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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전쟁이다

무이산을 방문한 강택민의 시비
 무이산을 방문한 강택민의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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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30분에 호텔을 출발한 버스가 15분 만에 무이산 경구 남쪽 입구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표를 끊고 들어가면 그곳에 전동관광차가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출입구 앞이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중국인 가이드인 왕천(王天)이 먼저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백방 노력하지만 별 수 없는 모양이다. 우리더러 줄을 서란다. 시진핑(習近平) 주석 취임 후 공직기강이 제대로 서, 급행료나 새치기가 통하지 않는 사회로 변하고 있다고 한다. 한 바탕 전쟁을 치르고 난 후 우리는 무이산 풍경명승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은 많지만 그래도 풍경구 안은 쾌적한 편이다. 관광전동차를 타고 우리는 천유봉 경구 입구까지 이동한다. 강변로를 따라 가로수가 잘 조성되었고, 그 길을 전동차가 달린다. 오른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숭양계(崇陽溪)로 무이궁 대교 부근에서 구곡계와 만난다. 전동차는 무이궁 대교를 건너지 않고 옥녀봉 쪽으로 직진해 다원(茶園) 근방에 우릴 내려준다. 이곳에서부터 우리는 걸어서 천유봉까지 가야 한다. 이곳 다원에는 무이산시 다엽(茶叶)연구소가 있다. 무이산 차를 상업적으로 재배해서 판매하는 기업에서 운영하고 있다.

대나무 뗏목 주파이
 대나무 뗏목 주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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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무이산 차가 천혜의 자연, 생태적인 조건, 예술적인 경지의 차 만들기 공정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자랑한다. 우리는 무이산 암차를 알기 위해 오후에 대홍포로 갈 예정이다. 차연구소에서 다시 상류로 5분쯤 올라가자 다리가 나온다. 5곡 대교로 구곡계의 중간쯤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 다리를 건너면서 구곡계를 타고 내려오는 수많은 대나무 뗏목들을 살펴본다. 사공 두 명이 앞과 뒤에서 노를 젓고, 그 안에 6명이 타고 내려간다.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어서 편하고 안전해 보인다.

5곡 대교 지나 천유봉 가는 길

5곡 대교를 지나면 무이정사(武夷精舍)가 나타난다. 무이산의 학문 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무이정사는 남송(南宋)의 대표적인 유학자 주희(朱熹 : 1130-1200)가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은병봉(隱屛峰) 아래 설치한 서원이다. 그는 1183년 이후 무이정사에 은거하며 무이구곡가를 짓고 성리학을 완성했다. 그러나 무이정사는 그 후 폐허화되었다가 주자 서거 800주년인 2000년 건축을 시작해 2002년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되었다.

무이정사 평면도
 무이정사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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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왼쪽에 주자 동상이 있고, 그 앞에 무이정사라 쓴 패방이 있다. 이곳을 지나면 전청(前廳)이 나오는데 학달성천(學達性天)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학달성천은 배움을 통해 천성에 이른다는 뜻이다. 여기서 천성은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을 말한다. 전청을 지나면 중청(中廳)이 나온다. 이곳에는 정중기상(靜中氣象)이라는 현판과 신도비가 있다. 정중기상은 조용한 가운데 기가 번득인다는 뜻으로 주자의 성품을 표현하고 있다. 신도비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인데, 글을 지은 사람과 세운 연대 등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중청을 지나면 인지당(仁智堂)이라는 강학당이 나온다. 이곳에는 이학정종(理學正宗)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건물 안에 주자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학정종은 명청대 이후 쓰인 말로 성리학의 정통이란 뜻이다. 그리고 그 영정 앞쪽 위에 만세종사(萬世宗師)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영원한 큰 스승이라는 뜻이다. 인지당 앞 좌우에는 학생들의 기숙사에 해당하는 지숙료(止宿寮)와 은구실(隱求室)이 있다. 전체적으로 짜임새는 있지만 건물이 너무 붙어 있어 답답한 느낌이다.

바위로 이루어진 천유봉
 바위로 이루어진 천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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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정사를 지나면서부터 천유경구가 시작된다. 그래서 이곳에서 표를 제시한 다음 본격적인 산행에 나서게 된다. 경사가 시작되고, 앞으로 암봉이 나타난다. 우리는 먼저 호랑이 동굴로 들어선다. 그리고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이후 길은 오르락내리락 하며 바위산을 넘는다. 중간 중간 정자도 있고 쉴 곳도 있지만 아직 경치가 그렇게 좋지는 않다. 언뜻언뜻 천유봉으로 오르는 사람들의 행렬이 보이고, 벽에 새겨진 붉은 각자(刻字)도 보인다.

대표적인 글자가 천일서한(天一暑寒)과 수운료(水雲寮)다. 천일서한이라면, 더웠다가 추워지는 것을 반복하는 하늘이라는 뜻일까? 그럼 수운료는? 글자가 깎아지른 암벽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으니 암벽 이름이 틀림없다. 물이 구름을 이루는 집 정도로 해석하면 어떨까? 근처에 천유폭포가 있으니까. 경치도 점입가경이지만, 글자도 점입가경이다.

다동과 선욕담을 지나면 가파른 계단길이

선녀가 목욕했다는 선욕담
 선녀가 목욕했다는 선욕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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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산의 일부를 넘고 또 우회하면서 우리는 다동(茶洞)에 이른다. 다동은 말 그대로 차를 재배하는 마을이다. 그렇지만 이곳의 다른 이름은 오화동(五華洞), 승선동(升仙洞)이다. 다섯 개 화려한 봉우리가 감싸고 있어 오화동이 되었다. 선유암, 옥화봉, 은병봉, 접순봉, 천유봉이 그것이다. 승선동은 말 그대로 선계로 오르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곳 다동에서 천유봉으로 오르기 전 우리는 줄을 선다. 길은 외줄기인데, 몰려드는 사람이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줄을 따라 가다 우리는 선욕담을 지난다. 선녀가 목욕하는 못이라는 뜻이다. 천유폭포 아래 형성된 작은 연못인데, 폭포물이 떨어지질 않아 물이 거의 없는 상태다. 다동에서 천유봉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바위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다. 이것을 사람들은 공산당길이라고 부른다. 가파르지만 시간이 적게 걸리고 조망이 좋기 때문이다. 이 길은 840개의 계단을 통해 천유봉으로 이어진다.

6곡을 돌고도는 주파이의 행렬
 6곡을 돌고도는 주파이의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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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은병봉과 운와를 우회해 천유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국민당길이라고 부른다. 완만한 숲길로 시간이 좀 더 많이 걸리고 볼거리가 덜 하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공산당길로 올라갔다 국민당길로 내려간다. 요즘처럼 관광객이 많을 때는 공산당길에서 상하로 교차하는 게 불가눙하기 때문에 일방통행을 시킨다. 가파른 계단길에는 난간이 있어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사람이 많아 조심해야 한다.

계단을 오를수록 점점 조망이 좋아진다. 앞쪽으로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접순봉(接筍峰)이 가까이 보이고, 조금 더 멀리 구곡계의 흐름이 눈에 들어온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곳이 7곡, 6곡, 5곡으로 이어지는 물길이다. 7곡이 시작되는 뇌공탄(賴控灘)에서 향성암(响聲岩)을 굽이돌아 5곡으로 이어진다. 그 물길을 따라 대나무 뗏목인 주파이(竹筏)가 끝없이 내려온다. 주파이는 타는 것도 즐겁지만 보는 것도 즐겁다.

인산인해로 발 디딜 틈이 없어

천유봉을 오르는 인간띠
 천유봉을 오르는 인간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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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유봉 오르는 길은 완전하게 두 줄이다. 줄을 벗어나 추월한다든지 잠시 서서 경치를 감상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그냥 줄을 따라가면서 아래 위를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 천유봉 쪽을 올려다보고 구곡계 쪽을 내려다보면서 잠깐 잠깐씩 무이산 봉우리와 골짜기가 만들어내는 장관을 감상한다. 그런데 더 장관인 것은 천유봉을 오르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인간띠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소리는 가끔 들어봤지만, '사람이 산보다 아름다워'는 이곳의 풍경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다.

이처럼 인간띠가 장관인 것은 그 띠가 원을 그리기 때문이다. 천유봉을 오르는 사람들의 둥근 선과 그 아래 구곡계를 내려가는 주파이의 긴 줄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이곳에서는 무이산의 상징인 대왕봉, 대장봉, 옥녀봉 등은 안 보인다. 저 멀리로 무이산맥의 연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무이산맥은 이웃 강서성(江西省)과 경계를 이룬다. 천유봉에 가까워지자 이제는 구곡계의 뗏목이 더 잘 보인다. 봉우리 사이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잘도 내려간다. 뗏목이 이처럼 잘 보이는 것은 뗏목을 탄 관광객이 붉은색 구명조끼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천유봉 정상의 천유각
 천유봉 정상의 천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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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유봉의 입구에는 천유라는 붉은색 글자를 새긴 돌이 세워져 있다.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은 표석으로, 드디어 우리가 천유봉에 올랐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천유란 하늘나라 놀이터라는 뜻이지만, 천유봉은 그냥 천상계의 봉우리 정도로 해석하면 좋겠다. 그런데 이 봉우리에 평평한 대지가 자리 잡고 있다. 봉우리라면 대개 뾰족한 바위를 연상하는데, 이곳에는 2층 전각과 큰 마당이 있다. 과장하면 작은 운동장 정도다.

이곳에도 역시 사람들로 북적인다. 관광객과 장사꾼이 어우러져 시끌벅적한 시장판을 이루고 있다. 물과 차 그리고 음료수 장수, 과일 장수, 엿 장수, 음식 장수 등이 마당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마당의 북쪽으로 천유각이 있는데, 이것이 천유봉의 상징이다.

천유각에는 팽조(彭祖) 삼부자상이 모셔져 있다. 팽조는 고대 중국의 신선으로 800세 이상 장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현판에 오유소한(遨游霄漢)이라 쓰여 있는데, 하늘나라에서 즐겁게 논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천유각은 하늘나라 사람들이 노니는 집이 된다. 도교적인 발상에서 나온 전각이다.

송미령 무청 엣터를 알리는 표지판. 왼쪽 위로 장개석 송미령 부부 사진이 보인다.
 송미령 무청 엣터를 알리는 표지판. 왼쪽 위로 장개석 송미령 부부 사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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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천유각 2층에 송미령무청구지(宋美齡舞廳舊址)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장개석 총통의 부인이었던 송미령(1898-2003) 여사가 이곳으로 휴가를 와서 무도회를 열었던 방이라는 뜻이다. 무청은 요즘 말로 하면 무도회장 또는 댄스홀이다.

중화민국의 몰락으로 장개석과 송미령의 빛이 바래긴 했지만, 그녀는 중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여걸이었다. 유창한 영어구사로 1930년부터 남편인 장개석 총통의 통역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또한 사교성과 카리스마를 동시에 갖추고 있어 20세기 세계사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이 되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된 지금 그녀는 대륙에서 권력지향적이고 부패한 여성으로 폄하되고 있다. 무청구지라는 편액도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높은 곳까지 와서 무도회를 열 정도로 그녀가 사치하고 자기중심적이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2층의 무청 바깥으로는 난간이 있어 자연스럽게 건물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남쪽에서는 천유각 앞쪽 광장이 내려다보인다. 동쪽에서는 대왕암의 윗부분을 볼 수 있다. 북쪽에서 내려다보니 내려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우리는 이제 그 국민당길로 내려갈 것이다.


태그:#무이산, #천유봉, #무이정사, #천유각, #주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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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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