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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내이자 박근혜 대통령의 어머니. 현모양처의 삶을 살다가 조총련의 사주를 받는 문세광의 총탄에 의해 비운의 삶을 마감한 여인. 내년이면 생을 마감한 지 40년인데 아직도 그의 이름만 들어도 손수건부터 꺼내드는 할머니들이 넘친다. 반신반인의 존재로 추앙받는 박정희. '국모님'으로 불리는 육영수.

박정희보다 궁금했던 건 육영수의 삶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소위 '문세광 저격사건'이 일어났으니, 육영수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흑백 TV를 통해 하얀 국화로 치장된 운구차가 청와대를 빠져 나가는 장면을 보면서 "쐈다. 쐈다. 문세광"으로 시작되는 노래를 부르다가 어른들에게 엄청 혼났던 기억 정도가 전부다. 오히려 영애 박근혜가 제2의 퍼스트레이디가 되어 아버지 박정희 옆에선 모습이 더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뮤지컬 <추억의 흰목련>, 보수단체 통하면 40% 할인

뮤지컬 <추억의 흰목련> 포스터
 뮤지컬 <추억의 흰목련> 포스터
ⓒ 라이프브릿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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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의 삶을 다룬 뮤지컬 <추억의 흰목련>(9월 6일~9월 15일)을 볼 기회가 생겼다. '국민들이 사랑한 퍼스트레이디 육영수 여사의 삶을 다룬 감동의 뮤지컬!!'이라는 신문 기사를 접하고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VIP석 10만 원. R석 7만 원.

제일 저렴한 3만 원 A석으로 예매를 했다. 예매를 해놓고 인터넷에 관련 자료를 찾다보니 보수 논객 황장수씨가 소장으로 있는 미래경영연구소를 통해 예매하면 40% 할인된다는 정보가 있었다. 황장수씨는 김재주 전 의령군수와 이번 뮤지컬 제작의 상임고문을 맡았다.

오후 7시 30분 시작 전에 한전아트센터(서울 양재동 소재)에 도착했다. 홀에 삼삼오오 모여선 사람들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거나 50대 중후반의 아주머니였다. 'OO회장님' '**협회' 관계자라고 통성명하는 사람들 속에서 교복을 입고 어머니 뒤를 따르는 학생들도 보였다. 1000석 규모의 좌석에 150∼200명 정도 들어찰 때즘 뮤지컬이 시작됐다.

넉넉한 집안의 둘째딸로 태어난 육영수. 다른 아이들이 비 맞는데 혼자 우산을 쓸 수 없다며 부모님과 작은 실랑이를 벌이는 것으로 극이 시작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정희와 결혼.

장면은 곧바로 5·16 쿠데타로 이어진다. 정치적 혼란과 가난, 북한의 위협을 헤쳐나갈 길은 혁명(?) 밖에 없다는 군인들의 진언을 박정희가 받아들인다. 4·19 의거, 5·16 혁명이라는 용어 선택도 그렇고 5·16 군사쿠데타가 개인의 정치적 야욕보다는 구국의 충정에서 비롯됐다고 조명하는 점 등은 지금까지 정립된 역사와는 다르다. 비록 뮤지컬 형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극을 보는 내내 육영수는 관객들에게 남편 박정희가 정치적 야욕으로 군사 쿠데타를 강행한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교도소에서 갓 출소한 범죄자를 청와대로 불러 자립할 수 있도록 수레 살 돈을 쥐어주고, 한센병(나병) 거주지역에서 아이를 안고 그들이 건네 준 과일을 받아먹는다.

이번 뮤지컬을 준비한 박승주 라이프 브릿지 대표가 말한대로 성실과 겸손, 절제와 박애를 실천하는 육영수의 모습은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그 어떤 논리보다 설득력 있어 보였다.

자애로운 영부인 모습으로 쿠데타와 유신독재 '합리화'

육영수씨의 양지회 봉사 활동은 '직접 노동' 형태로도 이뤄졌다. 사진은 양지회 회원들과 함께 장병들에게 보낼 위문대에 선물과 편지를 포장하는 모습
 육영수씨의 양지회 봉사 활동은 '직접 노동' 형태로도 이뤄졌다. 사진은 양지회 회원들과 함께 장병들에게 보낼 위문대에 선물과 편지를 포장하는 모습
ⓒ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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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육영수의 자애로운 모습이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가를 밝혀내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을 듯하다. 일정 정도 사실에 근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설사 사실일지라도 '구국의 일념으로 혁명(?)을 감행한 남편 뒤에는, 그를 내조하는 자애로운 영부인이 있었다'라는 줄거리 중심의 극 전개는 육영수를 앞세워 쿠데타와 장기집권을 합리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그러나 뮤지컬은 내내 이런 구도로 전개된다.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를 찾은 박정희와 육영수. 나라를 살리기 위해 독일 수상에게 구걸과 같은 원조 요청을 하는 그들의 모습에 광부와 간호사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 월남에 파병된 군인의 피와 땀이 조국 근대화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논리의 전개이다. 가난한 60년대 이들의 외화벌이는 나라 살림에 큰 보탬이 된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한일 수교의 대가에 대일 청구권 포기가 있었다는 사실과 월남 파병의 뒷배경에는 쿠데타를 미국에 인정받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는 것 등은 드러내지 않은 사실이다.

극중 박정희는 대통령의 신분임에도 남방을 수차례 기워 입고 낡은 허리띠를 하고 있다. 이발사가 박정희에게 옷과 허리띠를 새것으로 바꿀 것을 권하지만 '나도 세 자식을 둔 봉급쟁이' 라며 싫다고 하자 이발사가 그럼 자기의 허리띠와 바꾸자고 한다. 어떻게 보면 코미디 같은 장면인데 배우나 관객 모두 너무 진지하다. 이런 장면에서 웃어야 할지 숙연해야 할지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극중에서 육영수는 박정희의 퇴임 후 삶을 상상한다. 농사를 지으며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는 그의 꿈 이야기에 박정희는 훗날 새마을 지도자가 될 것이라며 화답한다. 그러나 6·3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이뤄지고 박정희는 경찰을 동원하여 학생들을 진압한다. 육영수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이렇게 하려고 혁명을 했느냐며 거친 소리를 하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그리고 1974년 8월 15일 북한과 조총련의 지령을 받고 박정희를 시해하려 한 문세광의 총에 육영수가 절명한다. 극은 육영수가 탄 운구차가 청와대를 떠나는 실제영상이 흘러나오면서 끝난다.  곳곳에 한숨소리가 들리고 더러는 훌쩍이는 사람들도 보인다.

극이 끝나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육영수가 총탄으로 비운의 삶을 마감하지 않았다면 극중 그의 대사처럼 꽃대궐 시골에서의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박정희도 장기 집권의 꿈을 접고 그녀가 신겨주는 고무신을 신고 새마을 모자를 쓰는 삶을 선택했을까?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단아한 한복을 입은 육영수와 셔츠를 몇 번이나 기워 입었다는 박정희의 극중 삶은 그 같은 상상을 불러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육영수가 비운의 삶을 마치고도 박정희의 장기집권은 계속되었다. 육영수의 빈자리는 영애 박근혜가 대신했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부하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유신철권 정치는 계속됐다.

지난 향수의 자극, 경계해야

육영수. 개인의 삶은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그가 단아한 한복을 입었다는 것과 비운의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 더해져 많은 국민들에게 애뜻한 감정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만을 부각하여 쿠데타와 유신 독재의 치부를 가리고 합리화하는 것, 역사의 왜곡이고 진실의 은폐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단돈 만원이면 육영수 생가 관광'이 가능하다는 불법 선심성 관광이 문제되기도 했다. 이번 뮤지컬도 이런 논란을 피해갈 수는 없을 듯하다. 육영수의 흰목련 같은 삶을 조명했다고 하지만 육영수와 박정희. 박정희와 쿠데타, 유신 독재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감안하면 정치적 의도가 없다는 제작진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 들이기는 힘들다.

'천애 고아가 됐는데 우리가 도와 줘야지'라며 지난 대선에서 박정희·육영수의 영정을 들고 나오던 사람들.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 큰 기여를 했음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딸 박근혜가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가 되려면 지난 정권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박정희와 육영수의 부활은 박근혜 대통령이나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난 향수의 자극은 보수의 결집을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박근혜 대통령을 영원히 박정희와 육영수의 딸로 남게 할 것이다. 국민 모두가 경계해야 될 일이다.


태그:#박정희, #육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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