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설 대목이 다가오기만 하면 아버지께서는 얼린 명태 두세 뭉텅이를 사오곤 하셨다. 나무 상자에 얼린 채로 있었으니 한 상자당 20여 마리쯤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많은 명태를 어머니께서는 차가운 수돗가 댓돌에 앉아 묵묵히 손질하셨다.
명태 손질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언 명태를 상하지 않게 떼어내는 게 가장 큰일이었다. 대개 명태들이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얼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놈들 배를 칼로 가르고 내장을 꺼내 물로 씻는 일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잘 손질해 헹군 명태는 두세 마리를 볏짚 몇 가닥으로 한데 꿰어 처마 시렁에 매달았다.
나는 그런 어머니 곁에서 동생과 함께 잔심부름을 하곤 했다. 볏짚 몇 가닥에 코가 꿰인 명태 묶음을 처마 시렁에 가지런히 거는 것도 나와 동생 몫이었다. 명태 손질이 끝난 후에는 '만찬'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손질하면서 나온 명태 내장에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자글자글 끓여 내셨다. 그렇게 만든 소박한 명태 내장탕을 양껏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생은 약간 쓴 맛이 나는 그 명태탕을 별로 즐겨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따라 일찍부터 그 맛의 오묘함에 반했다. 명태 지리로 불리는 내장을 씹을 때의 쫄깃한 질감과, 거기서 나오는 즙의 깊은 맛을 어떻게 표현할까. 아버지께서는 그 내장탕을 안주 삼아 25도짜리 소주 몇 잔을 순식간에 비우곤 하셨다.
그때만 해도 명태 내장을 버리기 아까워 탕으로 끓여 먹는 줄 알았다. 하지만 동태찌개나 명태탕에 들어가는 명태 내장을 웃돈을 주고 사먹는 2000년대 이후의 상황을 접하고 나서, 그것이 명태 고유의 진미를 담보하는 '보물'임을 알았다.
그렇게 사온 명태는 봄이 오기 전까지 우리 집 밥상의 가운뎃자리를 차지했다. 설을 지나 정월 대보름 무렵이 되면 명태가 꾸득꾸득하게 마른 상태가 되었다. 그 명태에 집에서 직접 만든 두부를 슴벙슴벙 썰어 넣어 끓인 시골표 동태탕은 최고 밥 도둑이었다.
'밥상머리의 왕좌' 차지하던 명태는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그렇게 흔했으면서도 밥상머리의 왕좌를 차지하던 명태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멸치 머리엔 블랙박스가 있다> 저자 황선도 박사에 따르면 명태는 단일 어종으로는 세계에서 어획량이 가장 많은 어류다. 1980년대 중반만 해도 전 세계 어획량이 600만 톤을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근래에는 400만 톤 수준에 머물러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 중반에 5만 톤쯤 잡히다가 1980년대에 15만 톤까지 급증한 후 1990년대 이후 1만여 톤으로 급감했다고 한다. 2008년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공식적인 어획량이 '0'으로 보고되었다는 저자의 설명이다. 명태가 귀물 중의 귀물이 돼버린 것이다. 오죽하면 저자가 다니던 연구소에서 명태 자원 회복을 위한 연구 차원에서 성체를 구하기 위해 시가의 10배를 내걸고 '현상 수배'까지 했겠는가.
'물고기 박사 황선도의 열두 달 우리 바다 물고기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우리네 사철 밥상에 오르는 대표 물고기 16종의 유래와 생태, 신비, 맛있게 먹는 법을 알기 쉽게 정리한 책이다. 책 뒤 표지에 있는 '대한민국 바다 물고기에 대한 첫 보고서!'라는 홍보 문구가 조금 거창해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우리가 밥상에서 자주 보는 물고기들의 면면을 이토록 쉽고 재미 있게 풀어 놓은 것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주인공은 위에 언급한 명태 외에 아귀, 숭어, 실치와 조기, 멸이, 조피볼락과 넙치, 복어, 뱀장어, 갈치와 전어, 고등어, 홍어, 꽁치와 청어 등이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주인공들이 나열된 순서가 1년 열두 달을 기준으로 한 것임을 알아챘을 것이다. 이중에서 멸치와 홍어를 조금 더 알아 보자.
'뼈대 있는 생선' 멸치는 제목에도 등장하는, 주인공 중의 주인공이다. 그나저나 '멸치 머리엔 블랙박스'라니 무슨 말일까.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멸치를 포함하여 물고기의 머리(엄밀하게 말하면 귀 속이다)에는 '이석'이 있다. 이석은 나무의 나이테 같이 무늬 형태로 되어 있다. 이석을 통해 물고기가 몇 살인지 알 수 있고, 심지어 몇 년 며칠에 태어났는지를 알려 주는 일일 성장선까지 있다고 한다. 가히 '블랙박스'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다.
우리에게 친숙한 열두 달 생선들에 대한 '모든 것'다음은 홍어. 홍탁삼합으로 유명한 홍어는 전라도를 대표하는 물고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그 애꿎은 홍어가 전라도 사람들을 비하하는 일부 못난 누리꾼들의 속어로 쓰이게 되었을 터. 홍어가 들으면 분통이 터질 일이다. 애꿎은 홍어를 위해서라도 홍어를 경멸적인 말로 써서는 안 될 일이다.
홍어 맛의 톡 쏘는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홍어는 경골어류에 속한다고 한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홍탁삼합의 주인공인 참홍어(흑산도 부근에서 잡히는 홍어)에는 혈액 속에 요소와 요소 이전의 물질인 트리메틸아민산이 많이 들어 있다. 이 참홍어가 죽으면 몸속의 요소가 암모니아와 트리메틸아민으로 분해되면서 자극적인 냄새가 된다. 저자는 이 두 물질이 코끝을 톡 쏘는 홍어 맛의 원인 물질이라고 말한다.
위에서 참홍어는 흑산도 인근에서 잡힌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냥' 홍어는 어디에 있을까.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가, 내가 살고 있는 군산이 '그냥' 홍어의 본고장임을 알게 되었다. 군산 내항 인근 식당이나 시내 술집 등에 가면 반찬류로 '간재미'를 쓰는 곳이 많다. 미나리와 양파 등과 함게 새콤하게 무쳐 내놓는 간재미 무침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 간재미가 바로 분류학적으로 '홍어'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때 살홍어, 눈가오리 등으로 분류된 흑산도 홍어는 한 전문가의 노력으로 '참홍어'로 학회에 보고되었고, 군산 등 서해안 일대에서 '간재미'로 통용되던 것이 '홍어'라는 것이다. 간재미가 '홍어'라니 놀랍기만 하다. 군산 산(産)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나를 미친 놈이라고 놀릴 것 같다. 참고로, 나는 전남 승주(지금은 순천)가 고향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민국은 생선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해 명태, 남해 멸치, 서해 조기'라는 말은 이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게 생선류다. 그런데 최근 일본산 방사능 오염 수산물 때문에 생선을 바라보는 사람들 눈길이 곱지 않다. 욕망에 눈이 멀어 질주하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죄지 애꿎은 생선들이 무슨 죄가 있으랴. 오늘은 '불금'. 군산 내항에 들러 간재미 무침, 아니 홍어 무침에 소주 한잔 해야겠다.
덧붙이는 글 | * <멸치 머리엔 블랙박스가 있다> 황선도 씀, 부키 펴냄, 2013년 9월, 240쪽,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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