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과 함께 중견기업 주식을 30% 정도 보유하고 있었어요. 해마다 주주총회에 불려가지만 70%를 가진 대주주는 저희를 위한 결정을 하지 않더군요. 7년 내내 배당금은 한 푼도 없었고 대주주가 회사 자산을 몰래 매각해도 저희에게 통지가 오지 않았어요. 40년 투자가 깡통으로 전락했고 그래서 상법을 공부하게 됐습니다. 나라에서 저희같은 소액주주를 제대로 보호하는 법을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3시간 넘게 치열하게 진행됐던 상법개정안 2차 공청회의 승자는 서울시 용산구에서 온 초로의 여성 박아무개씨였다. 상법 교수, 변호사 등이 연달아 정부의 상법개정안이 부적절하다고 성토하면서 후끈해졌던 장내 분위기는 그가 객석에서 일어나 담담하게 경험을 털어놓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법무부는 10일 오후 여의도 한국거래소 국제회의장에서 기업지배구조 상법개정 2차 공청회를 열었다. 상법개정안을 확정해 지난 7월 입법예고했지만 재계가 이에 심하게 반발하자 이례적으로 2차 공청회를 가진 것이다.
찬반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주제인만큼 양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패널들 사이에도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 상법개정안 원안 통과를 주장하는 패널들은 다양한 논리를 동원해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원안 반대 입장의 패널들은 새 개정안이 주주의 재산권을 침해한다고 맞섰다.
상법개정안이 기업 경영권 위협? "지나친 과장"정부가 마련한 상법개정안의 주 내용은 소수의 지배주주가 기업을 마음대로 운영하지 못하도록 법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자산 2조 원 이상의 대기업으로 하여금 감사위원과 이사를 분리해 선임하는 독립적 사외이사 선임 시스템, 집중투표제와 전자투표제 등이 새 개정안에 들어간 대표적인 제도다. 자회사 이사가 임무를 제대로 하지 않아 회사에 손해가 발생했을 경우 모회사 주주가 법적인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다중대표소송'도 포함됐다.
정찬형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런 제도들이 개정안에 포함된 배경에 국내 재벌기업들의 독단적 경영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재벌들이 불투명한 경영으로 회사의 가치를 떨어뜨리는데 회사 내부에 견제할 장치가 없으니 상법개정안을 통해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얘기다.
개정안에서 제시된 방법은 감사위원회 위원인 이사를 선출할 때 지배주주의 의결권을 특수관계인까지 합해 3%까지만 인정하는 것이다. 정 교수는 "지배주주가 감사 임명과 해임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 제도는 자기가 스스로를 감사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개정안 내용대로라면 거의 외부 사람이 들어와서 감사위원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반론했다. 적대적 인수합병 세력 등이 확보한 지분을 바탕으로 감사위원으로 선임될 경우 회사 경영이 어려워진다는 우려다.
최 교수는 "지주회사 같은 경우 상장회사는 모회사가 20%를 단독보유하고 비상장회사는 40%를 단독보유하게 되어있어 최대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KTNG같은 경우도 지배구조 모범사례라고 표창은 엄청 받았지만 경영권 위협 세력에 당했다"고 말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이같은 주장에 대해 "지나친 과장"이라고 일축했다. SK그룹을 공격했던 소버린 사태나 KTNG 같은 경우는 매우 이례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그는 "포트폴리오 투자를 목적으로 하는 외국 펀드들이 2~3년 동안 연합해서 이사회를 장악하고 경영권을 탈취한 사례는 없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분식회계 등 재벌 총수의 불법행위가 견제되지 않는 지금의 상황이 기업 입장에서는 더욱 위험하다고 평했다. 그는 "총수가 불법행위를 해서 감옥에 가는 게 한국 기업의 가장 큰 위험요소"라면서 "SK주식회사 역시 잠재가치가 5조원인데도 최태원 회장이 구속되면서 PDR(주식총액/총배당)이 1미만으로 떨어졌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런 불건전한 기업 지배구조가 나타나지 않도록 감시하기 위해서는 감사의 독립성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 필요성, 대선 때 이미 증명"이날 공청회장에서는 현재의 상법이 개정 발효된지 1년 3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도 강조됐다. 기본법인 상법을 이렇게 빠른 주기로 재차 개정하는 것이 성급하다는 시각이다.
고창현 변호사는 "상법은 기본법이기 때문에 한번 바꾸면 기업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는데 입시 요강 바꾸듯 쉽게 바꾸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집행임원제, 전자투표제 등 규제에 가까운 내용을 상법에서 다루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든다"고 덧붙였다.
재계를 대표해 나온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은 골프를 예로 들며 "스윙폼 교정하려다가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다"면서 신중한 접근을 거론했다. 배 본부장은 이번 정부의 세법개정안을 가리켜 "세계에 전례가 없는 입법"이라면서 "이런 식으로 지배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하면 기본적인 헌정질서가 흔들릴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호 고려대 교수는 헌법과 회사법이 구분되어야 한다는 이색적인 논리를 폈다. 김 교수는 "기업이 망할 때는 한 순간"이라면서 "삼성전자와 현대차가 쓰러지면 한국은 방글라데시 수준으로 추락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경제적 안정을 위해 재벌에 위해가 가는 지배구조 개선은 지양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날 공청회에 참석한 청중 가운데는 이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이가 적지 않았다. 김재호 상장협의회의 전문위원은 "상법개정안은 기업을 위한 것 아니냐"면서 "기업에서 반대하는 상법개정안을 해야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상법개정안이 통과가 되어 국가 경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문제가 생기면 상법개정을 주도한 교수들이 책임질 거냐"는 질문을 패널들에게 던지기도 했다.
이에 김우찬 고려대 교수는 "회사와 총수 일가를 동일시하는 접근 방법으로 논지가 전개되는 것이 놀랍다"고 평했다. 김 교수는 "대선 전에 경제민주화 열기가 있었고 이번 상법개정안은 그 공약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서 "기업 지배구조 개선의 필요성은 선거 이전에 증명이 되었는데 개정안을 반대하는 분들은 아무것도 고치지 말자는 얘기를 하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