,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옷을 입어 광복절의 참뜻을 훼손했다는 것인데, 징계 운운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솔직히, 예술적 자율성을 보장하라는 일부 예술계 인사들의 언사조차도 비굴하게 느껴진다. 그냥 '무식한 ×이 용감한 것'이며,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이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체 게바라가 '타도해야 할 적'인가
단언컨대, 나는 광복절의 취지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주저함 없이 체 게바라를 손꼽겠다. 부디 오해는 마시라. 우리나라에도 식민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위대한 독립운동가들이 적지 않다는 건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체 게바라가 아니라 우리 독립운동가의 얼굴이 그려진 옷을 입고 출연했다면 문제삼기는커녕 앞 다퉈 상찬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은 되고, 왜 체 게바라는 안 되느냐는 것이다. 공연장에서 맨 먼저 문제를 삼았다는 광주 보훈청장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과연 체 게바라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가. 문제제기로 미뤄, 그의 인식 속에 체 게바라는 그저 쿠바를 공산화시킨 '빨갱이'일 뿐이다. 거칠게 말해서, 체 게바라는 여전히 타도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셈이다.
동지인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그가 혁명을 일으킬 당시의 쿠바의 상황과 일제 식민지의 질곡 속에서 헤매던 우리나라와 얼마나 다를까. 그를 단순히 '사회주의자'라는 틀로 규정하는 건 편협한 사고다. 저명한 프랑스 사상가 사르트르는 그를 두고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말했다. 이념적 사고로 재단하기에는 너무나 큰 그릇이라는 의미다.
주지하다시피, 체 게바라는 에스파냐와 미국으로 이어진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쿠바 민중들과 연대해 혁명을 완수한 인물이다. 아르헨티나의 유복한 집안 출신의 의사로서 안락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가난에 허덕이는 민중의 해방을 위해 삶을 바친 혁명가다.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뒤에는 '쿠바에서 할 일은 다 끝났다'며, 권력을 탐하지 않고 홀연히 아프리카로 떠난 모습은 흡사 '성자'의 모습이다. 그를 '전사 그리스도'라 칭하는 이유다.
그의 '굵고 짧았던' 생애를 통해 우리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가 평생 추구했던 신념이란 일체의 억압이 없는 세상을 꿈꾼 것이었다. 곧, 남아메리카 민중의 비참한 삶을 만난 뒤 '인간에 대한 사랑'을 죽음으로써 실천한 숭고한 휴머니스트였다. 일제강점기 우리 독립운동가의 모습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항일투쟁은 사회주의 세력 빼곤 설명 불가능체 게바라에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대체로 광복의 의미와 과정을 독점하려 든다. 식민지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특정 세력의 공으로 돌릴 수 없다. 친일파를 제외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 세력을 아우르는 민족적 항일 투쟁의 결과가 바로 8·15 광복이다. 외세의 도움은 받았을지언정,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피와 땀이 아니었다면 해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반제 항일투쟁사에 있어서 사회주의자들의 몫을 인정하지 않은 채 오로지 일부 민족주의자들과 외세, 특히 미국의 도움으로 해방이 됐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광복절과 삼일절에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가 펄럭이는 생뚱맞은 모습은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회주의자는 '빨갱이'고, '빨갱이'는 친일파라는 황당한 논리가 확산됐다.
요컨대, 광복절이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면, 사회주의를 신봉한 독립운동가도 기억돼야 마땅하다. 나아가 이념이야 어떻든 우리나라의 해방에 헌신한 외국인들까지도 애써 찾아 추모하고 기념해야 옳다. 단지 사회주의 혁명가라는 이유로 체 게바라의 숭고한 삶을 부정하고 내치는 나라는, 대한민국 외에는 없다.
지역 문화예술계에서는 '순수한 예술 표현을 문제 삼는 풍토의 문제'라고 지적했지만, 그보다는 '사회주의와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안 된다'고 여기는 냉전적 사고가 만들어낸 어처구니없는 갈등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을 일으켰고, 쿠바는 북한과 수교한 사회주의 국가이니, 체 게바라는 우리의 '적'이라는, 저들의 논리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고백하건대, 체 게바라는 나의 역할모델이자 우상이다. 장 코르미에가 쓴 <체 게바라 평전>은 내 청춘의 삶을 규정한 차라리 '성서'였다. 그의 삶을 통해 '인간'을 봤다. 철저했지만 낭만적이었고, 냉엄한 현실 속에서도 늘 이상을 꿈꿨다. 그는 죽음마저 존엄했다. 그가 살해당하기 직전 이렇게 포효했다고 한다. "너는 사람을 죽이고 있다."
체 게바라의 본명인 에르네스토(ernesto)는 내 인터넷 아이디가 됐고,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대라면 한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그를 꼽게 됐다. <체 게바라 평전>은 아이들에게 맨 처음 권하는 추천 도서이며, 그가 전장에서 남겼다는 시집은 도서목록 1호다.
그런가 하면, 그가 즐겨 마셨다는 마테차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이고, 가장 여행하고 싶은 나라는 단연 쿠바다. 내가 아내에게 남긴 유언은 '죽거든 화장해 체 게바라가 묻힌 쿠바 산타클라라 동상 앞에 뿌려 달라'는 것이다.
언제부터 광주가 보수 언론에 무릎 꿇은 도시가 됐나광복절 기념행사 때 체 게바라 옷을 입었다는 게 죄가 된다면, 학교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체 게바라 평전>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라고 과제를 내주는 나는 뭔가. 설마 3·1절이나 광복절 때 내주면 처벌을 받고, 다른 때면 괜찮다고 할 텐가. 대선 이후 여기저기서 민주주의가 실종되고 있다더니만, 말도 안 되는 일이 대낮에 벌어지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것도 '민주인권의 도시' '민주화의 성지'라는 광주에서 벌어진 일이라 더욱 참담한 심정이다. 수십 년간 불려온 <님을 위한 행진곡>을 5·18 공식 기념곡으로 지정할 수 없다고 버틴 보훈청이고 보면 그들의 '트집'은 그렇다 치자. 또, 주야장천 '종북 척결'을 외치며 먹고사는 보수 언론의 '생떼'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정작 놀라운 건 광주시의 대응이다. 언제부터 광주가 보수 언론에 무릎 꿇은 도시가 됐나. 입만 열면 '문화 창조의 도시를 지향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편협하고 색깔론적인 문제 제기에 반론할 수 있는 논리도, 조롱할 수 있는 결기도 광주시엔 없는 듯하다. 그저 납작 엎드린 채 합창단장을 희생양 삼아 서둘러 논란을 잠재우려는 '찌질함'만 가득하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번 일로 느낀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진정 제대로 된 역사교육, 특히 현대사교육을 받아야 할 대상은 아이들이 아니라, 냉전적 사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일부 기성세대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결국 그 뿌리에는 남북 대결 구도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는 깨달음이다. 분단이 시급히 해소돼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