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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동안 시놉시스를 붙들고 있던 녀석의 뮤지컬단은 공연 한 번 못해 보고 해체되었다. 단원들의 불성실함으로. 녀석은 애쓴 게 아깝지도 않은지 "공연 안 한대. 할 수 없지"하고 그뿐이다. 그러더니만 방학 끝나기 5일 전, 녀석의 책상 스탠드가 밤 늦도록 빛을 내뿜고 있다. 방학 숙제를 몰아서 하는 중.

"엄마, 책 사야 해. 수학 관련 책 읽고 독후감 쓰는 게 숙제야."
"엄마, 과학 리포트는 어쩌지?"
"엄마, 영어 독해는 엄마가 도와줄 거지? 응? 제발…."
"불이나 꺼. 동생들 자게. 그리고 마마 걸이냐? 엄마를 몇 번 불러?"

답 대신 이 앙 다문 대꾸만 한다. 등짝 한 대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나 평소 비폭력을 강조하는 엄마이니 눈을 질끈 감는다. 결국 2학기 영어교재 본문 독해는 도와주기로 했다. 본문 옮겨 쓰고 해석 달기가 숙제인데 본문만 옮겨놓고 해석 줄은 깨끗하게 비어 있다.

"일단, 한 대 맞고 시작하자."
"그래!"

꿀밤 한 대. 녀석은 맞고도 배시시 웃는다. 하다 보니 내가 불러주는 해석대로 받아 적기만 하고 있다.

"차라리 엄마가 쓰는 게 빠르겠다. 공책 이리 줘."
"안 돼. 내 글씨체여야 한단 말이야."

아이고! 영어 숙제는 결국 절대적인 시간 부족으로 개학하고 나서야 끝을 맺었고 과학과 수학 숙제는 어찌어찌 마감을 지켰다. 개학을 하고 보니 아이는 수학 중등반에 들어가 있다. 시험 성적은 좋지 않았으나 평소 보는 수행평가 점수가 좋았단다. 영어는 D. 음악은 상장까지 받아왔다.

인지학습 능력, 즉 공부는 분류하고 재해석하며 다시 조합하는 분야로 재능에 속하는 것이다. 아이는 음악적 재능, 즉 느끼고 감정을 이입하고 표현하는 재능은 있으나 공부 재능은 없는 걸까?

음악적 재능, 공부 재능에 비할 수가 없다?

아이를 무겁게 하는 책가방과 아이를 즐겁게 하는 기타 가방 가방안에는 공부할 책들이 가득하고 조르고 졸라 생일 선물로 받은 기타 가방엔 먼지가 내려앉는 중이다. 책가방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지는 날, 아이는 기타 가방의 먼지를 털어내고 기타줄을 만져줄 모양이다.
아이를 무겁게 하는 책가방과 아이를 즐겁게 하는 기타 가방가방안에는 공부할 책들이 가득하고 조르고 졸라 생일 선물로 받은 기타 가방엔 먼지가 내려앉는 중이다. 책가방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지는 날, 아이는 기타 가방의 먼지를 털어내고 기타줄을 만져줄 모양이다. ⓒ 한진숙
엄마라는 직함을 달고 나면 내 아이가 매일매일 크는 것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공부 재능을 기대한다. 아이는 어릴 적 청음 능력이 있어서 한 번 들은 피아노 선율을 엇비슷하게나마 건반으로 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을 발견했을 때 기쁨은 '어머, 이런 재주가!'하며 손뼉 한번 치는 정도. 엄마라는 사람들이 원하는 공부 재능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과는 비교하기 어렵다.

다른 재능을 원한다는 무언의 표시로 음악 상장을 현관문에 게시하지 않았다. 우리집은 상장을 받아오면 일 주일 동안 현관문에 걸어 놓고 온 가족이 알아봐주는 기간을 둔다. 거기에 걸려야 자랑거리다. 아이는 내 의도를 알았을까? 지 상장 어디 있는지 물어보지도 않는 걸 보니 저도 관심 없나 보다.

이 아이가 공부에 재능이 있나 없나 고민하는 사이 2학기 중간고사가 다가왔다. 한 달 전인데 아이는 수학 공부한다고 부산하다.

"공부해야겠어. 저번 점수는 정말 아니었어."
"당연하지. 근데 어떻게 그런 장한 생각을?"
"학교 진로지도 시간에 선생님이 하는 얘기 듣고 정신이 번쩍 났어. 이대로는 안 돼, 정말이야, 엄마."

아이의 정신을 번쩍 나게 했다는 그 선생님 말씀을 아이의 말을 빌려 요약하자면 이랬다.

너희들 중 1%만 원하는 고등학교에 갈 수 있고 99%는 다 그저그런 학교에 간다. 1학년 성적보다 2학년 성적이 나아야 하고 3학년 성적은 더 좋아야 한다. 도덕, 음악, 체육 이런 거 점수 아무리 높아도 영어, 수학 점수 낮으면 소용없다. 반영 정도가 엄청 차이 난다.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도덕 점수는 상위권이고 음악은 상장까지 받을 정도지만 우리 아이는 영어, 수학을 못하므로 그저그런 학교에 가는 99%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거다. 여기서 그저그런 학교란 뺑뺑이로 가는 일반 고등학교를 말하는 거란다.  

집에서 부모가 아이를 자극하지 않아도 아이는 충분히 자극받고 있다. 아이들의 불안감을 부추기든 승부욕을 발동시키든 공부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학교는 어떤 방법이라도 상관없는 듯하다. 그 진로교육에서 선생님이 그런 위협적인 현실 정보 전달보다 아이들에게 "왜 공부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는 없었을까?

"공부는 해서 뭐에 쓸 건데?"라는 질문을 가슴에 품은 아이는 주인의 삶을 사는 첫 발자국을 뗄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떠하든 본인의 결정과 선택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힘,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이에게 원하는 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공부하고 싶다는 말은 엄마들한텐 그 어떤 밀어보다 달콤하다. 이걸 어쩌지? 이때를 놓치면 안 되는데…. 조바심으로 몸이 둥둥 뜨는 느낌이다.

"문제집이나 사러 가야겠다."
"아직도 안 샀어? 공부하려는 거 맞냐?"
"히히…. 자꾸 까먹어…."

달콤한 기분이 푹 사그라든다. 문제집을 자꾸 까먹어서 안 사고, 피곤해서 안 사고, 바빠서 못 사는 사이 시험은 보름 앞으로 다가왔고 며칠 공부하던 아이는 공부할 문제집이 없다는 이유로 대놓고 컴퓨터와 스마트폰 삼매경으로 고고씽! 참다 참다 내 눈에 쌍심지가 켜질 무렵 아이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갑작스러운 와병 소식과 단기간의 투병 그리고 영면.

"내 공부잖아..." 그 새 한뼘 큰 아이

발아, 행복하니? 제 요새에 노트북 들고 가 저만 아는 프로그램 하는 아이는 발을 까딱이며 신이 났다. 저 발이 공부하는 재미로 신이 나길 바라지만 녀석의 재능은 아직 오리무중.
발아, 행복하니?제 요새에 노트북 들고 가 저만 아는 프로그램 하는 아이는 발을 까딱이며 신이 났다. 저 발이 공부하는 재미로 신이 나길 바라지만 녀석의 재능은 아직 오리무중. ⓒ 한진숙
검은 상복을 입은 아이는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삼일장을 지내고 삼우제까지 지내고서야 등교했다. 할아버지를 잃은 것이 진심으로 가슴 아파 아이는 많이 울었다. 아이는 우리 집안의 첫째고 어릴 적 할아버지의 품에 가장 많이 안겨본 아이였다. 아이는 어찌나 용을 썼던지 입안이 헐어 밥을 먹기 힘들어했다.

등교하고 이틀 지나자 추석 연휴. 연휴가 끝나고 3일 지나면 시험이다. 마음이 급해진 아이는 이번 시험은 포기해야겠지? 했으면서도 곧장 문제집을 사왔다.

"문제집 얼마야? 엄마가 줄게."
"왜 줘? 이건 내 공부잖아."

아…. 그 사이 아이는 한 뼘 컸다.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말랑말랑해진 엄마는 문제집 값에 만 원을 더 얹어서 건넸다. 지 공부란다! 엄마를 위해서도,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닌 지 공부! 이번 시험 점수가 어떠하든 엄마는 이미 많이 행복하다.

그래도 시험을 포기하란 말은 하지 않는다. 시험기간은 왜 하필 연휴 뒤에 배치되어 있는지. 명절은 가족이 모여 온기를 느끼는 날이건만 시험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명절에 간신히 얼굴만 비치고 책상 앞에 앉아 있으란 것인지. 황금연휴가 시험 대비할 최적의 시간으로 여기지 않는 엄마를 둔 아이는 친가와 외가를 순례했고 아이가 공부한 날은 고작 5일 정도. 문제집을 다 풀지도 못했다.

이별과 정리라는 인간의 기본 도리를 배운 아이에 대한 평가는 전혀 측정되지 않았고 수학과 영어, 국어, 사회 등등의 점수로만 표기되어 나왔다. 물론 공부한 만큼만. 생각보다 수학 점수가 잘 나와서 잠깐 놀랐다. 결석한 5일 동안 진도 나간 부분 문제만 못 풀었다. 영어는 영영…. 아직 내 아이는 그저그런 고등학교를 갈 수밖에 없는 99%다. 나한테는 상위 1%. 매일매일 조금씩 새 순을 틔우고 있는 상위 1%.


#사교육 #마이동풍#공부#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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