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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판을 달리는 자전거 여행은 언제나 푸근하고 배부르다.
 가을 들판을 달리는 자전거 여행은 언제나 푸근하고 배부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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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곡식이 익어가는 이맘때면 애마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리고 싶은, 흥미로운 이름의 마을이 있다. 전북 김제시에 있는 동네 '광활면', 김제 평야에 있는 마을로 알알이 쌀을 품은 벼가 고개를 숙이고 농부의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얼마나 들이 넓기에 광활면이라 했을까…. 지평선 위로 들녘과 평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 지었다는 마을 이름이 이채롭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전거 여행자를 달려가 보고 싶게 만든다. 광활면이 있는 '징게 맹갱 외에밋들(김제·만경 너른 들)'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의 무대이기도 하다.

매년 10월 초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벽골제에서 '김제 지평선 축제'를 벌이는 호남평야의 중심, 전북 김제는 북쪽의 만경강과 남서쪽의 동진강이 서해바다에서 만나는 동안 뾰족한 원뿔 모양을 그리며 만들어낸 곳이다. 그 툭 튀어나온 땅 전체가 광활한 들녘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다는 곳이다. 추석이 지나고 벼가 고개를 숙일 즈음 황금물결로 출렁이는 김제 들판을 찾으면 그야말로 가슴 탁 트이는 후련한 가을 여정을 만끽할 수가 있다.

인심 좋은 지평선 들녘, 김제평야

구운밤 냄새가 더욱 고소하게 느껴지는 계절 가을.
 구운밤 냄새가 더욱 고소하게 느껴지는 계절 가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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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를 매만지는 농부의 손길이 자식을 돌보는 듯 하다.
 벼를 매만지는 농부의 손길이 자식을 돌보는 듯 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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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에서 6일까지 동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수리시설이라는 벽골제에서 열렸던 김제 지평선 축제는 그야말로 배부른 잔치마당이었다. 흥겨운 농악소리에 쌀과 떡, 과일, 구운밤의 고소한 냄새 등 추석 명절처럼 풍성했다. 큼직한 배 한 개와 구운 밤 몇 개를 사서 먹었는데, 식사를 한 것처럼 든든했다. 축제가 열리는 벽골제는 최근 저수지 제방의 중심에 위치했던 수문(중심거)을 새로 발굴해 벽골제 복원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 중이라고 한다.

지도를 얻으러 들어간 관광 안내소. 직원 아주머니는 자전거 여행할 때 먹으라며 떡 한 봉지를 내주셨다. "이거 고마워서 어떡하죠" 했더니 " 다 정이죠 뭐"라며 웃으셨다. 참 다정한 분이다. 이후 김제 평야위에서 넉넉하고 인심 좋은 분들을 여러 번 만났다. 옛말에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했던가. 아마도 풍요로운 들녘이 펼쳐져 있어서 그런 듯싶다.    

벽골제에서 죽산면·광활면을 따라 논길이 계속 이어져 있는데, 들녘이 넓다보니 이곳은 농로도 2차선의 차길이다. 가끔씩 지나쳐가는 차량들로 한적한 논길가에 예쁜 코스모스가 피어나 손을 흔들며 자전거 여행자를 반겼다. 김제시에서 코스모스길이라며 심어놓은 것으로 노랗게 익어가는 들녘과 참 잘 어울리는 꽃이다. 지나가던 자동차들도 길가에 잠시 서서 기념사진을 찍고 갔다.

추수로 바쁜 농번기라고 하지만 들녘에 나온 농부님들은 몇 안 됐다. 대신 농촌의 일손을 크게 줄여준 기계 콤바인이 벼를 몸통 속에 빨아들이며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어떤 농부는 한낮의 따가운 햇살을 피하기 위해 우산을 쓰고 논가에 앉아 있어 웃음을 머금으며 다가가 봤다. 여유로운 충청도 말까지 쓰는 아저씨는 "올해 여름 햇볕이 좋아 풍년이 예상된다"고 하셨다. 무더운 여름 날씨 덕에 사람들은 고생했지만, 벼들은 뜨거운 햇볕을 양분으로 삼았나 보다.

논길을 달리다 산짐승이 누웠다가 간 듯 들판에 드문드문 벼들이 쓰러져 누워 있는 모습이 보여 궁금했는데 농부 아저씨가 바로 알려주셨다. 바람에 쓰러진 벼들로, 비료를 너무 쓰면(사람으로 치면 고영양화) 겉으로는 멀쩡해도 바람만 조금 심하게 불면 쓰러지는 약골이 된다고 한다.

간척으로 태어난 드넓은 평야 마을, 광활면

지평선 위로 펼쳐진 드넓은 가을 들녘을 실컷 달릴 수 있는 마을, 광활면.
 지평선 위로 펼쳐진 드넓은 가을 들녘을 실컷 달릴 수 있는 마을, 광활면.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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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에 있는 고추빻는 재래식 기계소리가 정겹게 들려온다.
 방앗간에 있는 고추빻는 재래식 기계소리가 정겹게 들려온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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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때이니만큼 마을마다 들어서 있는 정미소와 방앗간이 바쁘다. 매콤한 고춧가루 냄새에 끌려 들어간 남포리 방앗간. 이곳은 고추 빻는 재래식 기계를 아직도 쓰고 있다. 번갈아 고추를 찧은 기계 방망이 소리가 정겨워 아주머니 옆에서 구경을 하자니 아저씨는 내가 타고 온 빨간색 작은 자전거를 유심히 관찰하고 계셨다. 마시고 가라며 아주머니가 부엌에서 페트병으로 가지고 나온 '호박물'. 말린 호박가루에 율금(강황)·생강 등을 넣은 음료수라는데 자전거 여행자에겐 꿀물처럼 달고 약숫물처럼 힘이 난다.    

인상 좋고 인심 좋은 남포리 방앗간 아주머니 덕분에 한낮의 햇살 속을 부지런히 달려 광활면에 도착했다. 정말 동네 이름처럼 주변에 산들이 안보이고 시야가 탁 트이는 게 지평선이 이런 풍경이구나 싶었다. 전라북도 김제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펼쳐지는 곳이다. 이웃 동네인 김제 진봉면의 경우 논 면적(2130㏊)이 여의도(848㏊)의 1.6배에 이른다. 광활면의 것(604㏊)까지 합치면, 그 면적은 여의도 2배를 훌쩍 넘는다.

국토의 60%가 산으로 둘러싸인 나라에서 하늘과 땅이 서로 맞닿은 지평선을 바라보며 대평원을 달리는 기분은 무척 새롭다. 이채로운 가을 풍경에 때론 무아지경 속에 빠져 페달을 밟는다. 본격적으로 평원이 시작되는 김제 성덕면 남포리에서 시작해 광활면 창제리까지 이어지는 직선의 논둑길만 15㎞에 이른다. 한 번도 자전거 핸들을 돌리지 않고 달려갔다. 아무리 시선을 멀리 던져도 눈앞에 거칠 게 없다. 황금 들녘과 코스모스, 푸른 하늘이 어우러진 김제 들녘은 그 자체로 축제다. 최고의 가을 소풍을 나온 것 같은 기분이다.

광활면은 옛날 '구구지간 광활만인지지(九區之間廣闊萬人之地)'라고 했듯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고 넓다는 뜻에서 광활(廣活)이라 불렸다. 부근의 평야는 일만 이랑이란 뜻을 지닌 만경(萬頃) 평야. 광활면은 원래 바다 갯벌이었던 곳으로 일제 때(1925년) 쌀을 수탈하기 위해 갯벌에 10㎞ 길이의 제방을 쌓고 농토를 조성하기 시작됐다.

영구소작권을 준다는 꾐에 전국에서 3000여 명의 농부들이 몰려들어 온갖 학대와 허기를 참아내며 7년 동안 뼈 빠지게 일을 했다. 하지만 750만 평 규모의 간척지가 완공되자 일제는 약속을 어기고 인부들에게 1인당 다섯 마지기의 소작지만 배분했다고 한다. 황금 들녘을 수놓은 벼 이삭 하나하나는 갯벌을 농토로 간척한 농민들의 땀과 피눈물이 배어 있었다.

새만금 개발로 사라지는 갯벌 마을, 심포항 

포구에 쓰러져 있는 배가 심포항의 운명을 말해주는 듯 하다.
 포구에 쓰러져 있는 배가 심포항의 운명을 말해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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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지 무늬가 그려져 있다는 조개 백합.
 백가지 무늬가 그려져 있다는 조개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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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면을 지나면 진봉면으로 향했다. 지평선과 수평선이 만나는 김제 유일의 항구 심포항이 나타난다. 온통 노랗게 물든 가을 들판만 보다가 갑자기 바닷가로 들어서려니 기분이 묘했다. 심포항은 만경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아담하게 들어앉아 있다. 새만금방조제가 바다를 가로막기 전까지 이곳 주민들은 갯벌에 기대어 생계를 꾸려갔다.

심포 갯벌은 40분 이상을 걸어 들어가야 물가에 이른다고 한다. 한 횟집 아저씨는 "(이곳은) 백 가지 무늬가 새겨져 있다는 조개 백합과 바지락·물고기가 넘쳐나 '돈머리'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풍요로운 갯마을이었다"고 말해주셨다. 바다 위에 수풀들이 자라고 점점 육지화돼가는 항구 주변에 누워버린 어선 한 척이 고즈넉한 포구의 운치를 지녔던 심포항의 운명을 말해주는 듯하다.

인근에 있는 망해사(望海寺)는 심포항과 운명을 함께하는 곳이다. 해발 72m의 야트막한 산봉우리에 있는 작은 절로 서해 최고의 낙조 포인트로 유명하다. 절집의 외양은 비록 수수하지만 내력은 깊다. 642년 백제 의자왕 때 세웠으니 1400년의 역사를 지닌 사찰이다.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솔숲 속에 아담한 가람이 들어앉아 있는데, 전형적인 임해사찰로 선방은 물론 종각, 절집 마당 코앞이 바로 바다다. 그래서 '바다를 바라본다(망해사·望海寺)'는 뜻의 이름도 얻었다. 이제 새만금 사업으로 바다가 아닌 담수호를 바라보게 됐다.

이렇게 진봉면을 지나면 능제 저수지를 품고 있는 큰 동네 만경읍이 나타난다. 저수지 주변으로 펼쳐진 평야는 광활면만큼이나 드넓게 느껴진다. 일만 이랑이란 뜻의 만경(萬頃)평야다. 주민들은 이 평야를 '징게 맹갱 외에밋들(김제 만경 너른 들)'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김제와 만경의 들녘은 이 배미 저 배미 모두가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넓다는 이야기. 예나 지금이나 전국 최대인 이 곡창 지대를 두고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중앙 관리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만약 호남이 없다면 국가도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고.

▲ 주요 자전거 여행 코스 : 김제버스터미널 - 벽골제 - 죽산면사무소 - 남포리 - 광활면사무소 - 심포항 - 망해사 - 진봉면사무소 - 만경읍 버스터미널

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 5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자전거여행, #김제평야, #벽골제, #광활면, #지평선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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