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동북아는 '국민행복' 전성시대다. 박근혜 정권은 대선 캠프시절부터 국민행복을 줄기차게 외치고 있다. 중국 시진핑 정권 역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과 "민생안정"을 성취하자는 "중국의 꿈"을 강조하고 있다. 6월말 개최된 한·중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박근혜 정권이 강조하는 국민행복이 중국의 꿈과 같다는 공감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국민행복과 동북아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북한 김정은 정권 역시 부쩍 민생을 강조하고 있다. 김정은의 민생행보가 늘어나고 있다거나 평양에 대규모 놀이공원이 성황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불과 몇 달 전까지 핵전쟁 운운하던 것과는 천지차이다. 정체성이 다를 수밖에 없는 동북아 신생 정권들은 왜 한결같이 국민행복을 내세우고 있는가? 성격이 다른 행위자가 유사한 행동을 한다면 그 원인은 각 행위자에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처해 있는 유사한 구조에 있다.
박근혜 정권의 취임사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국민 개개인의 행복의 크기가 국력의 크기가 되고 그 국력을 모든 국민이 함께 향유하는 희망의 새 시대를 열겠습니다." 평생 권력문제를 논구한 미셸 푸코는 근대 자유주의 통치전략의 핵심은 "인간의 행복을 국력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이전까지의 통치전략은 반항하는 구성원을 가차 없이 죽이는 '칼'로 상징되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통치전략은 생명을 권력의 유용한 자산으로 삼아 관리하고 양육한다. 이를 위해 공중보건, 의료, 주거안정 등 소위 사회복지를 '발명'하였다는 것이다.
그 행복의 궁극적인 목적은 최적화된 노동력 확보와 그에 기반한 권력의 통치효율성 제고였다.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인공자궁 속 인간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인공지능 기계들은 인간들에게 '안락한' 가상현실을 제공하지만, 실재의 인간들은 기계들을 위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인간 건전지 신세다. 만약 인간들이 매트릭스를 거부하려 한다면 스미스 요원으로 상징되는 체제폭력이 가차 없이 작동한다. 행복증진이라는 권력의 기만은 폭력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희생되는 다수물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그렇다. 국민의 행복을 국력이 되게 하는 게 무슨 잘못인가? 더군다나 그 행복을 누군가 독점하지 않고 모든 국민이 향유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 행복은 과연 '모든' 국민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인가? 발전론 학자 질베르 리스트가 논거하 듯 근대적 신앙이 되어버린 발전은 기껏해야 자연환경과 인간을 희생시킨 대가로 얻어진 반대급부에 불과하다. 동북아 국가들이 외치는 국민행복이 경제발전에 기반하고 있다면, 그러한 행복 역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법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희생시켜 얻는 산물일 뿐이다. 물론 그 희생양은 다수의 행복이었다.
초고속 성장을 구가하는 중국의 수천만 부자들의 행복은 결국 기본적 노동권은 말할 것도 없이 팔다리가 잘려나가도 제대로 보상조차 못 받는 수억 농민공들의 불행에 기반하고 있지 않은가? 중국정부가 아무리 '조화로운 사회'를 외치고 '중국의 꿈'을 외친다 하더라도 상위 소득 1%가 전체 부의 41%를 차지한다거나, 지니계수가 유엔의 경고치를 넘어 0.5에 육박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국 부자들의 행복이 기껏 다수의 불행을 대가로 얻어진 결과임을 반증한다. 더욱이 생계악화에 항의하는 연 수만 건의 시위는 국가에 의해 강력히 탄압되고 있기도 하다. 체제 수호를 위한 국가 폭력의 작동이다.
한반도는 다른가? 평양에 대규모 놀이공원을 만든다고 인민들이 정말 행복해지는가? 그것은 기초적 생계조차 어려운 대다수 인민들의 불행에 딛고 서 있는 평양 특권계급의 행복일 뿐이다. 남한은 어떠한가? 소위 노동유연성이라는 명분하에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극소수 재벌을 위한 인간 건전지로 전락하고 있는가. 도시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서민들은 삶터에서 무차별적으로 쫓겨나고 있지 않았는가?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사태, 뉴타운 개발 그리고 전월세 폭등이 그 단적인 사례다.
일본도 다르지 않다. 일본은 냉전 초기 미일동맹체제에 안보를 맡기고 대내적으로 복지체제를 구축하였다. 그것을 통해 확보된 안정적 노동력을 바탕으로 전후 경제발전과 '국민행복'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들 역시 무에서 유를 창조한 마법이 아니었다. 애초 경제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미일동맹체제는 오키나와인들의 막대한 희생을 딛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이즈미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 이후 안정적 복지체제조차 흔들리고 있다. 최근 후쿠시마 원전사태 역시 소수 '원자력 마피아'의 행복추구가 결국 다수 국민들의 치명적 불행을 초래한 결과다.
'행복투쟁' 타인의 희생 없이 행복이란 게 생겨날 수 없다면, 결국 다수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행복에 대한 평등한 분배가 필수적이다. 소수가 독점하는 행복을 다수가 나눠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투쟁이다. 그 매개 역할은 결국 국가의 몫이다. 동서고금 국가의 최고 목표는 공공이익의 증진이라고 늘상 주장되어 왔다. 그 공공이익이 바로 행복의 평등한 분배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 속 국가는 그렇지 못했다. 국가는 다수의 행복이 아니라 소수의 행복을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소수의 행복 독점에 저항하는 이들은 언제나 광포한 국가폭력에 맞서야 했다.
개혁 개방기 중국 정권은 신흥자본가와의 결탁내지는 스스로 자본이 되어 다수 인민이 누려야 할 행복을 독점하고 있다. 폭스콘 노동자들의 잇따른 자살과 시위는 '중국의 꿈'이 정치적 수사임을 암시하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 인민 행복을 외치는 시진핑 정권에서도 노동자들의 독립 노조는 언제나 강력히 탄압될 것이다. 중국내 수많은 노동자들이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들고 시위대열에 합류한다는 사실은 개혁 개방기 중국 인민의 행복이 굶주리던 마오 시대보다도 못하다는 걸 반증한다.
민생과 핵개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김정은 정권의 마법쇼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아베 정권의 행보도 도긴개긴이다. 경제발전을 위해 양적완화를 시도하려는 소위 아베노믹스는 결국 통제 불능의 인플레이션을 유발해 소비 진작은커녕 오히려 국민 생계에 고통을 더할 것이 뻔하다. 더욱이 국군주의에 대한 향수로 국민들의 고통을 마취시키려는 그야말로 신파극조의 정치 행태는 일본의 대외관계마저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다.
박근혜 정권 역시 무엇이 다르겠는가. 최근 기초노령연금 파동은 국민행복을 실현시키겠다는 공언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회복지를 위한 재원이 부족하다면 행복을 독점하고 있는 재벌에게 보다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면 그만이다. 그것은 딱히 개혁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동안 다수의 희생을 기반으로 그들이 누리던 행복을 '약간' 회수하는 것에 불과할 테니까. 재벌이 살아야 국가경제가 살고 그래야 결국 국민이 잘 산다는 '낙수효과'는 사실로 판명됐는가? 재벌은 사상 최대 수익을 얻는다는데 왜 국민들의 생계고통은 가중되는가? 재벌증세 절대불가를 외치면서 한편으로 국민행복을 주장하는 것은 '병진노선'에 목매는 김정은 정권만큼이나 몽상적이다. 아니, 기만적이다. 단언컨대 돌로 금을 만들겠다는 연금술이다.
진정한 행복은 권력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돌고래 쇼를 벌이던 제돌이가 바다로 풀려놨다고 과연 행복해졌을까? 그의 지느러미에는 흉측한 위치추적기가 부착돼 죽을 때까지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될 텐데 말이다. 권력과 인간의 관계도 비슷하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은 인류사 그 어느 때보다 교묘한 쇠사슬에 묶여 있다. 권력이 극단으로 밀어붙인 '경쟁체제'라는 쇠사슬, 모든 인간들을 개미지옥으로 몰아넣어 상호 연대를 원천봉쇄하는 족쇄 말이다. 권력의 분할지배이며 원격 통치다.
진정한 행복 추구는 인간을 보다 교묘히 '사육'하려는 권력의 꼼수를 직시하고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그 위에서 권력이 부정하게 독점하고 있는 행복을 당당하게 되찾아 와야 하는 건 아닐까? 그 출발은 언제나 정당함을 추구하려는 용기였으며 용기이고 용기일 것이다. 힘내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홍서님은 동덕여대 연구교수입니다. 이 글은 코리아연구원 홈페이지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kns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