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파문이 끝날 줄을 모른다. 문제의 교학사 저자들은 발행 포기를 요청하는 출판사 측에게 강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전교조 부설 참교육연구소가 6∼12일 전국 역사교사 77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의 99.5%가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 '교과서로 사용하기 부적절하다'고 답했다 한다. 집권 새누리당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 진영에서는 공공연히 역사 교과서 문제를 이념 전쟁으로 몰아가려는 의도를 내보이고 있다. 바야흐로 역사가 정국의 한복판을 휘젓고 있는 느낌이다.
<역설>의 저자 백승종은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이 담긴 역사 책을 쓰는 것으로 꽤 알려져 있는 역사학자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그가 2011년에 써낸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푸른역사)을 통해 직접 확인한 바 있다.
그전까지 나는 호학(好學) 군주라는 정조의 이미지가 어느 정도 신격화한 것이라는 점을 막연하지만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문체 반정은 아무리 따져 보아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처사였기 때문이다. '비뚤고 뾰족한' 글씨체로 된 과거 답안지는 무조건 불합격시키라는 그의 명령은 그 극명한 사례 중의 하나다. 그런 정조의 모습을 내게 구체적으로 보여 준 책이 백승종 선생이 쓴 예의 책이다.
정조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의 제3부에서 다시 한 번 비중 있게 그려진다. 특히 '정조의 비밀편지'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대목은 흥미진진하다.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를 이끈 '성군' 정조에게서 "호로자식"이니 "주둥아리를 놀린다"는 비속한 표현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몇 년 전 발굴된, 정조가 대신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을 소개하면서 정조의 막후정치와 비밀스러운 정치적 뒷거래의 내막을 꼬집고 있다. 저자는 정조를 '음험한 왕'으로까지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아직까지도 정조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는 이라면 깜짝 놀랄 만한 새 소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의 진보 지식인들을 사로잡은 책 <소학>이 책은 지난 몇 년간 <한겨레> 신문에 실린 '백승종의 역설'에서 60여 편을 가려내어 엮은 것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역설'을 집핍할 때 몇 가지 지침을 따랐음을 밝혀 놓았다. 역사가로서 자신의 관점을 숨김없이 드러내기, 체계적인 역사 지식 제공이 아니라 마음에 다가오는 문제를 씨름한 결과를 보여주기, 역사 문제를 현실 문제와 연결하기, 새 지식을 제공하고 역사적인 사고의 기쁨을 선사하기 등이 그것이다.
이런 점들은 책의 한계이자 동시에 장점이 되기도 한다. 가령 저자는 공자의 말을 빌려 역사가를 일종의 '광인(狂人)'으로 규정한다. 뜻은 높이 세우려 하지만 실천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자신의 주장과 해석이 때로 공허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고 자평한다.
그런데 이것은 역사가로서 자신의 관점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저자 자신의 지침에 말미암은 바가 크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상식처럼 알고 있는 역사적 지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새 지식을 접할 수 있게 된다. 글머리에 언급한 정조의 예가 그렇지만, '뜻밖의 성리학'이라는 제목이 붙은 제5부의 내용이 특히 더 그러하다.
많은 이에게 성리학은 조선 망국의 근본 원인 중의 하나로 각인되어 있다. 성리학의 허례허식이나 위선, 공소한 이념 논쟁의 폐해를 지적하는 이들도 많다. 저자는 성리학의 그런 부정적인 측면을 '성리학 포퓰리즘'(성리학 본래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본질에서 엇나간 성리학적 행위를 비판하는 저자의 용어)으로 갈무리하면서 말 그대로의 '뜻밖의 성리학', 곧 원래의 목적에 충실한 본연의 성리학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저자는 사람들이, 성리학이 조선 500년 동안의 국시가 되는 바람에 매사가 부모·남자·권력자 위주로 재단됐다고들 짐작한다고 말한다. 전통이라는 미명 아래 명절증후군과 고부 갈등에 시달리는 것 역시 충효열만 강요한 성리학 탓이라는 비판도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성리학의 기본 교재인 <소학>에는 '천만뜻밖의 주장'이 나온다.
유교 본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백성들에게는 혁명의 권리가 있었다. (중략) 제아무리 왕이라도 백성을 속이고 업신여기면 당연히 모가지 감이란 말이다. 충성은 아무 때나 무조건 강요될 사항이 아니라 왕이 백성들에게 먹여주는 밥과 신뢰의 대가였다. 이론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실제로도 유교국가에서는 역성혁명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왕이 덕을 잃으면 신하는 얼마든지 그를 버려두고 떠날 수 있었다. 이 점에 있어 공자와 맹자는 좋은 본보기였다. 군신의 의리는 의(義), 곧 시비에 관계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신하는 왕의 잘잘못을 가려 간언했다. 거듭된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런 왕이 주는 벼슬을 사양하고 떠나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169쪽)저자가 보기에 <소학>은 15~16세기 조선의 진보 지식인들을 사로잡은 책이었다. 그런데 그 시기 <소학> 보급의 전도사였던 김굉필과 조광조 등이 비명횡사하자 <소학>이 금서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 국초부터 교육을 강조한 책 중의 하나가 <소학>이었기 때문이다.
'안하무인' 공신 다스리기는 시공을 초월한 명제'뜻밖의 성리학'이 성리학에 대한 새 지식을 통해 우리의 역사 의식을 새롭게 점검해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면, 제8부의 '역사의 어두운 주름'이나 제10부 '매국노' 등은 역사의 본질(?!)에 대한 착잡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도대체 역사는 왜 되풀이되는가.
마르크스는 프랑스 혁명 후 펼쳐진 역사의 반복을 관찰하고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제목의 책을 쓴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헤겔의 말대로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조선시대 공신의 폐해를 다룬 '공신의 횡포'나 권세가 김안로의 권력 농단을 꼬집은 '김안로의 전횡'은 당대의 '비극'이었다. 오죽하면 저자가, 특권에 사로잡혀 안하무인 격으로 날뛰는 공신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문제를 시공을 초월한 명제라고 말했을까. 공신들끼리 서로 패거리를 지어 피차 어육(魚肉)이 될 때까지 싸우기도 했다는 저자의 표현이 공신을 둘러싼 살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해 준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낙하산 인사와 보복 인사의 대가였던 김안로의 공포정치 또한 당대의 많은 이들을 벌벌 떨게 했다.
시대는 바뀌어 2013년이 되었다. 개국공신인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으나, 지금 이 나라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주변엔 그의 '멘토 모임'의 좌장쯤 되는 이가 비서실장이 되어 정국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유신시절부터 시작된, 그 비서실장의 공직 이력은 많은 부분이 '공안(公安)'이라는 말로 채워져 있다. 그런 이력 때문인지 정국은 지금 '신유신시대'로 불릴 만큼 갖가지 '공안적 사건'들로 혼란스럽기만 하다. '만사공통(모든 것은 공안으로 통한다)'이라는 말이 야당의 엄살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공안'으로 2013년 대한민국 사람들의 목소리와 생각을 잠재울 수 있을까. '공안'을 신봉하는 그들은, 그 '공안'의 힘을 빌리면 자신들이 의도한 대로 세상을 이끌어갈 수 있다고 여기는 걸까.
권세란 집권 초기에 권력자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보다 으레 수명이 짧은 법이다. 중종 때 전횡을 일삼던 김안로 역시 권불십년이었다. 1537년(중종 32) 그를 권좌에서 축출할 때 조정에서는 그의 간사함과 교활함을 헤아리기조차 어렵다며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왕명으로 의금부가 그를 체포하자마자 지체 없이 도성 밖으로 내쫓았다. (중략) 결국 김안로 일당은 역사 앞에 부끄러운 죄인이 되고 말았다.(287쪽)2013년의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정치로 5년, 또는 4년마다 대권과 의회 권력이 바뀐다. 권력의 무상함은 봉건 왕조 시대인 조선시대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그런데도 대권과 의회 권력을 움켜쥔 쪽에서는 자신들의 권세가 끝이 없는 줄 안다. 적반하장에 안하무인도 유분수랄까. 대통령이나 정권에 비판적인 말을 조금이라도 할라치면 종북이니 빨갱이니 사상공세를 펼친다.
씁쓸하지만 헛헛한 웃음이 나온다. 마르크스의 '또 한 번은 희극'이라는 말이 새삼스레 다가오는 이유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 시민들이 역사적 존재로서 역사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 <역설> 백승종 씀, 산처럼 펴냄, 2013년 8월, 352쪽, 1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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