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 중인 영화평론가 듀나의 새로운 소설집이 지난 9월 출간됐다. 창비 청소년문학 시리즈 53권인 <아직은 신이 아니야>가 바로 그것이다.
SF소설로서 11편의 이야기를 묶어낸 이 소설에서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볼 수 있다. 단편소설이 릴레이로 연결된 듯한 느낌의 구성에서 다양한 주인공들이 20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전주에서 어느 여학생에게 갑자기 발현된 초능력을 시작으로 인류는 점차 '누구나 초능력을 쓸 수 있는' 세계를 살게 된다. 배터리(타인의 능력을 끌어올려주는 힘을 지닌 초능력자)와 염동력자(물건이나 사람을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초능력자) 그리고 치유력자(신체를 치유하고 단점을 보완시켜주는 초능력자) 등으로 분류돼 각각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진다.
현재까지의 사회구조와는 다르지 않지만, 발휘할 수 있는 초능력의 강도에 따라서 개인의 등급이 매겨지고 그에 따라 대우도 달라진다. 말하자면 초능력이 또 하나의 '스펙'이 된 것 같다고 할까? 염동력자는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 날개없이 자유로운 비행이 가능하며, 다른 동력 없이 비행기를 띄워서 날아다니게 만들 수 있다. 치유력자는 불치의 병까지 치료하면서 인류의 수명을 늘려놓는다. 배터리는 이들의 능력이 극대화되도록 보조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존재로 자리 잡는다.
초능력이 스펙이 된 시대, 인류의 미래는...인류는 흡사 새로운 계급이 형성된 것 같은 세상을 맞이한다. 하지만 본문에 묘사된 인물과 세계를 보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전혀 달라지질 않고, 도구만 변화한 듯하다. 초능력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지만 인류는 여전히 물질과 권력에 대한 탐욕을 놓지 못한 상태고, 오히려 초능력을 이용한 전쟁과 테러가 심각한 지경에 이른다. 핵무기보다도 강력한 초능력의 힘 때문에 인류는 궤멸의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200광년 너머의 별을 여행하는 일이 가능해졌지만 편리해졌을 뿐 삶의 질이 더 나아졌는지는 미지수다.
인류를 대신하여 동물, 특히 돼지의 뇌를 이용한 '배터리' 생성 작업이 빈번해진다. 초능력을 가진 대중이 강력한 힘을 갖게 되자, 지배층은 통제를 위해 세뇌작업도 불사한다. 그런데 그 방식 역시도 오늘날의 매카시즘, 혹은 '반공주의'와 흡사하게 닮아있다.
"그제야 모든게 이해됐어요. 인간 감정 중 증오처럼 안정적인 것은 없어요. 사랑과 같은 감정들은 조건만 주어지면 쉽게 변형되고 휘발되지요.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증오만은 끝까지 남아요. 사람들이 증오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감정도 없죠. 염력 강화와 안정화를 위해 이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우리도 알고는 있어요. 단지 에너지를 얻기 위해 사람들의 기억을 과거에 가두고 부정적인 감정만을 쏟아붓는 행위가 야만적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죠. 당연히 이 나라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텐데, 어느 순간 누군가가 그 선을 넘어버렸고 나머지 사람들이 우르르 뒤따른 거예요.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세미나에서 이 프로젝트에 대해 모를 리 없는 어느 한국인 교수가 우줄거리며 한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냉전 체제야말로 한반도의 제일 큰 자산입니다….'" (본문 188쪽 중에서)이야기 속에서 대구시는 염력발전장치를 개발한다. 사람들의 초능력을 이용한 대규모 전력시설을 건설해 한반도 전체에 공급한다는 프로젝트. 그리고 초능력 에너지 통제를 위해서 '영원히 지속되는 한국 전쟁'이라는 가상 현실을 사람들에게 주입한 것이다. 이미 21세기를 지난 미래에서도 여전히 '빨갱이'라는 적을 설정하는 일은 단합에 주요한 도구였나 보다.
상상력이 빚어낸 세계, 흥미롭다작가는 직접적인 현실 비판을 위해서 글을 쓰지 않은 것 같다. 무거운 주제의식이 아니라 특유의 상상력을 통해서 현실에 기반한 또 다른 세계를 빚어냈다고 보는 게 조금 더 소설의 성격에 가까운 듯하다. 초능력이 당연하게 쓰이는 시대에서 다양한 등장인물과 인류가 펼쳐내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매우 흥미롭다.
각각의 짧은 이야기는 서로 다른 주인공과 줄거리를 선보이면서도 기묘하게 어느 지점에서 연결된다. 그렇게 조합된 내용이 하나의 실에 꿰이듯 이어지면 거대한 하나의 세계가 드러난다. 이런 부분도 재미있으며, 개별의 이야기가 스릴러·동화·추리소설 등 다양한 장르로 이뤄져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감정과 상황을 세밀하게 잘 묘사한 듀나의 소설을 읽으면, 마치 한 편의 SF영화를 글로 표현해놓은 듯한 느낌도 든다. 초능력과 우주를 항해하는 기계문명.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다양한 소재들과 버무려진 작가의 글은 독자를 기발한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소설로서 지녀야 할 미덕을 가장 충실하게 이뤄낸 셈이다.
덧붙이는 글 | <아직은 신이 아니야> (듀나 씀 | 창비 | 2013.09. | 1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