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가 재선된 지 11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1기 정부에서 경제위기를 비롯해서 산적한 국내 개혁문제들로 인해 대외정책에 많은 에너지를 쏟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민주당 대통령으로서는 기대 이상의 외교성과를 이루었다는 평가도 받았고, 그것이 나름 재선가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10년간 이어져왔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두 전쟁을 마무리했고, 숙적 빈 라덴을 사살하는 등 성공으로 평가받는 사례도 있었다.
혼란에 빠진 오바마 2기의 외교정책그러나 이는 상당 부분 부시정부 8년의 재난에 가까운 외교실패에 대한 반사이익의 측면이 많았다. 정작 5년 전 처음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부시행정부의 일방주의와 군사주의를 폐기하고 협상외교와 다자주의로의 전환을 의욕적으로 선언했던 것과 관련해서는 큰 진전이 없었다.
아프간과 이라크를 떠나왔지만 여전히 혼란과 분쟁이 지속되면서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리비아 사태에 개입해서 정권교체를 이루고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민주화 과정에서 나름의 지분을 확보한 듯했으나 시리아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골칫거리로 부상했다. 이집트에서는 민주화로 등장한 정권이 군부쿠데타로 무너졌으나 중동의 세력판도에 대한 미국의 득실계산에 의해 민주화 지지라는 원칙과는 다른 행동을 보임으로써 비판을 받고 있다.
이란핵개발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정 문제도 개선의 전망이 있기는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또한 중동에서 문제가 끊이지 않으면서 두 개의 전쟁종결로 생긴 여유를 아시아로 돌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겠다는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Pivot to Asia)' 전략은 정체상태이며, 북한에 대한 전략적 인내정책도 해결은커녕 오히려 핵기술 진전을 방임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전쟁피로감과 미국의 패권하락 여러 사항을 종합해볼 때 오바마 외교의 성격을 규정하고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미국의 역할과 해외개입에 관해 우유부단하다고 할 만큼 모호한 입장과 일관성 없는 행보를 해왔다. 한편에서는 지난 5년 내내 미국의 힘과 위신을 땅에 떨어뜨린 유화외교의 전형이라는 비난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다른 편에서는 스노든사건으로 폭로된 정보기관에 의한 사찰, 무인비행체 드론의 남용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 사이버공격에 보인 이중성 등 부시와는 전혀 달라진 것 없다며 '조지 W. 오바마'라고 부르는 등 조롱 섞인 비판을 받고 있다. 2기 정부에서 협상파를 전진배치하면서 의욕적인 출발을 했지만 그가 당면한 외교적 딜레마로 인해 여의치 않다. 오바마정부의 외교적 성패여부의 차원을 넘어 미국은 지금 패권약화에 따른 외교의 방향 재조정을 놓고 큰 고민에 빠져있다.
최근 시리아에 대한 개입 여부 논란에서 이러한 고민들이 여실히 드러났다. 아사드정부군이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화학무기를 사용했다고 결론내린 오바마는 군사개입을 위해 의회의 동의를 획득하고자 했으나 반대여론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화학무기 사용금지에 대한 국제협약도 어겼고, 오바마 자신이 군사개입의 조건으로 공표한 레드라인을 넘었기에 공격의 정당성은 어느 정도 확보되었으며, 지상군투입도 아닌 미사일공격이라는 최소한의 제한된 개입이었지만 여론의 반대는 예상외로 거셌다.
9월 초 실시된 수많은 여론조사들은 탈냉전 이후 이루어진 어떤 개입사례보다 현저하게 낮은 찬성률을 보였다. 물론 유엔 승인 확보 실패, 시리아 반군에 의한 화학무기사용 조작설, 미사일공격 옵션의 실효성 논란과 확전 가능성 등이 반대여론의 일부 근거가 되었지만 그보다는 훨씬 근본적인 원인이 놓여있다.
극도에 달한 전쟁피로감과 미국 패권의 하락이 중심에 있다. 미국은 탈냉전 이후 20여 년을 쉼 없이 해외분쟁에 이모저모로 개입해왔다. 지난 10년간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지긋지긋한 전쟁을 막 끝낸 시점에 또 다른 전쟁은 신물이 날만도 하다. 9월 10일자 <뉴욕타임스>가 시리아 개입에 대한 질문을 약간 변형해서 '앞으로 미국이 계속 해외분쟁에 주도적 역할을 계속해야 하는가'라는 문항에 대해서 62퍼센트가 반대를, 그리고 '민주화를 위해서 미국이 개입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더 높은 72퍼센트가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미국 국민들이 해외개입에 대해 얼마만큼의 부정적 의사를 가지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피로감과 더불어 미국의 패권적 능력이 크게 약화된 현실도 크게 작용했다. 2차대전 직후 전 세계 GDP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었고, 냉전붕괴 직후인 1990년대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하며 일극 패권체제로 세계를 호령했던 미국의 능력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었다. 정부폐쇄에 이를 정도로 재정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기축통화의 이점을 이용해 돈을 계속 찍어내는 양적완화로 버티고 있지만 미국의 경제기반을 좀먹고 있다. 미국만이 세계를 이끌 수 있으며, 또 이끌어야 한다는 태도가 자국민에게나 다른 국가들에게도 수용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신고립주의(neo-isolationism)의 등장 그러나 문제는 미국이 개입해야 하는 상황보다, 개입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상황이 더 많은 현실임에도 섣불리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스스로를 딜레마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만이 세계를 이끌 수 있고, 군사력 사용 여부에 대한 가치판단을 독점해 온 미국예외주의 또는 십자군적 소명의식이 여전히 워싱턴을 움직이고 있다. 네오콘의 부시정부에 비교하면 오바마정부에 와서 이런 경향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다.
또한 앞에서 지적한 대로 전쟁에 지친 국내여론도 그 어느 때보다 해외개입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바마를 비롯한 미국의 엘리트들은 정당을 초월해서 이러한 미국외교의 존재론적 소명의식에 여전히 발목 잡히고 있다. 그것을 미국의 이익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의도적으로 이용하든, 아니면 실제로 그렇게 믿고 행동하든 결과적 해악은 마찬가지다.
미국 대외정책에 대한 변화움직임은 미국의 세계 경찰로서의 역할과 적극적인 해외개입을 주장해온 공화당 내부의 분열에서도 감지된다. 현재 공화당은 오바마에 대한 적개심에 가까운 반대로 단결력을 보이고 있지만 외교노선에 대해서는 이견이 크다. 오바마의 유화외교에 대한 최전선은 여전히 부시행정부를 이끌었던 네오콘들이 맡고 있다. 중동에서의 적극적인 개입, 중국에 대한 봉쇄, 대북 강경책 촉구도 이들의 주요 의제들이다. 대통령 후보를 지낸 매케인과 롬니는 오바마의 외교실패가 미국이 취약하게 만들었다며 카우보이 스타일의 레이건 외교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롬니는 대선 당시 러시아를 다시 주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발언까지 했었다.
그러나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를 선언하며 지난 대선에 후보경선에 나왔던 론 폴 상원의원과 공화당 내 극우집단인 티파티세력 등은 이러한 외교노선에 반대한다. 이들은 미국과는 관계없는 남의 전쟁에 계속 개입함으로써 결국 미국의 안보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외교노선을 두고 매케인과 갈등을 빚고 있는 폴의원은 현재 미국을 공격할 나라는 없기 때문에 성능 좋은 잠수함 몇 척만으로도 충분하다며, 불필요한 군비확장을 중단하라고 촉구한다. 티파티 역시 건국지도자 워싱턴과 제퍼슨의 충고와 먼로의 고립주의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렇게 공화당 내부에서 목소리를 키우고 있는 소위 신고립주의(neo-isolationism) 경향은 민주당 일부에서도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거의 모든 이슈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이 이념대결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독특한 양당공조(bipartisanship)의 움직임이 아닐 수 없으며, 이것이 다음 대선에서 어떤 힘으로 작동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신고립주의는 미국이 냉전에 이어 탈냉전에 와서도 군사적 힘을 과잉확대(overstrectch)함으로써 패권약화를 초래했다고 보는 반면, 네오콘들은 여전히 미국의 예외주의와 세계경찰로서의 역할이 곧 국제정치의 안정을 가능하게 한다는 패권안정론(hegemonic stability)을 고수한다. 무정부상태의 국제정치에서 국제연합도 무력한 상황에서 미국이 세계경찰로서의 패권역할을 중단하면 이는 곧 혼란과 분쟁으로 이어질 것이고, 결국 미국의 안보도 위협받게 된다는 논리인 것이다.
현재 오바마는 신고립주의와 패권안정론 사이에서 자신의 노선을 결정하지 못한 채 사례별로 대증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시리아에 개입에서의 딜레마는 푸틴의 막판중재로 한 숨을 돌렸지만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푸틴의 영향력만 한껏 키워주었고, 아사드정권에게 면죄부를 주었을 뿐 아니라, 반군에는 치명타가 되었다. 중동의 민주화 지지라는 미국의 대외 신뢰성과 영향력은 타격을 입었다.
오바마의 '가벼운 발자국 외교'와 한반도이런 가운데 9월 초 68차 유엔총회에서 오바마가 행한 연설이 관심을 끈다. 남은 임기 동안 달성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싶은 외교 목표로 이란 문제 해결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정 체결 두 가지를 거론했다. 내년 중간선거 이후는 레임덕이 온다고 예상한다면 앞으로 1년 남짓의 시간동안 오바마는 최근 좋은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는 외교현안에 집중하겠다는 의지표시로 판단된다.
새로운 시도나 적극적인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는 현상유지 위주의 접근을 말하는데, 이는 2기 정부의 외교원칙으로 내세운 소위 '가벼운 발자국 외교(light foot print diplomacy)'와도 연결된다. 직접적이고 대규모의 군사행동을 배제하고 가능한 협상을 통한 해결을 선호하되, 개입하더라도 최소한의 개입만 한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문제는 남는다. 미국의 영향력 약화와 능력감소는 협상력의 약화도 동반할 것이기 때문에 이 역시 녹록하지는 않다. 협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남은 옵션이 별로 없다.
또한 위험부담을 줄인다는 원칙하에 별다른 시도 없이 시간만 보낼 경우 문제가 더 커질 가능성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의 부상과 북한 문제다. 북한 핵문제는 전략적 인내에 대한 대내외의 비판에도 북한의 선제적 행동을 요구하는 입장을 상당 기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중국문제도 시진핑정권 출범 이후 양국관계 호전으로 아시아 권력재편의 긴급성은 약해진 상황이다.
이 두 문제는 미국 내 해외개입거부 여론과 재정절벽의 상황에서 아웃소싱전략으로 갈 것이 확실해 보인다. 즉, 북한문제는 중국의 대북정책의 변화를 통한 압박에 기대는 한편, 아시아 권력재편과 대중국 견제 역시 동맹국 한국과 일본에 아웃소싱하는 전략인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동북아 역학으로 인해 미국의 아웃소싱 전략의 성공 여부는 불투명하고, 구조 및 지정학적 변수를 함께 내포한 중국의 부상과 미국패권의 하락에 따른 외교노선의 혼란과 이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코리아연구원 홈페이지(knsi.org)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이 글을 쓴 김준형 교수는 한동대에서 국제정치를 강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