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래도 8·28 대책 나온 다음에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가 전화를 하셨어요. '집 사면 1% 대출 나라에서 해준다는데 얼른 신청해라, 돈 모자라면 아버지가 빌려줄게'라고 하시길래 '아직은 집값 더 떨어질 수 있고 그럼 오히려 손해'라고 말씀 드렸죠. 아버지 연배 분들은 집값이 오르던 대세상승기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다시 기회가 왔구나 하고 느끼는 것 같아요.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16일 오후 서울 신대방동의 한 가정집. 정아무개(32)씨는 전세대란이 본격화되던 지난 7월 전세 계약이 만료되자 이곳에 새로 월세집을 얻었다. 돌려받은 전세 보증금으로는 다시 전세를 구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월세로 눈을 돌린 것이다.
음료수를 내놓던 그는 '처음 집 사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대출금리가 많이 낮아졌는데 집 살 생각은 없느냐'고 묻자 "전혀 없다"고 웃으며 잘라 말했다. 이어 "지금 같은 시기라면 대출 없이 집을 살 수 있어도 안 살 것"이라고 덧붙였다.
8·28 전세대책 이후 전세 수요가 소폭 매매로 돌아서면서 부동산 매매시장에도 온기가 흐르는 모양새다. 그러나 울며 겨자먹기로 대출을 받아 매매를 선택하는 2인 이상 가구와는 달리 비교적 운신이 자유로운 1인 가구는 월세를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오마이뉴스>는 최근 서울에 주거지를 마련한 30대 1인 가구 다섯 명을 만나 이같은 선택의 이유를 물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집값이 더 떨어질 것 같다"는 대답을 내놨다.
"건설회사 4년 근무... 지금 사는 건 아냐"정씨는 '집값이 왜 떨어질 거라 생각하느냐'고 묻자 "계속 떨어지고 있었으니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앞으로도 떨어진다고 보는 게 안전한 시각 아니냐"고 반문했다. 집값이 오른다는 근거가 있어야 집을 살텐데 최근 한국경제에서 그런 신호를 찾아보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그는 "집값이 떨어지면 거래라도 잘 돼야 할 텐데 요즘 주택 시장은 오히려 정반대"라고 덧붙였다.
"전세가 가장 좋지만 그 다음으로는 월세가 편해요. 처분이 쉽잖아요. 집을 산다면 환금성을 고려해야 하는데 환금성이 좋은 브랜드 아파트들은 혼자 살기엔 너무 넓고 비싸죠. 제가 10년 자취하면서 이사를 9번 정도 했고 이제는 이사하는 것도 힘에 부치거든요. 집에서도 돈 빌려줄테니 사라고 해요. 그런데 못 사겠어요. 위험이 너무 커요."정씨는 대출이자 대비 손실이 큰 월세 비용을 줄이는 차원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을 하우스메이트로 들였다. 정씨가 사는 방 두 개짜리 40㎡(약 12평) 신대방동 주택의 임대 조건은 보증금 2000만 원에 월세 35만 원. 이중 1/3을 그의 하우스메이트가 부담한다. 1인 가구이기에 가능한 선택이다.
경기 의정부시에서 살다가 최근 서울시 합정동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는 서아무개(30)씨 역시 전세를 물색하다 여의치 않자 바로 월세를 선택했다. 서씨 역시 정씨처럼 하우스메이트를 둘 생각으로 일부러 99㎡(30평)가 넘는 큰 집을 빌렸다. 임대 조건은 보증금 2000만 원에 월세 110만 원. "세 명이 나눠내기 때문에 주거 환경에 비해 비싸지는 않다"는 게 서씨의 말이다.
중소 건설회사 회계팀에서 4년 동안 일했던 서씨는 집값 하락에 있어 정씨보다 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서씨는 "예전에 다니던 회사는 경기도 부근에 아파트를 짓는 회사였는데 수요가 없어서 전원 주택쪽으로 사업 방향을 바꿨다"면서 "지금 집 사는 건 정말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층 1인 가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한국의 인구 특성도 거론했다. 지금처럼 가구당 인구수가 계속 줄어들면 현재 132㎡(40평)대 아파트 가치가 급락하듯 99㎡(30평)대 아파트 가격도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서울연구원이 발표한 '서울시 1·2인 가구 유형별 특성에 따른 주택정책 방향'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에 거주하는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24.4%에 달한다. 이중 절반 이상이 20, 30대에 해당한다. 서씨는 "나같은 1인 가구가 3~4인용 주택을 대출 받아서 살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월세 가격 비싸지만 집값 더 떨어질지 모르잖아요"서울에서 웹디자이너로 근무하고 있는 이진화(35, 가명)씨 역시 경기도 일산에서 전세를 얻어 살다가 계약 만료와 함께 마포구 상수역 인근에 월세방을 얻었다. 이씨는 "월세 가격도 비싸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값이 더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억대 대출을 받아서 덜컥 집을 사는 것은 무서워서 싫다"고 말했다.
"제 친구들 중에서도 결혼 앞두고 집 구하는 애들이 전세가 하도 안 구해지니까 대출 받을까 고민 많이 하거든요. 저도 결혼을 앞두고 있으면 눈 딱 감고 그렇게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면에서는 당장 이렇다 할 결혼 계획이 없는 게 마음 편하기도 하네요."이씨의 대출 자격은 충분하다. 주택 구입 이력이 없고 연봉이 4000만 원 이상인 이씨는 10년 상환 조건으로 정부가 내놓은 '생애최초주택구입자금' 대출을 최대 2억 원까지(연이율 3.1%) 받을 수 있다. 문제는 정말로 거의 최대치에 가까운 대출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씨는 "월세를 구하기 전 직장이 있는 홍대 부근의 주택 가격을 알아봤지만 지은 지 오래된 집들도 살 만한 곳들은 억대 대출이 필요했다"고 털어놨다.
이씨는 자신이 월세를 선택하게 된 또다른 이유로 향후 경제 생활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그는 "월세는 계약 기간과 비용이 정확히 정해져 있고 내 계산에 크게 어긋나는 손실을 보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면서 "깡통전세니 집값 폭락이니 하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다"고 설명했다.
올해 6월 관악구 신림동에 월세를 얻은 회사원 강아무개(31)씨는 비교적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는 "8·28 대책에 나온 손익공유형 모기지 신청을 해서 당첨되면 집 사는 것도 고려해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손익공유형 모기지란 연 1.5% 금리로 국민주택기금에서 주택 구입자금을 빌릴 수 있는 상품이다. 집값이 하락하는 등 손해가 생기면 손실분의 일정 부분을 국민주택기금이 함께 부담한다.
강씨는 "집값이 더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목돈이 없는 입장에서 1.5% 금리는 확실히 매력이 있는 것 같다"면서 "어차피 몇 년 안에 결혼도 할 예정이고 집을 산다면 투자 목적이 아니라 주거용으로 사려고 했으니 손해를 조금 보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연이율 1.5% 대출이면 월세 부담보다 적기 때문에 혼자 월세를 내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낫다"는 게 강씨의 설명이다.
그러나 정부가 8·28 대책으로 내놓은 이 상품은 전국 신청자 3000명에게만 시범적으로 적용된다. 강씨는 "알고 있다"면서 "신청 해보고 당첨이 안 되면 포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율이 3%대인 생애최초주택구입자금 대출은 어떠냐'고 묻자 "그렇게해서까지 당장 집을 사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답했다.
"집값 떨어질거라 생각하지만 결혼 하려다보니... 씁쓸"원래는 생각이 없었지만 결혼을 하려다보니 무리를 해서라도 집을 사야 하나 고민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종로구에서만 8년째 월세 자취생활을 한 박정후(31, 가명)씨는 "집 생각이 없었는데 얼마 전 취업하고 맞선을 보러 다니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고 털어놨다.
"제가 외모가 평범한데 직장도 그렇게 이름있는 곳이 아니다보니 그렇게 인상이 깊게 남지 않나봐요. 집에다 얘기를 했더니 집이 있으면 다르게 볼 거라고 하더군요. 누나들도 현실이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고요."모아놓은 돈이 거의 없는 그가 생애최초주택구입자금 대출을 이용해 20년 상환 조건으로 1억 원을 빌릴 경우(연이율 3.0%, 거치 3년) 거치기간인 3년 동안은 매달 25만 원의 이자만 부담하면 된다. 그러나 거치기간이 끝나면 월 상환금은 62만6474원으로 불어난다. 실질적으로 1억 원 대출만으로 살 수 있는 아파트가 서울에 없을 뿐더러 집값이 하락할 경우에는 자산가치 부담이 별도로 생긴다는 점도 고려 대상이다.
박씨는 "나도 개인적으로 집값이 더 떨어질 거라고 생각한다"면서 "그러면서도 사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게 씁쓸하다"고 했다. 그는 "신혼부부나 전세 살던 사람들이 전세 매물이 없으니까 8·28 대책 이후 조금씩 집을 사면서 주택시장에 오랜만에 활기가 돈다는 기사를 봤는데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 심정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