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찢어진 워커(1952. 7. 5.)
 찢어진 워커(1952. 7. 5.)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양잿물

어느 날 순희는 처음으로 맞춘 양장옷에다 하이힐을 신고 데이비드의 통역 겸 안내로 의정부 가능동을 함께 지나갔다. 그때 동네 아이들이 개천에서 노래를 불렀다.

양갈보 양갈보
어디를 가느냐
빼딱구두 신고서
어디를 가느냐…

그 노래는 동요 <산토끼>를 개사한 것으로, 동네 아이들이 순희를 겨냥해 불렀다. 순희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 아이들을 노려보자 그 가운데 한 아이가 쌍욕을 하며 돌팔매질을 했다. 다른 아이들은 조소와 야유를 보냈다.

"야, 양갈보! 양키 X이나 빨아라."

그 돌멩이에 순희 가슴팍을 정통으로 맞고 멈칫하자 데이비드가 감쌌다. 곧 데이비드가 권총을 뽑아들고 아이들을 뒤쫓았다. 그제야 아이들은 잽싸게 도망갔다. 순간 순희는 데이비드를 뒤따르며 소리쳤다.

"오, 노(No)! 노우(No)!"

순희의 적극적인 제지에 데이비드는 권총을 거두고 아이들의 추적을 멈췄다. 그날 순희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 순희는 곧장 데이비드와 헤어진 뒤 집에 돌아오면서 동네 가게에서 양잿물을 한 덩이 샀다.

세상이 싫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제 물건이라면 아귀처럼 덤비지만, 미군부대에 근무한 노무자, 특히 여성에 대한 멸시는 매우 심했다. 순희는 그동안 쌓인 그에 대한 분노와 그날 있었던 심한 모멸감 그리고 자신의 변신에 대한 스스로의 부끄러움 등으로 더 이상 이 세상에 살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한때 순희는 미제를 타도하는 인민군 부대의 간호전사가 아니었던가. 그날 밤 순희는 잠자리에서 가족 몰래 양잿물 녹인 물 사발을 들이켰다.

옛 흔적이 남아 있는 의정부 미제2사단 앞 철길(2013. 8. 25.).
 옛 흔적이 남아 있는 의정부 미제2사단 앞 철길(2013. 8. 25.).
ⓒ 박도

관련사진보기


"얘, 순희야!"
"언니!"
"누나!"
"순희 누나!"

어머니가 곁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동생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순희는 비몽사몽간 그 소리에 눈을 떴다. 의정부 어느 병원 입원실이었다. 가족들이 눈덩이가 붓도록 울고 있었다. 순희는 가족을 보니까 과거는 모두 잊어 버리고, 그들을 위해 더욱 독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울컥 치솟았다. 그리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래, 나는 이미 유학산에서, 낙동강에서, 구미 낙동강에서, 신평동 사과밭에서, 신탄진 금강 다리 위에서 네 번이나 죽은 몸이야.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들은 계속 거지 신세를 면치 못할 거야. 최순희는 이 순간부터 새로 태어나는 거다. 그래, 난 가족들을 위해 인당수에 제물이 된 심청이가 되는 거야!'

미군부대 옆 세탁소집 딸(1954. 3. 4.).
 미군부대 옆 세탁소집 딸(1954. 3. 4.).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데이비드의 구애

순희가 입원하고 있는 동안 데이비드가 날마다 병원으로 문병을 왔다. 그가 문병 올 때는 꽃다발을 가지고 오든지 아니면 맛난 양과자나 과일·주스 등을 한아름 사왔다. 그의 문병은 의례적이 아니라 매우 성실하고 진지했다. 그의 말은 매우 달콤했고, 진정성이 묻어 있었다.

순희는 병상에서 누워 곰곰이 생각하자 자기 가족에게는 돈과 함께 든든한 울타리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순희네는 야반도주로 몰래 이사를 다녀도 경찰은 용케 이들을 추적하고는 걸핏하면 '좌익 가족'이라고 꼬치꼬치 집안사정을 조사해 갔다. 순희는 그게 몹시 싫었다.

순희는 이번 일로 경찰이나 한국군도 미군은 터치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미군 앞에서는 그들이 알아서 절절 긴다는 사실도 알았다. 특히 한국군은 걸핏하면 미군부대로 지프차를 몰고 와서 휘발유가 떨어졌다고, 손짓 발짓과 함께 엉터리 영어로 비굴하게 굴며 구걸해 갔다. 경찰들도 마찬가지였다.

순희는 일주일 만에 퇴원하고 사흘을 집에서 더 가료한 뒤 출근했다. 그 뒤 순희는 데이비드의 끈질긴 구애를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아니 데이비드의 구애는 자기 집안을 살리는 밧줄로 순희가 오히려 그것을 기다렸다.

한때 순희는 데이비드가 미국인이라는 데 거부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순희가 미군부대에서 근무해 보니까 그들은 여성에게 매너가 무척 좋았다. 그네들은 진정으로 여성을 동등하게 대할 뿐 아니라, 어린이나 약자를 보호하는 그들 사회의 기본 정서가 순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순희는 그게 서구 사회의 힘으로 그들이 왜 선진국인가 그 나름의 까닭을 알았다. 여성도 가사에 얽매지 않고 남성과 똑같이 사회 참여를하는 그런 풍토가 좋았다.

순희가 데이비드를 사귄 뒤부터 순희네는 점차 가난에서 벗어났다. 이제 순희네는 의용군 가족도, 부역 혐의로 청년단에 처형당한 좌익 집안도 아닌, 미군 상사가 순희네를 비호하는 피엑스 물건 도매상으로, 피엑스 아줌마집이 됐다.

의정부 가능동 개천, 한국전쟁 직후 이 일대는 판자촌으로 주민 대부분 미제2사단에 의지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의정부 가능동 개천, 한국전쟁 직후 이 일대는 판자촌으로 주민 대부분 미제2사단에 의지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 박도

관련사진보기


국제결혼

1950년대 한국 사람으로 미국에 간다는 것은 극히 일부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가능했다. 외교관이나 유학생 등 그 수는 아주 손꼽을 정도였다. 일반인으로서 미국에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가장 손쉬운 방법은 한국 여인들이 미군과 국제결혼을 해 그 남편을 따라 가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여성들 가운데는 일부러 미군을 사귀는 일이 생겨날 만큼 미군과 국제 결혼하는 것은 일부 사람에게는 선망이 되기도 했다.

초콜릿과 츄잉검 그리고 버터와 우유·자동차의 나라 미국…. 순희에게도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는 선망과 동경의 나라였다. 미국에서는 언제나 미제 물건을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사고, 마음껏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과 공기조차도 미제다. 한국 사람으로 그 넓은 미국 땅을 밟는 것조차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순희는 데이비드의 마음을 사로잡은 뒤, 어쨌든 미국 땅을 밟기 위해 굳이 피임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데이비드와 동거한 지 1년 만에 피부색이 하얗고 머리카락이 검은 아들을 낳았다. 그들 부부는 아들이름을 '존(John)'이라고 지었다. 곧 순희는 데이비드를 꼬드겨 정식으로 결혼 승낙을 받았다. 국제결혼 절차에는 한국인 보증인과 미국인 보증인 그리고 주둔 부대장의 사인이 필요했다. 데이비드는 순희의 요구대로 그 모든 국제결혼 절차를 잘 마무리해줬다.

마침내 순희는 데이비드의 부인이 됐다. 순희는 결혼한 뒤 자기 이름도 '제인(Jane)'으로 고쳤다. 순희는 데이비드의 포드 승용차를 얻어 탈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운전면허증을 따고는 그 포드승용차를 타고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수양버들 흐드러진 국도도 마냥 드라이브하기도 했다.

그는 그제부터는 데이비드가 가져다주는 피엑스 물건을 남대문이나 동대문 도깨비시장 상인에게 차떼기로 넘기며 한껏 부(富)를 누렸다. 순희네는 동생들의 학업을 위해 서울 수유리에다 새 집을 샀다. 그 무렵 수유리는 서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택지였다. 순희 바로 아래 동생 순옥은 여상을 졸업하여 은행원이 됐고, 남동생 진욱이와 진태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시카고 다운타운
 시카고 다운타운
ⓒ 이영(시카고 거주 재미동포)

관련사진보기


순희, 미국 땅을 밟다

1958년 가을, 데이비드가 먼저 귀국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데이비드는 곧 군에서 전역한 뒤 물류회사 창고 매니저로 취업했다. 이듬해 봄, 데이비드는 순희와 그의 아들 존을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그들은 시카고 교외의 그림처럼 아담한 집에 보금자리를 꾸몄다.

순희는 마침내 이뤄진 아메리칸 드림에 감격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갑자기 남편 데이비드가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그 사유는 회사 물건을 빼돌린 절도 때문이었다. 데이비드가 오랫동안 한국 피엑스에서 물건 빼내던 일이 그의 습관으로 회사에서 물건 빼돌리는 것을 쉽게 생각했다.

데이비드는 실직하자 손을 떨거나 갑자기 큰소리를 치는 등 전쟁공황장애에 시달렸다. 그는 그런 고통을 이기고자 알코올을 들이켰다. 차츰 알코올의 도수도 높아지고, 그 빈도도 잦아졌다. 데이비드는 음주 때문에 미국 정부가 주는 연금만으로는 생활비가 부족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시카고 교외의 집을 처분하고 도심 빈민가로 옮겼다. 데이비드의 전쟁공황장애는 날로 더욱 심해갔다.

1960년대 초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하게 되자 파월된 미군들의 전사자가 속출했다. 그러자 미 국방성에서는 미군 전역자 가운데 희망자는 현역으로 재소집을 하는 조치를 내렸다. 그 조치는 데이비드에게 생기를 되찾게 하는 구원이었다. 데이비드는 다시 군복을 입자 그의 고질병인 전쟁공황 장애도 사라졌다.

1964년, 데이비드는 월남전에 뛰어들었고, 그가 월남에 간 지 18개월 만에 성조기에 덮인 운구함에 그의 시신이 담겨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부대장과 동료 증언에 따르면, 데이비드는 가장 용맹스러운 미군 병사로 베트콩 소탕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순희는 데이비드가 월남 정글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믿음이 더 강했다. 그는 훈장과 많은 전사자 보상금을 순희에게 남기고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순희는 전사자 보상금으로 다시 시카고 교외 주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미 7사단 17연대 장병들이 혜산진 압록강 강변에다 성조기를 꽂고 있다(1950. 11. 23.).
 미 7사단 17연대 장병들이 혜산진 압록강 강변에다 성조기를 꽂고 있다(1950. 11. 23.).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재미동포가 보내준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이 기자의 최신기사"아무에게도 악을 갚지 말라"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