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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는 작은방, 대청, 큰방, 부엌으로 된 네 칸 一자형 홑집이다.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는 작은방, 대청, 큰방, 부엌으로 된 네 칸 一자형 홑집이다. ⓒ 김종길

그 집 뜰에는 가을 국화가 탐스러웠고 맨드라미가 붉었던 기억이 있다. 창녕 읍내 한갓진 곳에서 맞닥뜨린 옛집에서 나는 가을을 읽는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아니, 이 집에 처음 갔을 때는 이미 10년 하고도 몇 해가 더 흐른 것 같다. 새삼 이 집이 떠오른 건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자 청마루에 누워 하얀 달빛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최근에 지은 듯한 대문채가 다소 우악스럽고 그 너머로 앞을 꽉 막는 기와로 지은 사랑채가 더욱 공간을 비좁게 한다. 다만 정성 들여 처마 아래 심어 놓은 국화·원추리·맨드라미·모란·능소화·영산홍 등의 꽃과 나무들, 고추·가지 따위의 푸성귀들이 만들어내는 생생한 기운이 일순간 기분을 바꾸어 살짝 들뜨게까지 한다.

억새로 이은 지붕, 20년 이상 간다고?

 안채로 이어지는 징검돌이 놓인 잔디가 깔린 안마당
안채로 이어지는 징검돌이 놓인 잔디가 깔린 안마당 ⓒ 김종길

저마다 색을 내는 꽃들을 따라 사랑채를 돌아서면 여태와는 달리 너른 안마당이 시원스럽게 초록으로 펼쳐지고 그 끝으로 시간을 잠시 거슬러 온 듯한 초가집 한 채가 단정하게 있다. 마당에 징검징검 박은 징검돌을 징검징검 따라가면 안채로 향하는데 고개는 여전히 반들거리는 장독대와 살뜰한 텃밭 풍경에 시선을 빼앗겨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기 일쑤다.

억새로 지었다는 집이 이처럼 예쁠 수가 있을까. 대개 갈대로 지은 갈집이나 억새로 지은 샛집이나 볏짚으로 지은 초가의 경우, 지붕이 버섯처럼 둔중한 것이 특징인데, 이 집은 과분수의 불안정한 모습은 간 데 없고 적당한 비율로 도리어 단정하기까지 하다. 억새로 지붕을 이으면 20~30년쯤은 간다고 하더니 곰삭은 지붕의 오래된 빛깔이 정겹기만 하다.

 집 구석구석이 살뜰하기 그지없다.
집 구석구석이 살뜰하기 그지없다. ⓒ 김종길

 축담 한 귀퉁이에선 가을이 붉게 익어가고 있다.
축담 한 귀퉁이에선 가을이 붉게 익어가고 있다. ⓒ 김종길

집을 지은 이의 안목이 새삼 느껴진다. 누구나 한 번쯤 꿈꾸었을 '초가삼간'에 살고픈 마음이 절로 생기는 집이다. 부엌 한 칸, 방 한 칸, 마루 한 칸. 이 셋이 주는 분리와 조화의 이치는 왠지 모를 편안함을 줘 끊임없이 꿈을 꾸게 하고 추억을 들춰내게 한다. 비록 이 집은 방이 한 칸 추가된 네 칸의 집이지만 집이 주는 정서는 삼간집과 다름없다. 바로 이 아늑한 느낌, 삼 칸이 주는 안온함을 이 집에서 느낀다는 건 혹여 원래 삼 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네 칸 一자형 홑집인 이 집은 작은 방·대청·큰 방·부엌으로 된 간단한 구조다. 대개 남향받이 초가에서 부엌은 서쪽에 있게 마련인데, 이곳은 동쪽에 있는 것이 특이하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된 이 가옥은 1452년 술정 하씨의 시조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 그 시초다. 지금의 집은 종도리에서 '건륭 25년'이라는 묵서가 발견돼 영조 36년(1760)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놀라운 것은 기와집도 아닌 이 작은 초가를 250년 넘게 대를 이어가며 살뜰하게 가꿔왔다는 것이다.

이런 대청에 누우면 참 좋겠다

 반질반질한 대청은 통나무를 윗면만 자귀로 다음어 그대로 써 완성했다.
반질반질한 대청은 통나무를 윗면만 자귀로 다음어 그대로 써 완성했다. ⓒ 김종길

 대청 쪽문으로는 바람이 오가거나 뒤뜰의 소박한 풍경이 마루로 들어온다.
대청 쪽문으로는 바람이 오가거나 뒤뜰의 소박한 풍경이 마루로 들어온다. ⓒ 김종길

깊숙한 처마를 가진 이 집에서 반질반질한 대청은 단연 눈에 띈다. 대개의 마루가 귀틀을 짜서 얼개를 만들고 대패질한 얇은 청판을 끼워 만드는 데 비해 여기선 길쭉한 통나무를 윗면만 자귀로 평평하게 다듬어 그대로 써 완성했다. 튼튼하기도 하려니와 초가와 썩 어울리는 서민적인 기법을 엿볼 수 있다.

뒤뜰과 통하는 쪽문을 살짝 내어둔 것도 공간을 한층 곰살맞게 한다. 작은 크기의 문으로 보아 원래 출입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며, 그저 바람이 무심히 오가거나 뒤뜰의 풍경을 고스란히 마루로 끌어오는 구실을 했을 것이다. 섬돌에 벗어 놓은 하얀 고무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선은 마루를 훑어보다 마지막에는 자연 서까래로 향한다.

요즈음 좀처럼 보기 힘든 서까래에서는 대를 쪼개어 엮은 산자를 볼 수 있다. 지붕구조를 그대로 드러낸 삿갓천장은 넓적하게 쪼개 엮은 산자를 놓고 그 위에 얄매흙 대신 겨릅대를 엮어 덮었으며 억새풀로 이은 이엉을 얹어 지붕을 마무리했다. 이처럼 산자 위에 얄매흙을 덮지 않고 이엉을 이은 집을 '건새집' 이라 한다. 못을 전혀 쓰지 않고 구멍을 뚫어 대오리 묶음으로 종도리를 고정시킨 것 또한 이 집의 숨은 구조다.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의 서까래 산자 위에 얄매흙을 덮지 않고 겨릅대를 엮어 억새풀로 이엉을 이은 '건새집'이다.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의 서까래산자 위에 얄매흙을 덮지 않고 겨릅대를 엮어 억새풀로 이엉을 이은 '건새집'이다. ⓒ 김종길

 대청에 있는 박바가지와 호롱불
대청에 있는 박바가지와 호롱불 ⓒ 김종길

앞마당의 작은 텃밭과 장독대에 잠시 눈길을 줬다가 안채를 돌아 뒤꼍으로 간다. 꽃계단을 이루고 있는 뒤뜰에는 누백 년 된 초가였음을 넌지시 알려주려는 듯 오래된 몇 그루의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붉은 석류가 알알이 익어가는 풍경에 잠시 황홀했다가도 어느 곳 하나 소홀히 다루지 않고 대를 이어온 주인들의 살뜰한 손길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초가를 보고 있노라면 한 생각이 스쳐간다. 그냥 한 번쯤 들를 집이 아니라 이 집에서 오래도록 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건 치기어린 여행자의 푸념만은 아닐 게다. 구석구석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잘 꾸며진 이 절정의 살뜰하게 매만진 풍경은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오래된 향기로 그윽하다.

 뒤뜰 화단에는 석류가 익어가고 있다.
뒤뜰 화단에는 석류가 익어가고 있다. ⓒ 김종길

 안채 뒷벽에는 멍석, 쟁기 등 각종 옛 가재도구들이 있어 더욱 소박하고 예스럽다.
안채 뒷벽에는 멍석, 쟁기 등 각종 옛 가재도구들이 있어 더욱 소박하고 예스럽다. ⓒ 김종길

봄이면 진달래, 가을이면 억새로 유명한 화왕산이 지척이니, 억새로 이엉을 이은 샛집이 이곳에 있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된 이 집은 '창녕 하병수 가옥'으로 불리다 2007년 1월에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로 명칭을 변경했다. 한강 정구가 창녕 현감을 지낼 때 지은 정자를 '술정(述亭)'이라 한 데서 유래한 마을 이름과 거주한 내력, 가옥의 형태 등을 나타내어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 '김천령의 바람흔적'에도 실렸습니다.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하병수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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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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