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하고 있다."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주인공 정원(한석규 분)이 내뱉는 독백이다. 불치병에 걸린 30대 사진사 정원은 사진관에 매일 주차단속사진 인화를 맡기러 오는 20대 주차단속원 다림(심은하 분)을 만나 사랑의 감정을 싹틔운다. 8월 무더위를 피해 정원의 사진관에 들어와 손부채질을 하는 다림의 풋풋한 모습에 빠져들기 시작한 정원은 어느새 다림이 매일 사진관에 들리는 시간을 기다린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는 정원의 시한부 인생이 너무 짧기만 하다.
갑자기 악화된 병세로 인해 사진관 문을 닫게 된 정원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른 채 사진관 주변을 맴돌다가 야속한 마음에 사진관 유리창에 돌을 던져보기까지 하는 다림. 시간이 흘러 크리스마스 무렵 잠시 퇴원한 정원은 사진관에서 스스로 영정사진을 찍은 후 영원히 다림 곁을 떠난다. 정원의 소식을 알 리 없는 다림은 어느 날 다시 문 닫힌 사진관을 들여다보다가 미소를 머금으며 자리를 뜬다. 다림의 뒤로 사진관 진열장 안에 활짝 웃는 다림의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던 것이다.
세상을 떠나기 전 사랑이라는 선물을 받은 정원이 다림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일까. 다시 볼 수도 없고 고백하지도 못한 사랑이지만, 한여름에 시작한 사랑은 크리스마스의 선물처럼 추억으로 마무리된다.
디지털 시대라도 사람에게는 아날로그가 필요해1998년 작품인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필름을 손으로 끼워 넣는 수동카메라와 동네 사진관 같은 아날로그 시대의 풍경과 감성을 배경으로 하지만,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최근에도 영화를 찾아보고 애잔한 감동을 고백한 후기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디지털 시대라도 사람의 아날로그적인 감정은 시대를 초월해 공감을 얻는 법이다.
영화가 나온 지 15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디지털 시대로 옮겨온 우리의 삶은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다. 도시인들은 '삐삐'가 아니라 아예 영상통화를 하며 서로 연락하고, 언제 올지 몰라 애태우던 버스는 이제 정거장 스크린에 친절하게 '몇 분 뒤 도착'까지 안내된다.
매일 변화의 한 가운데 살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적 변화의 정도와 깊이를 쉽게 느끼지 못하지만 1998년의 어느 날과 지금의 어느 날을 딱 잘라 비교해 보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이다. 특히 이산의 현실 속에서 애달픔과 그리움의 아날로그적 감정을 안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이산가족들에게 아픔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2013년 7월 말 현재 약 13만여 명(12만8824명)이 신청한 이산가족 상봉희망 대기자 수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12만8824개의 인생극장이며 눈물이다. 그나마 그중 현재 7만2882명만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달 뒤 집계에서는 그 수가 얼마나 줄어들지 모른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주인공 사진사 정원처럼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앞두고 너무나 늦게 알아버린 사랑의 감정에 애달파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을 평생 안고 애달파 하다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에 더욱 사무치게 애달파 하는 이산가족 이웃들이 13만 여 명에 달하는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 뉴스나 다큐멘터리에 단골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노랫말이 있지만, 이제는 누가 이 사람을 알더라도 만나지 못하는 세월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산가족 상봉은 더욱 시급한 남북한의 인도적 과제이다.
정부도 이를 의식한 듯 지난 8월 5일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를 열어 67억 상당의 대북 인도적 지원을 결정하면서 이중 이산가족 영상편지 제작 사업에 7억8900만 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직접 만나지 못하면 디지털 영상편지라도 남겨놔야 한다는 점에서 잘한 일이다. 하지만 시대가 흘러도 인간의 만남은 아날로그적이어야 한다. 나중에 이산가족들이 영상편지를 보다가 감정이 복받쳐 TV 스크린이나 컴퓨터 모니터를 끌어안아도 그건 디지털 기계일 뿐이다. 헤어진 내 부모형제가 아니다.
남북관계 발목 잡는 '연계론'의 덫을 피해야
지난 8·15 경축사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이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우려스러운 점은 그동안 남북관계 발전의 덫이 되어왔던 '연계론'의 망령에 이번 이산가족 상봉 제안도 발목 잡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연계론은 시시때때로 등장해 남북관계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 대표적인 것이 정치문제와 교류협력 문제의 연계이다. 즉, 핵과 미사일 같은 정치·군사 문제에 경제협력과 민간교류 문제 등을 연계시켜 남북관계 발전의 전반적인 기회의 창을 닫아버린 사례가 있었다. 1990년대 중반 김영삼 정부가 그런 우를 범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후 김대중 정부는 정경분리 원칙과 서로 다른 사안들에 대한 병행접근을 꾀해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의 물꼬를 튼 바 있다.
노무현 정부 당시에도 북한 핵문제가 있음에도 이를 일반 교류와 협력에 연계하지 않고 적극적이고 일관되게 평화정착의 대북접근을 병행하여 2007년에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의 시작이라는 큰 밑그림을 그리는 성과까지 낳았다. 물론 MB정부는 이를 모두 뒤집었지만 말이다.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 시절을 가리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했다. 북한에 퍼주기만 하고 얻은 것은 없는 10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온갖 정치·군사문제와 교류협력 문제를 연계시키고 나아가 국내정치적 이해관계까지 연계하여 남북관계를 악용한 그 이전 정권 50년이 오히려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있어 '잃어버린 50년'이다. 이제는 '잃어버린 50년, 다시 찾은 10년'의 프레임으로 당당하게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통일을 이야기해야 한다.
비록 그 상대인 북한이 우리의 이산가족 상봉제안에 금강산 관광 연계제안을 내놓고 관련 남북 실무회담을 판문점이 아닌 금강산에서 하자고 '간 보는' 제안을 해와도 우리는 연계론의 덫에 걸리지 말고 이산가족과 금강산 관광 재개 등 모든 현안을 병행접근하자는 과감한 수용과 역제안으로 나서야 한다. 이 점에서 요새 언론에 보도되는 이산가족과 금강산 관광 재개 '분리대응'이라는 용어도 '병행접근'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분리'라는 말 속에 상대의 의사는 상관없이 우리식대로 대응하겠다는 부정적 인식이 덧입혀질 수 있으니 '병행'이라는 단어사용으로 상대의 바람도 검토하며 접근하겠다는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아울러 북한도 금강산 관광 재개와 원산 관광지 개발 및 마식령 스키장 건설 등으로 강원도 일대의 국제 관광벨트 형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제 1순위 파트너가 될 수밖에 없는 남한을 배려해 이산가족문제와 금강산 관광을 연계하며 괜히 '간 보는' 생트집 제안을 하지 말아야 한다.
생트집 잡고 서로 '간 보는' 사이에 다음 달 이산가족 통계에서는 몇 명의 숫자가 지워질지도 모른다. 60년도 기다렸는데 6주일이나, 6개월 정도 더 기다리라고 말하는 건 인도적 처사가 아니다. 7만3000여 명의 생존 이산가족 중 나이 여든을 넘은 분들이 절반이다. 가족상봉에 대한 의지로 자기 생의 한계를 이겨내고 있는 분들이다. 이분들에게 이번 '8월'의 제안이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매듭지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 정대진님은 팟캐스트 <남북상열지사> 진행자이며 코리아연구원 협동연구원·북한통일학대학원연구협의회 대표로 활동 중입니다. 이글은 코리아연구원 홈페이지(knsi.org)에도 함께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