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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어른이 된 제자가 찾아와 함께 술 한 잔 나누는 건, 교사로서 가장 큰 보람 중 하나다. 요즘처럼 대학 졸업이 곧 실업인 현실에서, 대기업에 취직했다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업어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 어엿한 경찰이 되어, 제자 하나가 옛 담임선생님을 찾아왔다. 군에서 제대한 후 잠깐 만났으니, 얼추 10년만이다.

경찰 생활을 시작하기에는 많이 늦은 나이다. 대학 졸업 후 노량진에서 무려 7년을 보내는 등 천신만고 끝에 시험에 합격했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렇다고 대학에서 전공한 분야도 아니지만, 한두 해 취업에 실패하다보니 경찰 시험 쪽에 눈이 가더란다. 지금은 SNS 프로필에 제복을 입은 사진을 올려놓을 만큼 스스로 대견해하는 듯하다.

술자리에서 봇물 터지듯 쏟아내는 그의 합격 이야기는 차라리 무용담이었다. 또래 남자 아이들의 단골 메뉴인 군대와 대학생활에 관한 것은 고사하고, 그 흔한 연애담조차 들을 수 없었다. 오로지 '노량진' 이야기가 전부였다. 20대에서 30대 초반까지 10여년의 기억은 그곳에 멈춰 있었고, 그에게 있어 '청춘'이란 오직 취직을 위한 몸부림과 동의어였다.

술이 불콰해질 무렵,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이 안줏거리가 됐다. 주말마다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촛불집회를 통제하느라 욕본다며, 우리나라 경찰의 주요 업무가 치안 담당인지 시위 진압인지 지금도 헛갈린다는 등의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 국정조사 때 증인으로 나온 경찰들의 '연기'를 두고, 술자리 사제지간의 '갈등'이 시작됐다.

경찰 조직의 생리를 너무 일찍 깨달은 제자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현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이 지난 1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증인심문에 응하고 있다.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현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이 지난 1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증인심문에 응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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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국정조사 청문회를 통해 양심적인 경찰의 아이콘이 된 권은희 송파서 수사과장의 당당한 모습을 더없이 부럽고 존경한다면서도, 상명하복의 위계질서가 뿌리 깊은 경찰 조직을 감안하면 무모한 행동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으니 당장 '손을 보진' 않겠지만, 여론이 잠잠해지면 '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며 경찰 내 솔직한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면서 권은희 과장과 달리, 질문과는 상관없이 미리 준비한 '모범답안'만 읽은 선배 경찰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얼마 전 검찰에서조차 위계질서가 엄격한 국정원과 경찰 특성 상 상급자의 명령에 복종한 하급자들을, 설령 그것이 부당한 지시였다고 해도, 처벌할 수 없다고 공공연히 밝힌 터에, 그들은 '눈치껏' 행동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고 보면, 양심선언 한답시고 튀어봐야 돌아오는 건, 잘 해야 '왕따'고 나쁘면 '퇴출'인 경찰 조직의 생리를 그는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것이다. 국정원이든 경찰이든 충성을 강요하는 조직에서는 소신과 양심은커녕 발 빠른 처세술이 대세라는 현실 인식을 스승 앞에서 태연하게 들려주었다. 그는 너무 일찍 닳아버린 걸까.

심지어 국정원 직원 김하영을 두둔하는 부분에서는 어안이 벙벙했다. 자기처럼 어렵게 국정원에 취직한 친구의 사례를 들어, 비슷한 처지를 겪어본 사람 입장에서 이해 못할 바 아니라고 했다. 적어도 그녀에게 댓글의 불법성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세간의 손가락질이 그저 억울하게 느껴질 뿐이고, 일단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도 조직의 명령에 더 철저하게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 분석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자기와 친구의 경우처럼 천신만고 끝에 합격한 국정원 정규직이라면, 더욱더 양심을 속이고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 했다. 말하자면, '어떻게 취직한 자리인데, 직을 포기하겠느냐'는 것이다. 오매불망 취직을 위해 청춘을 다 보낸 이들에게 '불법'도, '양심'도, '민주주의'도 모두 취직의 하위개념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만약 자신에게도 이번 일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비록 고민도 하고 마음 한 구석이 많이 불편은 하겠지만, '김하영'을 선택하지 섣불리 '권은희'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 동기들끼리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생각과 선택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단다. 말끝에 이런 '관용구'를 덧붙이면서.

"어떻게 합격했는데…."

'피 끓는' 중년과 '노쇠한' 청년

이번 국정조사 청문회를 보면서 느낀 우리 사회에 대한 절망감을 취직했다고 기쁘게 찾아온 제자를 통해서 '복습'하게 된 꼴이다. 국정원과 한통속인 여당과 무기력한 야당의 지루한 공박 속에 국정조사가 조롱받는 현실보다, 사실 두 주인공 '권은희'와 '김하영'의 극단적인 대비가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지금껏 이렇게 알고 있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시나브로 보수화하고, 앳된 청춘일수록 정의롭고 평등에 민감하다고. 거친 비유지만, '젊어서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심장이 없고, 나이 들어서도 사회주의자이면 머리가 없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그런데, 두 주인공은 그러한 '편견'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렸다. 우스갯소리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해야 하나.

당당한 표정으로 시종일관 차분하고 명쾌하게 답변하며 정의와 양심을 보여준 권은희 과장은 40대를 바라보고, 차단막으로 얼굴을 가리고 '김직원'이라는 팻말로 이름마저 숨긴 국정원 직원 김하영은 20대의 청년이다. '피 끓는' 중년이었고, '노쇠한' 청년이었다. 차라리 둘의 입장과 청문회 모습이 바뀌었다면, 이렇듯 참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한 명의 '노쇠한' 청년인 제자에게 책망하듯 물었다. '지난 몇 년 간 읽은 수십 권의 책 중 수험서가 아닌 건 단 한 권도 없었다'고 푸념하는 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조금은 심한 비약이었다 해도, 그를 2년 넘게 가르친 교사로서 자책하는 것이기도 했다. 목이 터져라 정의를 가르쳤건만, 아이들이 현실의 벽에 부딪치는 순간 '헛된 이상'이 되고 마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80여 년 시간을 거슬러 지금의 현실을 대입해보자. 힘들게 얻은 취직자리에 연연해 양심을 속이고 맹목적으로 조직에 충성하는 이 시대 젊은이들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를 한 민족반역자들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민족반역자들 중에도 어려운 시절 먹고 살기 위해서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기꺼이 친일에 나선 이들이 많다.

거칠게 말해서,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정의를 세우려는 '인간' 권은희와 양심과 영혼을 팔고 기꺼이 국정원의 '부속품'이 된 김하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로 치환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고 했건만, 고작 밥줄에 연연해 양심을 속이고 정의를 조롱해서야 되겠느냐."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 시대의 도래

국가정보원 댓글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위 2차 청문회가 지난 19일 오후 국회에서 열렸다. 댓글사건 당사자인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가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이 적힌 자료를 보고 있다.
▲ '김직원'의 모범답안 국가정보원 댓글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위 2차 청문회가 지난 19일 오후 국회에서 열렸다. 댓글사건 당사자인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가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이 적힌 자료를 보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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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제자는 빗대어 자신을 꾸짖는 스승에게 말대꾸하듯 하소연했다.

"선생님은 저희 세대가 겪고 있는 최악의 취업난에 대해서 이해 못하실 거예요. 언제부턴가 해가 가도, 정권이 바뀌어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체념만 가득하고, 취직만 할 수 있다면, 웬만한 뇌물 정도는 선물처럼 여기는 세태입니다. 누구 말마따나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거죠.

지난 번 대구과학관 채용 비리가 터졌을 때, 제 주변 친구들이 맨 먼저 뭐랬는지 아세요? '저런 나쁜 ×들'이라는 말보다, '재수 없이 걸렸지만, 저런 부모를 둔 사람들이 부럽다'는 것이었어요. 어차피 쟤네들이 다른 곳에 취직을 못하겠어요?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만 기다리면 되니 마냥 부러울 수밖에요.

취직에 목매단 저희 세대에게 '소신껏 살라', '양심을 속이지 말라', '정의롭게 살라'는 등의 기성세대의 충고는 되레 '너나 잘 하세요'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 십상이에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노량진에서 7년 동안 '컵밥' 먹으면서 뼈저리게 후회한 것이 있어요. 바로 대학 시절 한두 해 동안 '운동'한답시고 취직 공부에 아예 관심을 껐던 거예요."

제자와의 즐거운 만남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 채 끝났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됐다. 우리 시대 청년들의 정의와 불의에 대한 감수성은 오로지 '취직 여부'에 의해 갈린다는 사실을. 바야흐로 극심한 취업난을 타고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 시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아니 이미 도래했는지도 모르겠다.


태그:#국정원 국정조사, #취업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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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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