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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내 이름은 원유석(元有碩)이었다. 그러던 것이 내가 중학교 입학할 때 원유만(元有萬)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초등학교 동창들은 유석이라고 부르고, 중학교 이상 동창들은 유만이라고 부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초등학교 동창이라도 모두 유석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동창회 모임을 하면서 유석이가 유만이로 바뀐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도 여러 번 설명을 해줬다. 그렇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옛날 그대로 유석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초등학교 친구 중에 많다는 뜻이다.

아직도 유석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에는 초등학교 동창생들 말고도 의외로 가까운 친척 분도 있다. 주로 누나나 고모들이 그런 편인데 이미 충분히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언젠가 순덕이 누나에게 왜 그런가 물어 보았더니, "널 보면 유석이가 먼저 떠올라. 암만혀도 유만이는 쪼끔 어색허당게~"라고 답한다. 이름이 바로잡히고 40여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어색하다는 것이다. 아마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은행에 입금한 돈도 '선입선출'  원칙이라 해서 먼저 예금한 돈이 먼저 출금된다. 예금자 입장에서 보면 먼저 입금한 돈은 이미 이자가 많이 붙어 있으니까 가능하면 건들지 말고 나중 입금한 돈을 먼저 내줬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사람의 기억력도 먼저 입력된 정보가 먼저 출력되게 되어 있는가 보다.

나는 그렇게 13년을 원유석으로 살다가 중학교 입학 때 이름이 잘못된 것을 알았다. 그것도 중학교 배정에 필요한 서류를 내야 해서 호적초본인가, 주민등록초본인가를 떼어 보고 알았다.

처음에는 원유석이라는 이름이 서류상에 없어서 열네 살이나 먹은 아들을 잃어버렸다고 난리 아닌 난리가 났다. 당시만 해도 호적 관계 서류가 온통 한자 투성이에다 흘려 쓴 글씨가 많았다. 복사기가 나오기 전이라 사본을 하나 떼어도 모든 서류를 담당 공무원들이 일일이 손으로 써야 했는데, 바쁘다 보니 정자체가 아닌 흘려 쓰는 약자체를 주로 썼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족 수가 많아 서류가 여러 장인데다 흘려 쓴 글자라 알아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열네 살이나 먹은 아들이 호적에 없다?

그때는 초등학교에 한문수업이 없던 때라 나는 한자를 잘 몰랐고, 고등학생이던 형이 옥편을 뒤져가며 꼼꼼히 살펴 보았다. 그러나 워낙 알아보기 어려워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쉽게 밝혀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돈 들여서 자식들 가르쳐 놓으니 한문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른다고 급한 성질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우리 형제들을 나무랐다.

드디어 형이 뭔가를 찾아 냈다. 원유만이라는 생소한 이름자가 하나 있는데 그 녀석 생년월일이 유석이하고 같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내 사태를 파악했다. 이름이 바뀐 것이다. 이제는 도대체 왜, 어떻게 해서 유석이가 아니고 유만이로 등록되었냐는 문제로 시끄럽게 되었다.

이 때 아버지가 옛 일을 하나 기억해냈다. 작은아버지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내가 태어 날 무렵 아버지가 중풍으로 전주예수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가장이 입원 중인 상황에서 집안 누구가 나서서 출생신고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있겠는가. 그렇게 나는 세상에 나오기는 했지만, 아직 정식으로는 지구인의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작은아버지가 문병 오셨다. 아버지는 셋째 아들의 출생신고를 작은아버지에게 부탁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끝에 작은아버지에게, "셋째 아덜의 출생신고가 많이 늦었으니 집에 가거든 자네가 신고 좀 해주소"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아버지 말이 맞다면 상황이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당시로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제 공은 작은아버지에게 넘어갔다. 작은아버지가 면사무소에 갈 때 내 이름을 제대로 알고 갔는지 그것만 확인하면 되는 일이다.

우리 집에서 50여 미터 거리에 사는 작은아버지는 연락을 받고 금방 오셨다. 갑자기 불려 온 이유를 알게 된 작은아버지는 쑥스럽게 웃으며 머뭇거리다가 어떻게 된거냐는 아버지의 채근에 할 수 없다는 듯 당시 상황을 재현해냈다.

병원에 다녀온 그 이튿날 면사무소에 들른 작은아버지는 나의 출생신고를 구두로 접수했다. 이것저것 필요 사항을 물어 적어나가던 면사무소 직원이, "애기 이름은요?" 하고 물을 때에야 비로소 작은아버지는 갓 태어난 조카 이름도 모르고 신고하러 온 것을 깨달았다.

"이름 몰라요?"

낭패였다. 이 시간에 집에까지 갔다 오기는 너무 늦었다. 마을에 꼭 한 대 이장댁에 비상 연락용 공동 전화가 설치된 것이 내가 중학교 2학년 무렵 일이니, 아직 전화도 없을 때라 작은아버지로서는 답답할 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 때 쩔쩔매는 작은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면 접수계원이 먼저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고 작은아버지는 주장했다.

"우선 알기 쉽게 '일만 만' 자로 하고 다음에 정확히 정정하시지요." 


웃지 못할 사연은 작은아버지의 사과로 마무리

이 대목에서 작은아버지는 자기가 면사무소 걸음을 한 번 더 했어야 하는데 농사일에 바쁘다 보니 그러지 못했다고 하면서 자기 잘못이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여태까지 숨긴 것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변명이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해서 기가 막혔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이렇게 해서 유석이가 유만이로 둔갑한 웃지 못할 사연은 작은아버지의 사과로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으로 나는 중학교에 진학하여 한자의 필요성을 깨달아 한문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었다. 이 때 배운 한자 공부가 지금까지 도움이 되고 있다.

이상한 것은 내 이름을 두 개로 만든 작은 아버지도 나와 똑같이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작은아버지의 호적상 함자는 문(文) 자 식(植) 자였다. 문패에도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족이나 동네에서는 병(秉) 자 식(植) 자로 쓰셨다. 이 부분에 대하여 따로 들은 바 없으나 아마 나와 비슷한 과정으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제 유석이라는 내 본래의 이름을 지어주신 아버지도, 조카의 이름도 모르고 출생신고 하러 가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조카의 이름을 두 개로 만들어주신 작은아버지도 모두 이 세상에 안 계신다. 그리고 나는 여태까지 두 개의 이름을 편리하게 잘 나누어 사용하고 있으니 전혀 불편하지도 않고 충분히 만족하다.

예전에는 이름을 개명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다. 편지봉투를 한아름 들고 가거나, 주변 사람들의 탄원서를 수십 장 받아가야 했었다. 요즘은 호적법이 바뀌어 개명 절차가 간소화되어 비교적 쉽게 법원의 허가가 난다고 한다. 그래서 본래의 이름을 되찾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실제로 내 주변에서 발음이나 속뜻이 좋지 않은 이름으로 남몰래 고민하던 사람들이 개명 신청을 통해 이름을 바꾸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나는 내 이름 두 개가 모두 맘에 든다. 앞으로도 계속 이대로가 좋다.

원인이야 어쨌거나 13년 동안이나 자식의 이름이 바뀐지도 모르고 살았다는, 지금 생각하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이야기, 참으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해프닝 한 토막이다.


태그:#원유석, #원유만, #이름, #개명신청,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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