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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죄송합니다. 남도섬과 부산여행으로 보름 만에 집에 돌아와 인사가 늦어졌습니다. 진드기에 물린 가려움증은 나았는지요. 방에 벌레들은 몰아냈는지요. 그날 밤 닫은 약국문을 열어서라도 진드기에 안 뜯기고 주무시게 하고 왔어야 했는데, 아니면 다음날이라도 어떻게 하고 왔어야 했는데, 선생님께서 서울 일을 보러 가신다기에 할 수 없었지요.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 속에 현실에 어려움을 초탈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올해 초 <잠깐 비움> 시집을 시와 사상사에서 펴냈다.  2011년에는 <빛난 하루>시집과 산문집<진짜같은 가짜 가짜같은 진짜>산지니에서 펴냈다
▲ 신옥진 선생님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 속에 현실에 어려움을 초탈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올해 초 <잠깐 비움> 시집을 시와 사상사에서 펴냈다. 2011년에는 <빛난 하루>시집과 산문집<진짜같은 가짜 가짜같은 진짜>산지니에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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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부산 미광화랑에서 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우연히 들르신 선생님을 뵙게 되었지요. 반가워 절로 일어나 인사가 터져 나왔어요.

쌔앰, 안녕하셨습니까?
이 누꼬?
박거이입니다 예전에 공간에서 행위미술했던
으아 몇 년만이고~ 아트북 기획하는 작가라길래 누군가 했더니 오랬만이야
선생님 눈빛이 초롱합니다 안색도 좋으시고. 옷도 멋지고요 안경도 잘 어울려요.
그래 보이나. 나이가 들면 목욕도 자주하고 옷차림도 신경 쫌 써야 해. 이것도 써비스거든 으하하하..

선생님께 받은 산문집 <진짜 같은 가짜, 가짜 같은 진짜>, 시집 <빛난 하루>, <잠깐 비움>을 흥미롭게 번갈아 읽고 있습니다. 화상은 물론, 작가, 미술관계자, 애호가들이 꼭 읽어야 할 책입니다. 선생님만이 쓸 수 있는 미술동네 이야기를 아주 매력적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자화상 같은 시집 또한 일상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보게 하고 감흥을 불러 일으킵니다.

선생님의 거침없는 말씀 속에 웃음과 비웃음이 절묘하게 섞여 재미와 의미가 있었습니다. 채움과 비움, 죽음과 삶, 처음과 끝 서로 대비되는 삶의 이야기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팔다리를 긁는데 벌레에게 물려 빨갛게 발진한 모습을 보았지요. 여름철이고 하여 안쓰럽지만 그러려니 했습니다. 마침 여행 상비로 갖고 다니던 약을 살갛에 발라 드렸더니 남방을 벗고 바지도 아이처럼 훌러덩 벗어 내렸지요. 속옷 차림으로 드러나 감추어진 상처들은 놀랍게도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선생님 온 데 물렸어요. 어디서 주무셨어요, 이상한 데 가신거 아니예요? 
아니야, 집에서 잤는 데 그래.
셀 수 없이 많이 물렸어요. 요고는 새로 물렸네.
이렇게 물리고도 그냥 지내셨어요?

잠자코 가자는 곳으로 이끈 곳은 선생님이 사시는 집이었다. 오래된 아파트여서 복도가 어둡고 열쇠구멍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 신옥진 선생이 사시는 아파트 복도 잠자코 가자는 곳으로 이끈 곳은 선생님이 사시는 집이었다. 오래된 아파트여서 복도가 어둡고 열쇠구멍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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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이틀 물린게 아니라 매일 뜯긴 자국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마무리 하고 늦은 밤 화랑 문을 나서 잠자코 따라 오라고 하여 간 곳은 선생님 댁이었지요. 아파트 복도는 열쇠구멍을 끼워넣기 힘들 정도로 어둡고 낡아보였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반전이었습니다.

약, 편지뭉치, 돈, 서류들이 쌓여 있다. 사진은 오랜 친분을 맺고 있는 화가 이우환 화백과 함께 찍었다.
▲ 신옥진 선생님의 식탁 약, 편지뭉치, 돈, 서류들이 쌓여 있다. 사진은 오랜 친분을 맺고 있는 화가 이우환 화백과 함께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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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진 책, 그림 뭉치, 자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으니까요. 식탁 위에도 약과 돈, 서류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폭격 맞은 전쟁터가 따로 없었습니다. 옷의 겉과 속, 집의 밖과 속이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처음엔 이런 대비와 파격적인 생활을 예술처럼 즐기는 듯 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집 안은 앉을 공간이 없어 서성거려야만 했지요. 하룻밤 재워달라할 처지도 안 되었어요. 몸을 뉠 수 있는 공간은 달랑 침대 밖에 없고 홀로 주무시는 침대 위에는 오래 된 댓자리가 깔려 있었지요.

발 디딜 틈 없이 책과 자료들이 쌓여 있다. 사진은 경남도립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한 일로 감사의 뜻으로 김두관 경남도지사로 부터 명예 도민증을 받았다
▲ 신옥진 선생의 방바닥 발 디딜 틈 없이 책과 자료들이 쌓여 있다. 사진은 경남도립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한 일로 감사의 뜻으로 김두관 경남도지사로 부터 명예 도민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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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드기가 살기 딱 좋은 곳이었어요. 약 뿌릴 생각을 안 하셨을까요? 인체에 무해하다는 제품으로 몸이나 침대야 뿌릴 수도 있겠지만 예술품이나 자료에 살충제를 함부로 뿌릴 수 없는 저간의 사정도 있었을 거 같군요.

작품과 자료 수장고는 잠자리와 분리하여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상황임을 감지할 수 있으니 난감한 심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왼쪽 침대에 댓자리가 깔려 있고 방 여기저기에 비품과 소장품들로 빼곡하게 쌓여 있어 손님이 앉을 자리가 없다
▲ 신옥진 선생 방 왼쪽 침대에 댓자리가 깔려 있고 방 여기저기에 비품과 소장품들로 빼곡하게 쌓여 있어 손님이 앉을 자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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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애장 소장품을 전국의 공공미술관에 기증하셨습니다. 한두점이 아니라 800여 점 넘게. 그 가운데 몇 점만 팔아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 문제가 아닌가요.

수치로만 아니라 가치로도 뜻깊은 일을 그야말로 세상 하직할 사람처럼 기증하셨지요.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열악한 집에서 주무시는 모습이 당혹스럽고 놀라웠습니다. 그날 밤 저는 친구집으로 간다하고 나왔지만 가까운 피시방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선생님댁 방 바닥에 펜화 스케치가 놓여 있었어요.
필자가 '좋다'고 하자 주저없이 '가져'라고 얻은 작품.
▲ 신옥진 선생 소장품 필자가 '좋다'고 하자 주저없이 '가져'라고 얻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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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좋은데요 누구 작품이죠?
가져
네? 인쇄물인가요?
원화야
정말 주시는 거예요?
그럼!

달라고도 안 했는데 주저없이 저에게도 기증(?) 하셨어요. 나중에 이런 모습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비움의 미학을 작심하고 실천하시는구나. 그러나 정작 자신의 기증 행위가 자칫 신비주의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셨지요.

자동차도 50년 쓰면 낡고 문제가 만찮아. 사람도 쉰 넘으면 정신병자가 되는 거야. 너무 정확한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되지. 나이가 들면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거야. 내가 그래. 하하하.

신옥진 선생님은 역설적 표현을 아주 천연덕스럽게 구사하는 입담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천진난만하게 들리지만 그 속에는 어떤 아픔과 모순이 희화화 되어 깔려 있지요. 비우는 것도 쉽지 않지만 주지 못하고 힘들게 쥐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정말로 대단한 사람들 아니냐? 반문 하듯이요.

2013.8.31- 2014.2.23까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신옥진 기증 이우환 드로잉전이 열리고 있다. 기증작품 중 '해운대 파도'는 하나, 셋, 넷, 다섯개의 선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갈파해 그린 드로잉으로 이우환 화백의 순발력과 조형철학을 유감없이 맛볼 수 있는 필치의 작품이다.
▲ 이우환 드로잉 작품 기증전 2013.8.31- 2014.2.23까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신옥진 기증 이우환 드로잉전이 열리고 있다. 기증작품 중 '해운대 파도'는 하나, 셋, 넷, 다섯개의 선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갈파해 그린 드로잉으로 이우환 화백의 순발력과 조형철학을 유감없이 맛볼 수 있는 필치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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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을 30년 넘게 하고 또 기증을 하다보니 전문가적인 안목이 생기잖아. 처음엔 50점만 기증하려고 했어. 근데 하다 보니 내용적으로 보완할 필요가 생기더라고. 일본 근현대 작가 작품들을 기증한 까닭이 그래. 서양화를 일본을 통해 받아들이고 어떻게 영향을 받고 극복해 왔는지 중요하잖아. 그런데 우리나라에 그런 미술관이 하나도 없어. 

공공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일부 권위적 사고와 구태의연한 행정이 기증을 피로하게 하는  면도 있지요. 대기업과 재벌의 화려한 미술관에 지원되는 예산 만큼이나 전문가적인 안목을 가진 화상들과 개인 소장가들도 소박하지만 아름답게 공공미술관 기증할 수 있도록 유연하고 포용적인 여건 조성이 아쉽기도 합니다. 작가들에게도 소원한 감정을 털어 놓으셨지요.

이제 일흔을 앞두고 있어. 살아보니 허무해. 오해도 받고 굴욕감도 느낄 때가 있었지. 내가 작가들 작품값을 후리쳐서 벌면 얼마나 벌겠어. 작품가라는 것도 그렇잖아. 정해진 게 없잖아. 시장과 사정에 따라 그림값도 오르고 내리는 거지. 작가들이 한번 오른 가격 밑으로는 내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문제야

요즘은 찾아오는 사람들도 없다 하셨지요. 경제도 어려운데다 미술품 시장이 옥션으로 옮겨 가면서 화랑을 통한 작품 거래가 갈수록 힘들어진다지요. 게다가 소장품도 바닥이 나고요. 할 일이 줄어
든 틈으로 화상으로서 소시민으로서 사는 느낌을 글로 쓰고 책으로 엮고 강연도 하지만 그것은 마땅이 하셔야 할 뜻 있는 일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한편 선생님의 '겉과 속, 안과 밖이 다른 생활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기증만을 바라고 상 주고 동상 세우고 따위의 행정업무만 끝내고 나면 문 닫고 퇴근해 버리는 공공업무는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 

미술을 함께 공유하는 화상으로서 비움의 미학을 산들바람처럼 실행하는 신옥진. 선생님의 삶에 눈길이 가고 사상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선생님의 소중한 미술품 기증으로, 그 속에 담긴 예술혼을 향유하는 시민의 행복감 만큼, 선생님 또한 자부심과 행복감이 절로 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도 못한 것 같아 먹먹합니다.

어쩌다 기증이란걸 하다 보니 뜻밖에 많이 알려져서 나쁜 짓도 못해.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도 없어. 자연사 밖에 할 수 없어. 진드기에게 뜯겨 죽는 것도 자연사지 으하하하.

덧붙이는 글 | 신옥진(1947년 부산출생)
선생이 지금까지 기증한 전체 기증 작품수는 약 860점 ( 점당 최소 300만원에서 최고 2억 호가 )
1998년, 결핵 후유증을 크게 앓으면서 박수근 스케치, 장욱진 수채화 등 50여점 부산시립미술관에 처음 기증
막상 살아나니 아깝다는 생각과 함께 처음 기증이라 모자랐으니 앞으로 제대로 해 봐야겠다 생각
부산시립박물관 313점, 경남도립미술관 239점, 밀양박물관 100점, 부산박물관 30점
국립현대미술관 53점 기증작 중 이우환 '선으로부터'(1977년작 20호 과슈)는
일본 경매에서 매입 5년간 안방서 보던 것을 독한 마음먹고 기증

2009년 일본 근․현대 미술작 100여점 기획 기증품으로 구입하여 부산시립미술관에 기증
에콜 드 파리의 일원으로 활동한 레오나르 후지타, 일본 서양화단의 쌍벽 우메하라 류자부로와 야스이 소타로,
자화상 작가 기시다 류세이. 이우환 선생이 일본 구상작가 중 최고로 치는 시에키 유조
이중섭 만큼이나 인기 있는 일본 목판화의 거장 무나카타 시코
한국 테라코타 조각의 거장 권진규의 스승 조각가 시미즈 다카시 등의 작품 등
일본 근현대미술 기증작들은 국립현대미술관도 갖지 못한 부산시립미술관만의 특성

1975년 공간화랑 오픈 현재 경영난으로 서면점은 닫고 해운대 본점만 운영 중
1987년 화국화랑협회 초대 미술품 감정위원장
1989년 부산청년미술상제정 현재까지 시행 중
2009년 시 전문 원간지 <심상>신인상으로 문단 등단

저서: 산문집 <화상 신옥진의 삶과 사람, 그리고 그림이야기- 진짜 같은 가짜, 가짜 같은 진짜. 산지니출판사.2011>
시집 <빛난 하루.2011>,<잠깐 비움. 시와사상.2013>

수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화관장, 부산시 문화상, 자랑스러운 화랑인상, 해운대 포럼상,
밀양시 명예시민, 경상남도 명예도민, 신옥진 기념상 제막



태그:#신옥진, #부산공간화랑, #공공미술관작품기증, #박건, #미광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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