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이 여성상위 시대라지만, 여전히 시골 면단위에 가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보수적이다. 여성이라면 살림 잘하는 현모양처를 최고로 친다. 사회 활동하는 여성에 대해선 점수가 그리 후하지 못하다. 이런 척박한 농촌에서 15년 동안 자신의 길을 걸어온 여성이 있다. 그녀가 바로 박승남(51)씨다.
젖소부인은 그녀의 운명그녀의 별명은 '젖소부인'이다. 젖소부인? 그건 그녀가 사는 일죽면에선 젖소 젖을 짜는 농가 주부를 부르는 일반명사와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그녀 또한 일죽면의 여러 '젖소부인'중 한 명인 셈이다. 동창회 때 간혹 눈치 없는 동창이 '젖소부인'이라 해서 그녀의 가슴을 힐끗 보다 서로 웃기도 한다고 했다.
이런 그녀가 '젖소부인'이 된 것은 타고난 운명일 게다. 이천에서 부모님이 목장을 크게 했다. 80년대 당시 평택, 화성, 용인 등의 청년들이 그녀의 집으로 목장 실습을 나올 정도였다고 했다.
그녀의 나이 꽃다운 20세 초반. 15~20명 식솔의 밥을 그녀가 해댔다고 했다. 살림 잘하고 야무진 그녀를 여러 총각들이 탐을 냈다고 했다. 그 중 한명이 지금의 남편이라는 귀띔까지 하는 바람에 우리는 서로 웃었다.
그 많은 총각들 중에 친정아버지의 눈에 들었던 사람 또한 지금의 남편이라고 했다. 남편의 성실함이 친정아버지의 눈에 들었다고 했다. 집안에선 "아무말 말아. 니 신랑은 광무인겨"라며 못 박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시골로 시집은 절대 안 간다"며 버텼다. 그러다 광무 씨가 몸이 아팠던 것. 병문안을 가서 든 그녀의 생각은 '이러다 사람 하나 잡겠다'며 결혼을 결심했다고 했다. 지금은 부부가 웃으며 "그 병이 상사병이었던가벼"라고 말했다.
가계부상 수상하면서 공공사회에 눈을 떠.88년도에 결혼 하고 이천에서 일죽으로 시집와서 바로 집안경제부터 챙겼다고 했다. 그 때부터 7~8년 이상을 목장 농사에 매진했다. 그 결과, 남들이 20년 해서 벌어들일 걸 7~8년에 이루어 냈다고 했다. 남편의 성실함과 아내의 야무짐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야무진 주부생활로 인해 94년도엔 경기도로부터 '가계부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살림 잘하는 농촌 여성으로 경기도에서 공식 인정해준 셈이다.
이런 계기로 인해 그녀가 일죽면이라는 공공사회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이 받은 상이 일죽면의 공공사회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함을 알았다. 그동안 새마을 부녀회, 농가주부모임, 일죽면 사무소 등에서 주요한 사회활동을 해왔다. 지금은 일죽면 자치위원회 간사를 하며 굳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녀가 이런 길을 택한 것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왔다. 이천에 살 땐 지역유지급인 '누구네 집의 딸'로 살았지만, 일죽에 시집오니 그런 입지가 없었다고 했다. 자신이 노력해서 집안의 입지를 올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뿐만 아니라 자녀가 결혼할 때도 부끄럽지 않은 집안 내력을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했다.
활동하다가 보니 자아발견과 자아성장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자신의 끼를 발견해서 자신을 성장시키고, 지역사회에 기여도 하고, 집안도 일으키는 3가지 유익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멋쟁이 젖소부인', 그저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그녀는 농가주부라고 허름하게 차려입고 다니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일할 땐 일복이지만, 바깥으로 활동하러 갈 땐 캐리우먼처럼 차려입고 다녔다. 농사하는 모습 그대로 좀처럼 보여주지 않다보니 한동안 사람들은 그녀가 농사하는 여성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했다.
한 번은 농가주부모임으로 대외적 만남을 하다가 "당신은 농촌여성도 아닌데 여기 왜 왔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고 했다. 그녀의 세련된 패션과 외모만 보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센스 있는 한 여성은 말했단다. "손을 보니 당신은 천생 농촌여성이 맞네요"라고.
그렇다고 고가의 옷은 그녀도 사절이다. 질 좋은 옷을 싸게 사는 길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상설할인매장 등을 꿰뚫고 있다고 했다. 이것 또한 그녀만의 라이프스타일이며, 그녀만의 자존심인 듯 했다.
인터뷰 하면서 내가 떠올린 그녀의 별명, 바로 '멋쟁이 젖소부인'. 외모도 외모지만, 그녀의 삶이 멋있으니까. 자신 또한 처녀 때는 시골로 시집 안 가겠다고 버텼지만, 시집간 후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걸 개척해서 오늘 날의 '농촌사회 활동가 박승남'으로 만든 거다. 뿐만 아니라 자녀 둘을 대학졸업 시키고, 남편의 묵묵한 성실함을 빛나게 한 '주부 박승남'이니 말이다.
그녀는 자신을 '오리인생'이라 했다. 오리가 호수위에서 평온하게 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물속의 오리발이 쉼 없이 헤엄치고 있듯, 자신 또한 바깥에서 보기엔 한가롭게 사회활동이나 하는 여성으로 보이지만, 남편과 자녀와 농장을 모두 챙겨야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몇 배로 바쁜 여성이라 했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소젖 짜러 갈 시간이라며 일을 서둘렀다. 이런 그녀에게 자녀들이 들려 준 말 한마디가 가슴에 짠하게 와 닿았다고 했다.
"시골에 살면서 깨어 있는 엄마가 자랑스럽고 고마워요." 덧붙이는 글 | 이 인터뷰는 지난 23일, 박승남 씨와 그녀의 남편 이광무 씨가 경영하는 젖소 목장에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