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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곳은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이다. 삼청동에 산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아 참 좋은 곳에 사시네요' 한다. 상대방에게 그저 호의를 표현하는 빈말일 수도 있지만, 이 동네가 좋은 것은 사실이다.

오백년 조선왕조의 법궁인 경복궁의 북동쪽, 조선 초 청백리 맹사성이 퇴청 후 피리를 불었다는 북촌이 자리한 동네. 북쪽으로는 북악산, 서편에는 인왕산. 높지 않게 둘러친 산세에서는 어딘지 모를 기품이 느껴진다. 광화문 사거리까지 차로 5분. 시내와 매우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산 아래여서 그런지 공기도 분위기도 완전히 다르다. 한 늙은 주민에게서 들은 얘기로는, 장마철에도 폭우가 비껴가고 겨울에도 한파가 덜 분다고. 믿거나 말거나.

그래서일까. 이곳에 산 지 5년째인데, 그동안 이삿짐 차량을 본 적이 별로 없다. 가구 수가 적기도 하지만, 일단 살게 되면 터를 잡고 오래 사는 집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던 이 동네가 요즘 변하고 있다. 주말마다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이제 인사동 상권은 죽고 삼청동이 대세란다. 한국 사람만이 아니라 지도를 들고 돌아다니는 일본인, 중국인 관광객까지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들의 지갑 속 돈을 노린 경쟁도 치열하다. 언제부터인가 뚝딱뚝딱 망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저 아래 카페 거리를 중심으로 자꾸만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다. 건물을 한옥으로 올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내기도 하고, 일부러 녹이 슬은 간판을 달아 인위적으로 오래된 느낌을 내기도 한다. 새로 지은 건물에는 보통 커피전문점이나 옷가게, 액세서리 가게가 입점한다. 대기업 브랜드의 지점이 대부분이다. 

삼청동의 오래된 골목. 골목마다 서려있던 이야기들은 거대한 외부의 힘에 밀려 자취를 감추어간다.
 삼청동의 오래된 골목. 골목마다 서려있던 이야기들은 거대한 외부의 힘에 밀려 자취를 감추어간다.
ⓒ 임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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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속성으로 문을 연 점포들 중에 오래 버티는 곳은 많지 않다. 짧으면 석 달, 길면 여섯 달. 새로 문을 연 가게는 어느 샌가 다시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가고, 며칠 뒤엔 다른 가게로 바뀌어 있다. 액세서리 가게에서 커피숍으로, 커피숍에서 다시 옷가게로. 이 동네에서 오래 장사를 한 가게는 정말이지 손에 꼽을 정도다.

내 방 창문을 열면 바로 내려다보이는 동사무소 옆 건물에 오래된 다방이 하나 있었다. 침침한 조명 아래 커다란 소파가 놓여있는 진짜 옛날식 '다방'. 다방 앞은 오랫동안 마을버스 정류장이었다. 아마도 수십 년 그 자리를 지켰을 그 다방이 재작년에 드디어 버티지 못하고 업종을 바꿨다. GS25 편의점으로. 개업하는 날 가게 앞에는 '새마을운동 부녀회', '○○○당 삼청동지회' 등의 리본이 달린 화분 수십 개가 놓였다. 괄괄하고 사람 좋게 생긴 주인 아줌마가 여전히 편의점 계산대를 지켰다.

편의점은 이제 그 자리에 없다. 대신 '아리따움'이라는 대기업 화장품 가게 간판이 번쩍이고 있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가게 앞에 간이 의자를 내놓던 주인 아줌마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오래된 다방이 사라진 그 자리엔 대기업의 축재 수단일 뿐인 화려한 쇼윈도가 행인들을 유혹한다.

이제 삼청동엔 더 이상 이야기가 없다. 돈이 된다 싶으면 그곳이 어디든 득달같이 달려드는 자본만이 기세를 떨칠 뿐. 밤늦도록 울려 퍼지는 망치 소리, 평화가 사라져버린 주말. 동네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은 하루가 다르게 씁쓸하다. 삼청동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식량닷컴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삼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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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사람들을 무의식적인 소비의 노예로 만드는 산업화된 시스템에 휩쓸리지 않는 깨어있는 삶을 꿈꿉니다. 민중의소리, 월간 말 기자, 농정신문 객원기자, 국제슬로푸드한국위원회 국제팀장으로 일했고 현재 계간지 선구자(김상진기념사업회 발행) 편집장, 식량닷컴 객원기자로 일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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