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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한 위문공연단이 미군부대를 찾아와 노래를 부르고 있다(1950. 12. 27.).
 한국의 한 위문공연단이 미군부대를 찾아와 노래를 부르고 있다(1950. 12. 27.).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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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아메리칸 드림(2)

이민준비

준기는 순희가 출국한 다음날부터 미국이민을 준비했다. 준기는 먼저 서울 삼각지에 있는 한 이민대행사를 찾아가 상담했다. 이민 상담사는 준기가 군대와 사회 의료기관에서 전문적으로 일한 경력이 20년 넘기에 숙련직 취업이민 자격은 충분하다고 매우 희망적으로 얘기를 했다.

그렇지만 막상 미 대사관에서 미국행 취업이민 비자를 받기는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는 말도 했다. 준기는 그날 돌아오는 길에 이민 상담사의 조언에 따라 종로2가 영어회화 학원에 들러 회화 테이프와 교재를 한 세트 산 뒤 곧장 그날 밤부터 회화공부에 집중했다.

'내레 낙동강 다부동전선에서도, 부산과 거제포로수용소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이까짓 미국 비자 관문을 뚫지 못하랴.'

준기는 그런 오기가 치솟았다. 하지만 영어회화 공부는 정말 쉽지 않았다. 외국어는 어린 시절 배워야 능률이 높은데, 이미 혀가 완전히 굳어버린 40대에 기초 걸음마 영어를 배우자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마침 준기는 구미가축병원 김교문 수의사가 포켓수첩에 단어를 적어 시도 때도 장소도 가리지 않고, 중얼중얼 외던 일이 떠올라 자기도 그렇게 실습해 보았다. 늘 습관처럼 보던 텔레비전도 아예 방에서 치워버리고, 대신 영어회화 테이프 기기를 들여놓았다. 준기는 병원 일과가 끝나면 만사 제쳐놓고 미국인 회화학원으로 갔다.

준기는 영어회화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미리 미 대사관에 취업 이민비자신청서를 냈다. 그러자 곧 경찰서에서 신원조회가 왔다. 담당 형사가 준기의 미국 취업이민 이유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는 준기의 전력을 들추며 사상을 의심한 듯, 신문 태도가 사뭇 거칠었다.

"이 보라요. 내레 대한민국 국군으로 36개월 동안 최전방에서 복무하고 제대한 사람이야요. 내레 인민군으로 지낸 기간은 미처 석 달두 안 되지만 국군복무 기간은 그 열 배가 넘지 않수. 내레 부모형제두 버리고 대한민국에 남은 사람이야요."

준기가 전역증을 보여 주며 볼멘소리로 항의하자 그제야 형사의 신문태도가 다소 부드러워졌다. 준기가 영어회화 공부를 시작한지 6개월이 지나자 영어로 조금 더듬거릴 수 있었다. 준기가 미 대사관에 비자 신청을 한지 1년 6개월 만에 대사관 측에서 인터뷰 통보가 왔다. 인터뷰 전에 미 대사관이 지정한 세브란스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아 무사히 통과했다.

 제목: "Peace Camp" 
 아티스트: Murray. (1951).
 제목: "Peace Camp" 아티스트: Murray. (1951).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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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비자인터뷰

첫 고비는 잘 넘겼다. 그런데 미 대사관 이민 비자인터뷰는 준기에게 바늘귀처럼 좁은 문이었다. 마침내 비자인터뷰 날이었다. 그날 준기는 긴장하지 않으려고 우황청심환까지 미리 먹고 대비했지만, 막상 비자인터뷰 때는 좀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몹시 깐깐해 보이는 미 대사관 젊은 여성 영사가 뭐라고 묻는데, 너무 긴장한 탓인지 무슨 말이지 귀에 들리지도, 입이 열리지도 않았다. 준기는 배석 통역을 통해 묻는 말에 뒤늦게 몇 마디 대답했지만, 이미 버스가 지난 뒤 손들기였다.

젊은 여성 영사는 싱긋 웃으며 준기에게 회화를 좀 더 배우라고 했다. 준기는 다시 여섯 달을 더 공부한 뒤 이민 비자인터뷰를 했지만, 이상하게도 영사 앞에만 서면 또 혀가 굳었다. 준기는 두 차례 낙방을 하고 나니까 자신감도 용기도 사라졌다. 모든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하늘이 노랬다.

준기는 한동안 끊었던 술도, 담배도 다시 입에 댔다.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황 병원장이 퇴근길에 단골 주점으로 불렀다. 술이 한 순배 돌았다.

"미국에 가서 성공하려면 철저한 미국사람이 돼야지요. 사무장, 영어공부를 더하세요. 그래야 미국에 가서 걔네들과 원활히 소통할 수 있어요. 말을 잘하는 것은 아주 큰 재산입니다. 성공의 지름길이기도 하고요. 미국이란 나라가 그렇게 허술치 않아요. 그저 이 꼴 저 꼴 안 보고 살려면 한국에서 이대로 혼자 사는 수밖에."
"……."
"사무장, 왜 포로 송환 때 고향에 가지 않고 대한민국에 남았소?"
"……."

"최순희라는 그 여자 때문이지요?"
"기렇습네다."
"그렇다면 그만한 일로 좌절해요?"
"……"

중국군의 춘계대공세로 서울시민들이 세 번째로 피난봇짐을 꾸려서 한강을 건너고자 몰려들고 있다(서울, 1951. 5.).
 중국군의 춘계대공세로 서울시민들이 세 번째로 피난봇짐을 꾸려서 한강을 건너고자 몰려들고 있다(서울, 1951. 5.).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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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미국 이민생활이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내 친구는 고등학교에서 화학 선생을 하다가 미국에 간 뒤 처음에는 제약회사에서 약상자 포장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런 걸 모욕으로 알아 참고 견뎌내지 못할 바에는 아예 미국에 가지 않는 게 좋아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 간 여자들도 이민 초기에는 대부분 봉제공장에서 일한답니다."
"알가습네다."

"그리고 최순희, 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쉽게 결혼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버려야 해요. 그 여잔 이미 미국인이에요. 걔네들은 섹스와 결혼을 별개로 치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곧 한국에도 그런 풍조가 밀려올 거요. 정말로 그 여자를 부인으로 삼고 싶다면, 꼭 필요한 남자, 그 여자의 모든 단점을 감싸주는 진정성이 있는 남자로, 아무튼 감동을 줘야 해요. 그래야 그 여자가 당신한테 결혼하자고 프러포즈할 거요."
"제가 잘 몰랐던 걸 알쾌(가르쳐) 줘서 고맙습네다."

"미국인들은 '돈이라면 신도 웃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예요. 미국인들은 돈을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지독한 수전노 같지만, 일단 돈을 벌면 대부분 사회에 환원하고 저 세상에 가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은 장애아를 입양하여 제 자식처럼 키우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 휴머니스트들도 많아요."

황 병원장은 그밖에도 자기의 미국 유학생활 이야기와 함께 미국인들의 습성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들려주며 준기에게 미국행 이민준비를 다시 도전케 했다.

"고맙습네다. 감사합네다. 병원장님!"

한국전쟁 무렵의 한국 산골마을 한 초가집
 한국전쟁 무렵의 한국 산골마을 한 초가집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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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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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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