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데 나는 자기계발서 '덕후'다. 스티븐 코비와 하이럼 스미스의 책을 읽고 프랭클린 플래너를 10년간 사용했다. 최근 2~3년간은 데이비드 알렌의 GTD('Getting Things Done'의 약자로 우리나라에서는 '끝도 없는 일 깔끔하게 해치우기'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방식을 익힌 이래로 좋은 도구로 지금까지 쓰고 있다.
그 외에도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 라이어>라거나 토니 부잔의 <마인드맵>, 그리고 황병구의 <관계 중심 시간 경영>까지, 스스로가 직장 생활, 사회생활에 유효한 자기 계발서들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고로, 만약 자기 계발 비평서에 대한 독후감을 써야 한다면 나 같은 자기계발서 '덕후'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원석의 <거대한 사기극>은 부제가 암시하듯 '자기 계발서 권하는 사회의 허와 실'을 밝히는 책이다. 솔직히 이 책을 읽고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 자주 느끼지만 재미있고 유익했던 책이 항상 서평 혹은 독후감을 쓰기 좋은 책은 아니라는 거다.
정말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고 주변에 권하고 싶은 책인데 정작 책에 대한 감상을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한두 줄 이상의 문장밖에 나오지 않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사실 나는 최근 김용민의 <한국 종교가 창피하다>를 읽고 서평을 쓰겠다고 했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책도 재밌게 읽었고 김용민 교수의 최근 행보에도 지지하는 마음 간절했으나 그 책에 대해서는 끝내 한두 줄 이상의 문장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윤리적 패러다임 vs. 신비적 패러다임본서도 그런 좋은 의미에서 할 말이 별로 없는 책이었다. 논지뿐만 아니라 200쪽을 살짝 넘긴 분량에 웬만한 자기 계발서들을 다 언급한 부분은 놀랍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본서의 최대 장점은 자기 계발서의 시대적 흐름을 짚고 그에 따라 분류하여 그 특징들과 배경이 되는 가치관들을 규명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자기 계발서는 미국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하며 크게 두 가지의 패러다임으로 분류되는데 하나는 윤리적 패러다임이고 다른 하나는 신비적 패러다임이다. 윤리적 패러다임은 청교도 윤리를 강조한 막스 베버로부터 시작해서 벤저민 프랭클린과 그의 사상적 계보를 잇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스티븐 코비, 데일 카네기의 책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윤리적 패러다임 기반의 자기 계발서들은 근면의 힘을 신뢰하며 외부의 환경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 성실한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기를 기대한다.
반면 신비적 패러다임은 19세기 미국에서 번성했던 두 운동 흐름, 즉 초절주의와 신사고 운동의 영향력 아래 있으며 전자는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이, 후자는 메리 베이커 에디가 창시한 크리스천 사이언스로 대변된다. 이런 흐름 속에 있는 책들이 론다 번의 <시크릿>,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같은 류이다. 신비주의 패러다임 자기 계발서들의 특징은 상상(긍정)의 힘을 신봉하며 원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노력을 내려놓고 간절히 바라기만 하면 이루어진다고 강변한다는 점이다.
미국적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자기 계발서특별히 저자가 주목한 점은 이 두 가지의 흐름이 미국의 경제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경기가 부양되었을 시기에는 성실하게 노력하기를 권하는 윤리적 패러다임이 강조되었다면 최근 경기 침체와 불황의 시기에는 다분히 믿음의 도약을 요구하는 신비적 패러다임이 중흥기를 맞고 있다고 말한다. 자기 계발서들도 결국은 사회와 경제적인 영향 아래에서 소비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계발서가 미국에서 크게 유행하는 배경에는 미국 사회보장 시스템의 부재에 그 원인이 있음도 지적할 부분이다. 사회보장 인프라조차 없는 사회는 개개인에게 불안을 조장하고 국가가 그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자가 발전(자조, self-help) 하도록 독려하는 어떤 도구로 자기 계발서들이 소비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하는 미국은 막강한 영향력을 통해 이제 전 세계가 이 철학을 수용하도록 권하고 있다. 결국 자기 계발서들은 스스로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구조의 불합리성을 방기한 채 개인에게 초점을 돌리게 만들고 개인에게 자기 세뇌를 시키고 무한책임을 지운다는 점에서 악한 측면이 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자기 계발서들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는가. 저자는 자기 계발서의 넓은 스펙트럼을 전제한 후 그 활용 측면에서 긍정적 역할이 있음도 언급한다(부정적으로만 다루었다면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실패다). 단적으로 말해 신비적 패러다임의 책들은 진통제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므로 권하지 않으나 윤리적 패러다임의 책들은 읽되 습관이나 인격을 다루는 책보다는 기술을 다루는 책이 낫다고 평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보여 준 자기 계발서의 '거대한 사기극'을 하나하나 규명하면서 보다 더 근본적인 고민으로 이끈다. 요는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더욱 가속화시킨 위계와 경쟁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사회 안정망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회에서 불안을 느껴 자기 계발서에 환호하고 열심히 그 논리와 방법론을 섭렵하려고 애쓰는 집단은 직장인(세일즈맨), 여성(우먼 파워, 재테크), 어린이들(영어 유치원, 독서 지도)이다. 정작 사회의 상위 집단은 세습된 부와 부모의 취득된 문화 권력(아비투스)으로 인해 손쉽게 자녀들을 '성공'으로 이끈다.
80%였다가 이제는 99%로 대변되는 비기득권층 사이에서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 비약하거나 죽도록 애쓰는 형국이다. 물론 그중 소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그 증거를 바라보며 대중은 사기극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그게 저자가 바라보는 현실이자 나 또한 동의하는 미국과 미국을 사랑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대부분의 내용에 공감하면서도 한마디만 첨언한다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계발서는 적절히 읽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사실상 자기 계발서는 거대 담론보다는 미시 영역에서 효과가 있다(물론 저자도 습관이 아닌 기술로서의 자기 계발서를 긍정한다).
나는 학문이나 사회 흐름으로서 이른바 사상적 배경에서 자기 계발서를 소비한다기보다는 내 하루하루의 산적한 업무를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시간 관리 도구로서의 자기 계발서들에 큰 도움을 받았다. 나는 3~4년차 직장인일 때 자주 과도한 업무로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없었고 업무에 우선순위를 매기지 못했고 시간 배분에 실패해서 죽도 밥도 아닌 삶에 허덕였다. 당연히 시간 관리, 자기 계발서들은 당시 과로로 흐트러진 내 삶을 정리해 준 비서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둘째로 나는 긍정의 힘을 믿는 편이다. 문제는 긍정의 힘, 긍정적 사고방식을 '누가' 요구하는가의 문제다. 종단 연구를 통해 노년의 삶의 만족도를 다룬 것으로 유명한 조지 베일런트의 <행복의 조건>을 비롯하여 많은 장년층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개개인의 긍정적 사고가 그들의 행복한 삶을 추동하였음을 언급한다. 사실, 사회가 불합리한 순간에서조차 긍정, 순응, 복종을 요구하는 것과, 개인이 일상적으로 낙천적으로 긍정적으로 살기를 권장받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억압사회이고 후자는 한량사회일 테니.
정작 문제는, 후자를 이루기 위해서는 불안과 스트레스를 낮춰야 하는데 자기 계발서들이 오히려 불안을 조장하면서도 긍정 흉내 내기를 권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긍정의 메시지는 <욕망해도 괜찮아>,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당신으로 충분하다> 같은 게 아닐까.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뉴스앤조이>에 중복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