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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사 전까지 우리집 책꽂이에는 <가족>이라는 책이 꽂혀 있었다. 너무도 누렇게 변해 버린 표지. 앞장 작가의 사진에는 젊은 시절 더벅머리의 최인호가 웃고 있었다. 그 책은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 도서관에서 대여한 유일한 책이었다. 대여 후 반납하지 않은 유일한 책이기도 했다.

80년대 후반이니 컴퓨터가 보편화되지도 않았고, 사립도 아닌 고등학교 도서관에 컴퓨터가 보급되어 있을 일 또한 만무했다. 그저 '대출카드'라는 노란색 두꺼운 종이에 대출일과 학년, 반, 번호, 이름 등을 쓰고 빌리는 형식이었으니 대출이 연체되어도 관리가 잘 될 턱이 없었을 것이다.

최인호 선생의 <가족>을 처음 보던 그때

최인호 작가의 <가족> 겉그림
 최인호 작가의 <가족> 겉그림
ⓒ 샘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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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치기였는지 난 다 읽고 나서도 반납을 하지 않았다. 그 책에서 그다지 큰 감동을 느꼈다기보다는 작가의 젊은 시절 , 신혼초 , 아기 이야기 등을 재미있고 가볍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나마 기억나는 글 몇 개. 작가가 훈련소에 입소했다가 무슨 신체상의 이유로 임시 퇴소를 했는데 술을 마시다가 마주친 군인에게 취한 상태로 훈련병들한테 잘해 주라고 주정을 부렸고, 재입소했을 때 그 군인을 조교로 다시 마주쳤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

치과를 유난히 무서워해서 치통을 참으며 글을 썼고, 진통제로 버텨가며 치과 가는 날을 차일피일 미루었다던 글. 밤 새워 글을 쓰고 나면 청진동으로 택시를 타고 나가 해장국 한 그릇에 소주를 마셨다는 낭만 서린 이야기.

너무도 오래 전에 읽은 이야기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다른 책에 나온 에피소드와 헷갈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첫 아이의 이름이 '도단'이었다는 것이다. 밤 늦게 술에 취해 돌아온 작가에게 아이가 장난감 총을 쏘자 방에 쓰러지며 죽는 시늉을 하고 나서, '아빠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라면 끓여주면 살아난다"라고 했던 에피소드는 너무도 귀여운 아기와 철없고 순진한 작가의 일면이 상상이 되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내가 다시 '도단'이라는 이름을 접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뒤 군대의 훈련소에서였다. 내무반에 비치되어 있던 잡지에 두 페이지짜리 콩트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제목이 '가족'이었다. 그 뒤에 일련번호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도 그 잡지에 연재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설마 같은 글일까 싶었는데 최인호 작가의 글이 맞았다.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도단이가 큰 것처럼 나도 가장이 되었는데...

내가 <가족>이라는 책을 읽은 것도 7~8년 전이었고, 그 당시 그 책도 발간된 지 꽤 오래 된 책이었으니, 이 작가는 이렇게 오랜 세월 가족에 대한 에피소드를 계속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내용 역시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으나 첫 아이인 '도단'이가 군대에 가게 된 이야기를 아버지의 입장에서 적어 내려간 글이었다. 너무도 신기했다. 책에서만 만났던 얼굴도 모르는 아기 '도단'이가 벌써 군대에 가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군대에 온 내가 또 다른 군인을 책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25일 최인호 작가가 향년 68세의 나이로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는 기사를 접하곤 또 다시 예전의 감상에 젖게 되고 흠칫 놀랐다. 아기 때의 '도단'이를 기억하듯 <가족>의 책자에 실린 작가의 젊은 시절이 먼저 떠오르게 되니, 평균 수명이 길어진 요즘 왠지 너무 일찍 가신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병명이 '침샘암'이라는 생소한 것임에, 불현듯 치과를 무서워했다던 옛날의 글이 떠올라 혹시나 그러한 이유로 병을 키운 건 아닌가 하는 오지랖 넓은 생각도 하게 된다.

고인의 유명한 작품은 거의 접해 보았으나 생활인으로서의 작가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주제로 그렇게 오랜 세월, 많은 글을 쓰셨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 시대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아울러 내 어린 날, 훈련소에 있던 젊은 날도 함께 추억하게 된다.

<가족>을 읽던 고등학생이 이제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가족'을 거느리게 됐다. 빡빡한 일상 속에서 예전을 떠 올리게 해 준 계기가 재능 많은 작가의 부고라는 것이 한편으로 서글프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태그:#최인호, #가족, #도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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